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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13화 (1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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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야.”

카림은 의외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귀여운 아내님하고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지. 뒷말 안 나오게, 미리 제대로 조율하자고. 나도 바라는 게 많거든.”

의자에 걸터앉은 카림이 다리를 꼬았다. 습관처럼 이마를 짚은 모습이 꽤나 섹시했다.

……입만 다물고 있다면 껍데기는 정말 완벽, 그 자체였다.

‘언니, 언니는 천재가 틀림없어.’

순수하게 감탄하며 언니가 알려준 대로 말을 이었다.

“제가 한 가지 말씀드릴 때마다 카림께서도 원하는 걸 한 가지 말씀하시면 공평하죠? 불가능할 것 같으면 미리 말해서 조율하고요.”

“바라던 바야. 먼저 말해.”

“제 첫 번째는, 결혼하기 전까지 제 몸에 손대지 말 것이에요.”

강제로 한 방을 쓰게 생겼는데 불상사는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 싶었다.

이대로라면 며칠 내로 결혼식까지 치를 것 같았지만, 지금 눈앞에 닥친 일이 중요한 법이다.

망할 놈의 카림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결혼한 후에는?”

그걸 왜 지금, 나한테 물어보는데! 마음이 동하면 자연스럽게 몸도 동할 거 아냐, 이 작자야!

이 상태가 지속되면 이 사람과 평생토록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한마디뿐이다.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는 몰라요.”

“좋아. 그럼 내 첫 번째, 이름으로 부르기.”

그건 좀 많이 의외였다.

순간 할 말을 잊은 나는 카림을 올려다보며 멍청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네가 원대하신 카림이라고 부를 때마다…….”

내 시선에서 뭔가를 느낀 걸까. 이 나쁜 남자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확 잡아먹고 싶어.”

소름이 쫙 돋았다. 정말 뼈까지 오독오독 씹어 먹을 것 같아서.

나, 난 가늘고 길게 살고 싶단 말이야!

이어서 그가 그윽하고도 느끼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건 덤이었다.

“있지, 프리드린?”

“네, 네?”

“이렇게 애정을 가득 담아서 릴이라고 불러줘.”

“……알겠어요. 애정은 노력해볼게요.”

“좋아, 그럼 두 번째.”

카림이 부드럽게 손을 휘두르자 허공에서 펜과 종이가 뚝 떨어졌다.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한 펜이 종이 위에 글자를 적어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신기하게 바라볼 적 카림이 말을 이었다.

“각방은 절대 금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렇게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자고 간다고 선언하는 것보다, 미리 합의한 상황이 백배는 낫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나는 내 조건을 이야기했다.

“제 눈앞에서 사람을 해치지 말 것이요.”

카림이 순간적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 물어온다.

“너, 그 일 마음에 담고 있구나?”

“그럼 그걸 어떻게 까맣게 잊어요?”

굳이 되새기지 않을 뿐이지,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나야말로 멀쩡하게 카림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이 신기한 것 아닐까.

이게 가능한 것은 아마, 그 끔찍했던 상황에서 날 구해줬다는 고마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구해줬다는 고마움. 눈앞에서 사람을 해친 두려움. 그 상반된 감정이 내 안에서 어지럽게 섞여 있었을지도 모른다.

“설마 그걸 정말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나.”

“…….”

이어진 물음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 행동을 긍정이라고 여긴 건지, 카림은 제법 진지하게 충고했다.

“그런 생각을 품고 있다면 고치는 게 좋을 거야. 앞으로 정말 피곤해질 테니.”

“……네, 그러면 정정할게요. 살아 숨 쉬는 모든 것.”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따지기 시작하면 끝나지 않을 논쟁일 것이다. 그래서 고친 말에 카림이 또다시 태클을 걸었다.

“그러면 벌레도 안 되나?”

“갑자기 웬 벌레요?”

“바선생이라든가.”

바, 바선생님?

징그럽게 꿈틀거리는 갈색 더듬이에, 털 달린 다리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내가 기겁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카림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얄밉게도 중얼거렸다.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이라면 바선생님도 포함…….”

“그런 건 알아서 치워주시면 되잖아요! 이의 없으시다면 세 번째로 넘어가요!”

내 고함에 카림이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펜이 알아서 또다시 움직이며 예쁘게도 글자를 적어갔다.

“이상한 짓 절대 하지 않기요.”

“이상한 짓이 뭔데?”

“그…… 여지껏 해 오신 일들이요! 제가 연회에서 본 거라든가! 방금 전에 바선생님 얘기도 그렇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내가 경험하지 않은 수많은 일들. 카림을 미친개로 만들어버린 것들.

그걸 꺼내 들자 카림이 자연스레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그게 가능할 것 같아? 나도 살아야 할 거 아냐.”

“저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얼굴을 들고 다닐 거 아니에요. 결혼해서 철든 걸로 가요.”

“……뭐?”

“여자에 미치면 안 되는 것도 가능하게 되잖아요.”

그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 말에 웃음을 터뜨린 카림이 되물었다.

“푸하하. 너, 자신감이 좀 넘친다?”

“제가 취향이니 어쩌니 하신 건 카림이 먼저였어요.”

“카림이 아니라 릴이라니까.”

“네, 그런 사소한 건 일단 넘어가고요.”

