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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미친개라 곤란하다-12화 (1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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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멈칫거린 나는 속으로 그 말을 곱씹어야 했다.

‘살기 위해서…….’

나야말로 살고 싶어서 내내 발버둥 쳤으니까. 그래서 살고 싶은 게 어떤 마음인지, 내가 가장 잘 아니까.

하지만 스스로의 존엄을 해치면서까지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피어올랐다.

이미 말리크는 모든 형제를 죽여 버린 전적이 있었다. 그런 말리크에게 남아있는 가장 큰 위협이 카림이었다.

저번에 봤을 때 두 사람의 사이가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말리크는 카림이 없어지면, 겉으로는 악어의 눈물을 보일지라도 속으로는 가장 좋아할 위치였다.

지금도 자신이 직접 손을 쓰지 않고 카림을 없앨 방법을 고안하고 있지 않을까.

내가 저 상황에 처했다면 정말 미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내 자신을 해치고 싶을 정도로.

나만 없어지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할 테니까.

고개를 바짝 들어 올린 나는 되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서 살고 싶으신데요?”

“…….”

순간 카림은 뒤통수를 맞은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동안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한 것에 가까웠다.

한동안 천천히 내 모습을 훑어보던 카림은 어렵사리 대답했다.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날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해 두지.”

…그럴듯한 답이었다. 나도 아플 당시 필사적으로 견뎠던 이유 중 하나가 가족 때문이었으니까.

훅 한숨을 내쉰 카림이 말머리를 틀었다.

“그리고…… 그런 연극은 생각 외로 어렵지 않아.”

“……어렵지 않다뇨?”

“내가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로 행동하면 되거든.”

“반대로요? 그건 무슨 의미예요?”

“예를 들어 가위바위보를 한다고 쳐.”

숨을 고른 카림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내 생각으로는 가위를 내야 저 사람을 이길 수 있어. 하지만 연기를 해야 하니 보를 내는 거지.”

“보를 내면 비기는 거지 이기는 게 아니잖아요. 그게 어떻게 정반대예요?”

정반대라고 하면 저쪽에 져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면 주먹을 내야지.

내 대꾸에 정곡을 찔린 듯, 카림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처음이었다, 카림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괜히 이긴 것 같아서 뿌듯할 때 그가 기막히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거 정말 엄청 따지네? 변호사 해도 되겠어.”

“거라뇨. 사람한테 거가 뭐예요!”

“이거 봐.”

내 대꾸에 카림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 정말 의외의 한마디를 남겼다.

“이래서 맘에 든다니까.”

“…….”

이번에는 내가 조용히 입을 다물 차례였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대체 어디가 마음에 든다는 건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쨌든 내게도 그런 사정이 있어. 내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

……결론적으로 살기 위해서라고.

여러모로 한숨이 나오는 이야기였다.

“그냥…… 계승권을 포기하시는 건 어때요? 그러면 굳이 그런 연극을 하지 않으셔도 말리크의 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내가 포기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권리가 아니야. 난 그냥 왕족이 아니니까.”

그건…… 그랬다.

카림은 그냥 왕족이 아니었다, 무려 이그드라실의 유지를 잇는 사람이었다.

이 나라가 건국된 근본 그 자체고, 나라의 모든 사람이 그가 살아 숨 쉬는 자리조차 신성하게 여겨야 했다. 원래대로였다면 나 같은 사람하고는 엮일 일이 전혀 없었겠지.

…사실 이렇게 나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내가 이 사람의 실체를 몰랐다면 지금 자리에 엎드려서 절이라도 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이상한 별명을 얻기 위해 연극을 하고 다니셨다고요?”

“그럼. 그런데도 이 난리인데 내가 안 그랬으면 어땠을까. 형님이나 나, 둘 중 하나는 벌써 죽어 나갔겠지.”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원래 권력만큼 비정한 것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 당장 우리 집안만 봐도 그랬다.

장남인 백부님은 영주 자리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할아버지께서 가지고 있는 작위는 모두 자신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덕분에 차남인 아버지가 가질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나마 지금 가지고 있는 영주 자리도 아버지 사후, 백부님의 자식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선심 쓰듯 내어준 것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조부께서는 차남을 안타깝게 여기셨지만 백부님은 결사반대했다. 아버지와 백부님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음에도 그러했다.

하물며 왕위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내가 먼저 죽었겠네. 말리카 덕에.”

이어지는 말은 도무지 동의할 수가 없었다.

일 년이나 말리카를 모셨던 내게 있어, 말리카는 가련하고 아름답고 존경받아 마땅할 사람이었으니까. 말단 시녀 하나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시던 분이셨다.

