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어, 언니! 언니! 야, 아리엘!”
그냥 그렇게 가버리면 어떡해! 날 살려달란 말이야!
내 필사적인 외침을 듣는 시늉조차 하지 않은 언니는 매력적인 엉덩이를 살랑거리며 방 밖으로 빠져나갈 뿐이었다.
언니의 뒷모습과 절망에 빠진 내 모습을 번갈아 살펴본 카림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재밌네, 네 언니.”
…저 말이 음흉하고 끈적하게 들렸다면, 지금 이 순간의 나는 미친 걸까?
순간 바짝 얼어붙은 나는 망연자실하게 카림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카림은 그런 내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붙었다.
익숙지 않은 남자의 향이 확 끼쳐 왔다. 왕성에서나 가끔 맡아 봤던 고급 향유 냄새였다.
“프리드린.”
들려오는 음성이 생크림처럼 달콤했다. 아니, 코피 터질 듯 섹시하다는 말이 더 어울릴까.
…왜 평소처럼 너라고 안 하고 이름을 부르는 걸까. 내 이름이 저렇게 색스러운 느낌이었나?
덕분에 이름 모를 긴장감이 허리를 타고 스물스물 올라오는 듯했다.
어느덧 남자는 내 코앞에 서 있었다.
검고도 하얀, 독특한 애쉬 그레이빛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어울리지 않게 품위 있는 눈빛이 나를 담았다.
내 위로 익숙지 않은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천천히, 부드럽게 움직인 손등이 내 뺨을 스쳤다.
순간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식겁한 나는 도망치듯 뒷걸음질 쳤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두두두 내뱉었다.
“저, 저, 저, 저리 가세요! 저, 저, 저는 마음의 준비가 아직 안 됐다고요!”
“……지금 뭐라고 하시는 건지?”
“조, 조, 조, 조, 좋은 밤이라뇨? 그건 언니의 말일 뿐이고 전 아무것도…….”
“푸핫!”
……시원스레 웃음을 터뜨린 카림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배를 붙잡고, 숨마저 헐떡거리며 열심히 웃어댔다.
어쩔 줄을 몰라 울상을 지으며 발을 동동 구르는 나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러기를 한참, 겨우 웃음을 멈춘 카림이 파들파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호수처럼 깊은 눈에는 눈물마저 맺힌 채였다.
“너, 넌 더 웃기네. 너랑 살면 적어도 심심하지는 않겠어.”
“뭐, 뭐가요. 제가 뭘요…….”
“혹시 기대하는 거라도 있었나?”
그 말에 자연스럽게 발악했다. 내, 내가 얼마나 순수하고 순진무구한데!
“그럴 리가 없잖아요!”
“맞는 것 같은데. 좋은 밤이라고…….”
카림이 말꼬리를 흐렸다.
여운이 남는 듯한 속삭임 끝, 나긋하게 움직인 카림의 손길이 흐트러진 내 붉은 머리카락을 한 가닥 붙잡았다.
“무슨 생각을 한 걸까.”
…얼굴이 머리카락만큼이나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응?”
은근하게 물어오는 음성이 정말로 외설적이었다. 색스러운 남자를 피해서 후다닥 뒤로 물러선 나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붙잡으며 물었다.
“……저, 정말, 진짜, 여기에는 왜 오셨어요?”
“보고 싶어서?”
“거짓말하지 마시고요! 우리 그런 달콤한 사이 아니잖아요!”
“오, 안 속네. 재미없어라.”
아…… 한 대 때리면 속이 후련할 것 같다. 카림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꾸했다.
“내가 내 아내님을 보러 오겠다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내님이라뇨! 아직 결혼 안 했어요!”
“그런 게 문제라면…… 정정할게.”
카림은 정말 의외로, 순순히 내 말에 수긍했다. 하지만 이어진 말이란.
“내 집에서 내가, 다람쥐 같은 약혼녀를 보러 왔는데 안 될 거 있나?”
내가 결단코 반박할 수 없는 소리였다. 나는 신음처럼 그의 말을 되씹었다.
“야, 약혼녀…….”
“곧 나와 결혼할 여자를 약혼녀라고 하지 뭐라고 할까.”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서 뭐라고 대꾸할 수가 없었다. 약 올라, 흑!
“그리고 원한다면 기꺼이, 진지하게 대꾸해줄게.”
카림은 흡족하게 나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바라던 바였기에 나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네, 네!”
“첫째, 애초에 내 집인데 내가 어딜 가든 내 맘이야.”
……그것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그래, 집주인이 자기 집에서 어딜 가든 집주인 마음이지.
“둘째, 아직 형님이 여기 계시지.”
“그, 그렇죠. 말리크께서 여기 계시죠.”
“기억하지? 난 애초에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사람하고 결혼하겠다고 했어.”
