14
불쌍한 난 처량하게 무릎을 그러안았다. 그렇게 춥고 외로운 새벽녘, 침대 밑 딱딱한 방바닥에서 홀로 오들오들 떨다가 잠이 들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적, 나는 넓고 푹신한 침대에 혼자 누워 있었다. 카림이 잠든 날 침대 위에 올려둔 게 틀림없었다.
정작 카림은 이곳에 없었지만.
“……이상한 곳에서 상냥하네.”
중얼거린 천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눈을 끔뻑거렸다. 이윽고 푹신한 침대 위에서 이리저리 뒹굴기 시작했다.
어젯밤에 있던 일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역시 그 끝은 품위유지비 얘기였다. 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오천, 오천, 오천…….”
히죽히죽 웃음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아직 계약서를 완벽하게 쓴 건 아니지만 오천이라니. 그것도 한 달에!
내 삶에서 쉽게 만져볼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게다가 카림의 입에서 나온 액수니 저 이상도 지급할 생각이 있다는 것일 터였다.
그, 그러면 얼마를 달라고 하는 게 적정선일까.
‘육천? 아니면 칠천?’
……이, 이건 너무 양심이 없나. 이미 오천도 충분히 많이 받는 건데.
한 달에 오천이나 생기면 그걸 다 어디에 쓰지? 아니, 애초에 다 쓰는 게 가능할 정도의 액수인가?
‘그러면 여기서 더 받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속물 같지만 별수 없었다. 무를 수 없게 된 결혼인데, 돈이라도 많이 받으면 좋잖아!
‘와, 나 이제 부자야. 부자라고!’
실실거리며 웃고 있을 적 하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일어나셨어요?”
“응, 라나.”
“오늘은 게르드로 출발하셔야 해요. 이그드라실을 현알하셔야 하잖아요.”
그 말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내가 지금 품위유지비에 신경을 쓰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나라의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세계수, 이그드라실은 왕실 신전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일 년에 한 번만 그 모습을 공개해서, 그 시기가 되면 왕실 신전에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애석하게도 난 한 번도 이그드라실을 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은 아파서, 말리카의 시녀로 들어간 이후에는 저 시기 무렵에 밀려드는 손님 접대하느라 바빠서.
이그드라실을 몇 번 본 적이 있는 언니가 말하기를, 나뭇잎 한 점 없이 가지만 남아 있는 거목이라고 했다.
뒤돌아서 생각해보면 정말 볼 것도 없는 앙상한 나무지만, 그 앞에 서면 형언하지 못한 기분이 든다나 뭐라나. 내가 이 세계의 자그마한 점에 불과하다는 걸 실감하게 되고, 위대한 세계수에게 저절로 경외하는 마음이 생긴다고 했다.
어쨌든 왕실의 식구들은 결혼하기 전 이그드라실을 마주하는 것이 관례였다.
신화에 따르면 초대 말리카가 이그드라실로 화했다고 한다.
해서 이그드라실은 프레이르에 여러 가지 도움을 주는 신성한 세계수였고, 왕실 식구의 결혼도 그런 일 중 하나였다.
왕실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이그드라실을 마주하면 나뭇가지가 부러진다고 했는데, 아직까지 그런 적은 없었다.
그리고 이그드라실이 다시 재림할 때에 나무가 꽃을 피운다고 했다.
프레이르 사람이라면 누구나 신화를 믿긴 하지만 이그드라실에 꽃이 핀다는 건 전설처럼만 내려오는 이야기였다. 반만년의 역사 동안 한 번도 꽃을 피운 적이 없다고 하니까.
그나저나 나, 나도 조만간 왕실의 식구가 되는구나.
‘……세상에.’
새삼스럽게도 현실이 내게 다가왔다. 태어나서 단 한 번조차 상상해보지 못한, 엄청난 일이었다.
누가 알았을까. 말단 귀족 중에서도 저 끄트머리 서열에 위치한 내가 왕족이 될 거라고.
“어서 준비하자고요. 일단 식사부터 대령할게요!”
그렇게 외치는 라나는 나보다 더 즐거워 보였다. 라나는 신이 난 발걸음으로 다시금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렇게 아침을 먹은 후에 욕실로 향했다.
화려하고 넓은 욕실에 발을 디디니, 확실히 돈이란 좋은 거라는 게 느껴졌다. 이 욕실조차도 우리 집에서는 감히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규모였다. 욕실 주제에 내 방보다 컸으니까. 하맘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목욕 시중을 들겠다는 하녀들을 전부 물린 채, 느긋하게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갔다.
수증기 가득한 천장을 올려다보는 내 눈이 반짝 빛났다. 아아, 수영을 해도 될 정도로 거대한 욕탕이라니. 앞으로는 이게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겠지?