“말리카께서는 그럴 분이 아니시거든요? 얼마나 좋은 분이신데요.”

“어련하시겠나.”

카림은 내 말에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을 뿐.

어쨌든 이 남자의 사정도 알았겠다, 우리 가족 일이 생각나 어느 정도 이해도 되었겠다.

……차마 매몰차게 쫓아낼 수가 없었다.

카림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살기 위해 애를 썼다는 걸 알자 동정심이 들 지경이었다.

그래, 이곳에서 자고 가는 것 정도야 못 들어줄 건 없잖아?

흑, 난 너무 착해서 탈이야.

결국 난 수긍의 뜻으로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침대는 제 거예요.”

“오. 그럼 같이 쓸 생각이었어?”

대꾸하는 말에는 입을 떡 벌려야 했지만.

……지금 뭐라고 하는 거니, 이 인간아?

카림은 거기서 한 술 더 떴다.

“의외로 음흉한 다람쥐였네.”

내, 내가 왜 저런 말을 들어야 하는데! 내가 얼마나 순진하고 순수한 소녀인데! 날 자꾸만 이상하게 물들여 가는 건 당신이잖아!

“……지금 뭐, 뭐라고 하시는 거예요.”

“한 가지 더 알려줄까?”

카림은 보란 듯 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눈으로 주욱 핥아 내렸다. 그 노골적인 태도의 끝, 카림이 한마디 던졌다.

“내 진짜 취향은 연상이야.”

“그러면 왜 제게 청혼하셨어요! 연상에게 하시지!”

“구두가 발에 맞아서?”

“아니…….”

“그 구두가 딱 맞는 사람 처음이었거든.”

저렇게 나오자 뭐라고 할 말이 없던 나는 입술만 바들바들 떨었다.

저게 진짜 이유가 아니라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날 선택한 진짜 이유가 있었겠지.

지금은 결단코 말해주지 않을 거고.

두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솔직히 말씀하세요. 그…… 제게 하신 짓들, 즐기고 계셨죠?”

“뭐, 어느 정도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긍정이었다.

“살면서 많고 많은 사람을 겪어봤는데, 넌 좀 특이하거든. 넌 툭 치면 저 멀리까지 굴러갔다가 아득바득 기어서 되돌아와. 네 반응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를 거야.”

“……아, 네.”

“아, 참. 그리고 네 말 들으니까 생각나는 게 하나 있네.”

카림이 내 등 뒤에 있는, 넓은 침대를 흘끗 바라보며 속삭였다.

“침대도 같이 쓰자?”

지금 미쳤냐고! 네가 말할 때 튄 침이 마르기도 전에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꿔도 되냐!

당연하게도 난 발악했다.

“가, 같이 쓸 생각이었냐고, 저보고 음흉하다고 하신 게 불과 일 초 전이에요!”

“난 아무 생각 없었다? 네가 먼저 말한 거야.”

“전 제 거라고 했다고요!”

“어차피 결혼할 사이인데 내외할 필요 없잖아? 같이 쓰는 게 더 그럴듯하고.”

……내 무덤을 내가 팠구나.

속으로 한탄할 적, 카림은 순진무구하게 물어왔다.

“새벽에 누가 들이닥치면 어떻게 해?”

“누, 누가 미쳤다고 카림의 침실에 막 들어와요?”

“말리크와 말리카의 사람이면 가능하지. 그때 방은 같이 쓰는데 따로 자면 무슨 소용이야.”

그게 내가 알 바냐!

오기가 생긴 나는 또다시 스스로의 무덤을 팠다.

“……아예 제 알몸을 끌어안고 자고 싶다고 하시지 그러세요?”

“응?”

“왜요, 함께 밤을 보냈는데 옷 입고 있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반쪽짜리 바람둥이라고, 그간 하신 일이 전부 거짓말이었다고 소문나기 딱 좋겠어요!”

“오.”

감탄을 토해낸 그가 내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너 좀 천재다?”

구미가 당긴다는 듯, 내 말이 옳다는 듯 제대로 동조한 카림의 얼굴은 진지함 그 자체였다.

이, 이거 완전 변태 아니야?

카림을 부르는 내 입술은 파들파들 떨려 왔다.

“워, 원대하신 카림.”

“원대하신 카림이 아니라 릴이라니까. 부부는 동등한 관계야. 남편 될 사람을 언제까지 그렇게 부를 거야? 나도 데스테리언 성후님이라고 불러드릴까?”

무언가 긴 말이 나왔지만 나는 그 말을 전부 무시했다.

언니의 생각이 백번 옳다는 생각을 하며 중얼거렸다.

“우리, 혼전 계약서 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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