그랬었다. 고로 나와 결혼하겠다고 나선 지금 내가 완벽하게 마음에 들었다는…….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제아무리 착각은 자유라지만 이런 식의 도끼병은 곤란했다.
“완벽한 이상형을 눈앞에 둔 미친개가 다른 방에서 잔다는 게 말이나 돼?”
이윽고 들려오는 소리에 난 정확하게 3초 굳었다. 내게 닿은 말은 뒷말뿐이었다.
다른 방에서 잔다는 게 말이나 돼?
다른 방에서, 다른 방에서, 다른 방에서…….
잔다는 게, 잔다는 게, 잔다는 게…….
머릿속에 뱅뱅 메아리치는 그 말.
저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이었다.
“……지, 지, 지금 여기서 자고 가시겠다고요?”
펄쩍 뛰며 한 말에 이 정신 나간 남자는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게 미, 미쳤나.
입 밖으로 육두문자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쑤셔 넣었다.
“이, 이런 건 제가 거부한다고 하세요! 그럼 간단하잖아요!”
“내 별명의 의미를 생각해볼래? 거부한다고 순순히 물러서면 그게 미친개일까.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지.”
…순간 할 말을 고스란히 상실했다.
저게 저렇게 당당하게 할 수 있는 말인가?
나는 절대로 카림을 말릴 수도, 이길 수도 없었다. 그러니 최소한의 방어는 해야 했다. 아니, 거의 필사에 가깝게 내 순결을 사수해야만 했다.
나도 나름대로 첫날밤에 대한 환상이란 게 있단 말이야!
“저, 저도 진지하게 여쭤볼게요.”
“응. 뭔데?”
“호, 혹시, 설마, 싫다는 여자를 억지로 가, 가, 가…….”
…그래도 차마 내 입으로 나오지 않는 단어가 있었다. 하지만 알아듣지 못할 말은 아니어서 카림이 인상을 확 일그러뜨렸다.
“도대체 사람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그러더니 깨달은 게 있다는 듯 빠르게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아참, 나 사람 아니지. 멍멍. 왈왈. 으르렁.”
……개 짖는 소리 흉내는 덤이었다.
사실 굳이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카림이 ‘미친개’라고 불리는 이유 중 하나는 술과 여자에 빠져 지내기 때문이었으니까.
가만히 있어도 여자들이 알아서 다가오는 위치의 사람인데 범죄를 저지를 이유는 없지 않을까.
이 와중에 혼자 진지한 나는 겨우 중얼거렸다.
“사,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죽이셨잖아요.”
살인과 강간, 어떤 게 더 죄가 클까. 가치관에 따라 다르겠지만 둘 다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갸우뚱거린 그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물을 뿐이다.
“그게 사람이었나?”
“……네?”
“그렇잖아? 미친개도 안 하는 짓을 하는 걸 인간이라고 할 수 있나?”
그,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렇네.
언니도 인간쓰레기라고 대놓고 말하긴 했다. 죄책감도 뭣도 없는 저 당당함 속삭임에 설득당한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깨달은 게 하나 있었다.
‘거부한다고 순순히 물러서면 그게 미친개일까.’
카림은 자신의 공공연한 별명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 별명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나는 저 말에서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잠, 잠시만요. 원대하신 카림?”
대충 생각이 정리된 나는 고개를 바짝 들어 올려 카림을 응시했다.
“원대하신 카림이 아니라 릴.”
“네, 어쨌든 간에요.”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란 말이야.
이 순간 카림을 보는 내 얼굴은 창백하게 물들어 있었을 것이다.
“혹시…… 혹시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 연극이세요?”
“지금까지의 모든 일이라니.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느끼한 중얼거림은 덤이었다.
“널 만난 이후의 일은 단 하나도 연극이 아닌데. 모두 널 향한 내 마음에서 우러나온 순수한 행동이지.”
“아뇨, 그게 아니라 그 별명을 얻기 위한 모든 일이요!”
“와.”
카림은 고요한 감탄사를 토해냈다.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속삭였다.
“너 정말, 의외로 감이 좋아.”
……정말이라는 것이다.
경악한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마, 말도 안 돼. 이건 사기야. 대신민 사기극이었어.”
“사기극이라니. 대체 뭐가 말이 안 되는데?”
“겨, 결혼 안 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하신 건…….”
“그것도 어느 정도 진심이었어. 난 거절당하는 거에 익숙하지 않다고.”
당연한 말을 한 카림의 입꼬리가 한층 더 동그랗게 말렸다.
“네가 단칼에 거절했으면 눈이 회까닥 돈 내가 무슨 짓을 했을지 나도 모르거든.”
“그러면 왜, 왜 굳이 그런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으려고 연극을 하세요?”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다만 한순간, 카림은 굉장히 쓸쓸한 미소를 그렸다.
“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