아직 계약서에 도장 안 찍었으니 지금은 어떻게 부르든 내 맘이다.

“말리크께 제가 완벽한 이상형이라고 하셨죠? 그러면 그 완벽한 이상형과의 사랑 놀음에 푹 빠져서 연애 외에 다른 생각이 안 난다고 하세요.”

내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던지 카림이 미간을 모았다.

“……음.”

“더 이상은 안 바랄게요. 왕족으로서의 최소한의 품위를 지켜주시면 그걸로 만족할게요.”

이어진 내 말에 카림은 한동안 물끄러미 날 바라보기만 했다.

합의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던 걸까. 아무것도 적지 못한 펜은 흰 종이 위에서 뱅뱅 돌기만 했다.

제법 시간이 지난 후 카림이 입을 열었다.

“너도 좀 특이하다.”

“네? 뭐가요?”

“보통 혼전계약서를 쓰면 결혼 후의 현실적인 걸 얘기하지 않나? 재산이라든가, 자식 얘기라든가. 그래서 나도 각방 얘기부터 꺼낸 거고.”

자식 얘기, 라는 말에 괜히 흠칫했다.

아픈 시간이 길었기 때문이었을까.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식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결혼을 하면 생각을 해야 할 문제이긴 하지.

나는 눈앞의, 껍데기만 멀쩡한 남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한 차례 훑어보았다.

‘이 남자와…… 자식?’

……지금은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씨 도둑질 못 한다고, 똑같은 사람이 나오면 어떻게 해.

내가 오래 살고 싶은 만큼, 내 자식도 생명을 존중할 줄 아는 상냥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근데 다 둘째 치고, 가장 먼저 한 달 품위유지비로 오천쯤 달라고 할 줄 알았어.”

그 말에는 입이 떡 벌어질 뻔한 걸 억지로 참았다.

언니가 저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니가 말한 것은 기껏해야 오백 정도였다고!

오천이면 검소하신 아버지께서 일 년 동안 쓰시고도 남을 돈이었다.

그, 그게 고작 한 달 품위유지비라고? 언니가 말한 대로 오백만 되어도 감지덕지일 것 같은데!

이그드라실이여, 저 결혼 잘하는 것 같아요.

미친개면 어때요. 바람둥이면 어때. 내가 감당 못 하면 어때요. 경제적으로 풍족하면 위로가 될 거 아니야!

언니가 돈이 모자라냐고 물어볼 때에 수긍하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액수가 들리니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순간 내 눈이 반짝 빛났을 것이다.

“달라고 하시면 주실 거예요?”

“뭐, 오천 정도야. 드레스 한 벌 사면 조금 남으려나.”

그 말에 나는 멍청하게 눈을 끔뻑였다.

…아버지께서 일 년을 쓰시고 남을 돈이 드레스 한 벌 정도라고?

“드레스가 그렇게 비싸요?”

“응? 그야 드레스만 살 건 아니잖아. 드레스에 맞는 장신구며 구두…… 뭐 등등 사고 나면 오천으로 모자랄 때도 꽤 있지. 말리카는 한번 작정하고 나서면 억이야.”

이번에는 입이 떡 벌어지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어, 억?

새삼스럽지만 이 사람이 모두 죽여 버린, 그 강도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야, 오늘 본 애들 중 최고로 거지다.

― 어떻게 된 게 싸구려 자수정도 없냐.

…내가 가진 건 정말 아무런 장식도 없는, 어떻게 생각하면 수도원 수준의 검소한 옷들이었다.

그 정도니까 일 년에 오천으로 세 식구, 언니가 결혼하기 전에는 네 식구가 생활하는 게 가능했던 걸까.

“침 떨어진다.”

그 말에 소매로 입가를 재빠르게 가렸다. 그리고 카림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0.1초였다.

“죄, 죄송……. 안 떨어졌잖아요!”

“뭐가 됐든 간에. 어쨌든 네 번째 조건부터는 좀 더 생각해보고 쓰자고.”

그의 말에 따지고 싶은 마음은 쏙 들어가 버렸다.

그, 그래.

품위유지비 오천…….

너무 혹하는 이야기인지라 이 자리에서 더 이상 이 혼전 계약서를 써 나갈 수는 없었다. 이왕지사 억지로 결혼하는 거, 최대한 유리하게 해야 하지 않겠냐고.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낼 테다.

“내 세 번째는 이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금지야.”

그 말에는 잠시 멈칫했다. 이유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요?”

“너만 한 사람은 못 만날 것 같으니까.”

저건 진담일까, 거짓말일까.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을 적 자리에서 일어선 카림은 성큼성큼 침대에 다가가 먼저 누워버렸다. 이불까지 덮은 채 평온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이만 자자.”

“……네?”

“이리 와.”

속삭인 카림이 한쪽으로 팔을 쭈욱 핀 채, 제 팔을 툭툭 건드렸다.

……팔베개라도 베라고?

기함한 내 언성은 또다시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돼, 됐거든요!”

“그래? 뭐, 내일 아침에 봐.”

그대로 이불을 뒤집어쓴 카림은 두 번 묻지 않았다. 한참 동안 그를 째려보고 있던 나는…… 미끄러지듯 침대에 기대고 앉아 무릎을 그러모았다.

……이 나쁜 놈아.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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