이상한 행복감이 가슴을 빠듯하게 채울 적이었다.
“아주 좋아하시지?”
바깥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말하면 잔소립니다. 제 평생 그렇게 좋아하시는 모습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뵈었습니다. 다른 때였다면 숨기기라도 하셨을 텐데.”
“뭐가 그렇게 좋으신지 모르겠네.”
“원대하신 카림께서 말리카께 기꺼이 굴복한 걸로 아시던데요.”
누군가의 대꾸에 남자는, 어젯밤에도 날 괴롭힌 못된 카림은 짜증 어린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것참……. 꼭 그렇게 해석을 해야만 하는 일인지 모르겠네. 그냥 좋게 받아들이면 뭐 덧나기라도 하나.”
“누가 봐도 착각할 법할 일은 맞습니다만. 하필 말리카가 보낸, 말리카의 시녀니까요. 신전도 발칵 뒤집혔습니다.”
카림의 시종으로 추정되는 이가 딱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숨을 죽인 나는 귀를 기울였다. 본능적이고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카림이 하, 하고 기막힌 웃음을 내비쳤다.
“제까짓 것들이 뒤집혀 봤자지. 뭘 어쩌겠냐 싶지만…… 허튼짓이나 안 하면 좋겠는데.”
“잘 감시하겠습니다. 그런데 뭣 좀 여쭤봐도 됩니까?”
“해봐.”
“그래서 그 영애의 어디가 좋으십니까?”
카림이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내 짜증이 서려 있었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나름대로 귀여워. 따박따박 대들 때 특히.”
“카림……. 정말 취향 특이하십니다.”
한숨 서린 그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생각했다.
카림의 취향이 특이하다면, 그 취향에 부합해버린 난 뭐지. 나도 특이한 사람이라는 건가?
…갑자기 즐겁던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흑흑, 내가 저 이상한 심미안에 들어맞는 이상한 사람이라니. 이건 무효야. 사기라고!
“뭐가 특이한데.”
“사람은 순종적인 게 최곱니다.”
“얼씨고. 이봐, 하비.”
“예?”
“네 사고관이 그렇게 구시대적이니까 아직도 여자 손 한 번 못 잡아본 거야.”
그 노골적인 말에 카림의 수하가 펄쩍 뛰었다.
“제가 언제 여자랬습니까? 사람이랬죠.”
……내가 듣기에도 참 구차한 변명이었다. 지나친 부정은 긍정이라는 말이 있는데, 지금이야말로 저 말을 쓸 타이밍인 것 같다.
“원대하신 카림의 위치시면 더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글쎄. 썩 동의는 안 되는데.”
“신전도 카림께 반항하고, 말리카는 카림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잖습니까. 카림께서는 조용하고 순종적인 사람 곁에서 쉬셔야 합니다. 사람에게도 안정적인 휴식처가 있어야지요.”
“네 생각이 그럴 줄은 몰랐네. 근데 하비, 혹시 그거 알아?”
점점 더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저 수다를 음악처럼 감상하고 있던 나는, 내가 목욕을 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상기해냈다.
……잠시만, 그렇다면?
“예? 어떤 걸 말씀하십니까?”
“너도 따박따박 잘 대들어서 내 옆에 있는 거야. 아니었으면 벌써 쫓아냈다.”
“…….”
남자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카림은 흡족하다는 듯 답했다.
“그러니 영양가 없는 얘기는 그만하자?”
“…….”
“알아들었으면 조금 이따 보자고.”
“……넵. 평안한 시간 되십시오.”
그 말과 동시에 끼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욱하게 맺힌 수증기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수증기를 뚫고 보이는 특이한, 애쉬 그레이 빛깔의 머리카락.
……카림이었다.
내 그림자를 본 건지 카림의 얼굴이 서서히 내 쪽으로 돌아섰다. 순간 눈과 눈이 마주쳤다.
카림은 욕탕에 몸을 담근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끔뻑, 끔뻑.
딱 마주친 시선은 끊임없이 끔뻑거리기만 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내 머릿속은 새하얗게 물들었을 뿐이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아주 잠깐의 정적 후,
“너 여기서 뭐 해?”
“꺄, 꺄아아악!”
카림의 입이 떨어진 그 순간,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른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카림에게 마구 물을 뿌리면서.
“오.”
따뜻한 물을 뒤집어쓴 카림이 나지막한 감탄사를 토해냈다. 머리카락에 맺힌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끊임없는 물세례 틈새로 엄지를 치켜드는 걸 잊지 않으며 속삭였다.
“절경이다?”
“다, 당장 나가! 당장!”
수치심과 부끄러움, 민망함과 더불어 온갖 감정이 차올랐다.
……그나마 목욕탕이 수증기로 가득 찬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혀를 콱 깨물고 죽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