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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렇게 그들은 결혼했다
“난 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
내가 아파서 쓰러졌다는 백모님의 전보에 가장 먼저 도착한 가족, 내 언니 아리엘 라비아가 중얼거렸다.
그 남자의 어처구니없는 청혼에 정신이 완전히 갈려버린 나와 다르게 언니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지금 상황을 충분히 즐기고 있었다.
“모든 걸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수락했으면 끝 아니니? 귀족 세계에서 신의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모르지는 않을 거야, 프리드린.”
언니의 말은 물론 옳았지만…….
도대체 그 상황에서 어떻게 거절한단 말인가?
애석하게도 날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선택도 하나뿐이었다. 울상을 지은 나는 겨우 중얼거렸다.
“거절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거절해?”
“얘는. 정말 싫었으면 ‘전 결혼 못 하니 차라리 죽이세요!’라고 했어야지. 설마 카림께서 정말로 널 죽이셨을까.”
설마가 사람 잡는다. 언니가 카림의 그 모습을 못 봐서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일 터였다.
수틀리면 정말 기꺼이 죽였을걸?
난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죽는 건 싫다고!
언니는 아주 얄밉게 한마디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지금은 그냥 ‘저 같은 걸 선택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고 절부터 올리렴. 얼마나 좋은 자리야? 나 같으면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기 전에 도장부터 찍었어.”
“언니!”
자연스럽게 언성이 높아졌다. 아름다운 언니가 우아한 미간을 모았다.
“어휴,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애 떨어지는 줄 알았잖니.”
“응? 애? 언니, 나 이제 조카 생겨?”
“얘는. 말이 그렇다는 거야.”
언니가 슬쩍 고개를 숙였다.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귀밑이 붉게 물든 채였다.
“아직 신혼인데 벌써 애가 생기면 큰일이지. 난 이 시간을 더 즐기고 싶어.”
“……언니도 참. 아직도 형부가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그러니까 수많은 사람 중 그이를 선택했고, 이것저것 안 따지고 기꺼이 결혼한 거 아니겠니?”
언니는 첫 사교 모임에서 만난 형부와 뜨거운 연애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했다. 모두 내가 침대에 누워 있던 시절에 벌어진 일이었다.
때문에 언니는 자신의 연애사를 내게 옛날이야기 들려주듯 말해주곤 했다.
언니의 묘사에 의하면 형부는 아주 다정하고 성실하고 건실한 남자였다. 언니만 바라보는, 여자라고는 언니밖에 모르는. 내 눈앞에 놓인, 머잖아 내 남…… 편이 될 카림과는 다르게 말이다.
나는 카림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공식적인 별명에서 알 수 있듯 도른…… 아니, 노른자예요?
날 대하는 태도에서 알 수 있듯 카사노바 뺨치는 바람둥이예요?
…너무 비교되는 상황이다.
입술을 비죽 내민 나는 툴툴거렸다.
“그런데 왜 난 고맙습니다! 하고 결혼하래?”
“왜긴. 몰라서 물어?”
“당연하지!”
“언감생심 네 주제에 카림이 가당키나 해?”
틀릴 게 전혀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때로는 맞는 말을 들을 때 더욱 속이 터지는 법이다. 적어도 언니만큼은 내 편을 들어주기를 바랐는데!
자연스럽게 볼멘소리가 터졌다.
“내 주제라니. 언니, 너무한 거 아냐?”
“너무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니야, 우리 쥐새끼. 애초에 왜 그렇게 학을 떼고 싫어하는 거니? 어디 이유나 좀 들어보자.”
“바람둥이잖아!”
“거꾸로 생각해봐. 바람둥이만큼 여자 마음 잘 아는 사람은 없어. 지금까지 결혼 생각이 전혀 없던 바람둥이가, 말리크께서 직접 나서셔도 싫다고 학을 떼던 분께서 널 콕 찝어서 결혼까지 하자고 하셨어. 근데 그게 가벼운 마음이겠니?”
다른 사람이 볼 때면 저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에서나 등장할 법한, 뜨거운 연애 끝에 카사노바를 완벽하게 사로잡은 여자의 이야기였다.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입술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뭐?”
“여기까지 오다가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때 겪은 일이…….”
그 끔찍한 일을 다시 떠올리는데 목소리가 저절로 흔들렸다. 내 동요를 눈치챈 언니는 자연스럽게 내 말을 받았다.
“아, 그 일이라면 마부에게 다 들었어. 카림께서 구해주신 거라면서.”
“그건 그런데……. 그냥 구해준 거라면 나도 이러진 않았을 거야.”
정말이었다.
그 사람이 그냥 나를 구해준 거였다면 그 자리에서 한눈에 반했을 것이다. 어쨌든 생긴 건 멀쩡하니까.
나름대로 순수한 꿈을 꾸고 있던 내 눈에, 백마 탄 왕자님 나타난 것처럼 비추어지지 않았을까.
그렇게 되었다면 그 사람의 별명이 미친개고, 밤낮으로 여자가 바뀌고 어쩌고 하는 건 아무런 상관도 없었을 터였다. 눈에 콩깍지가 씌었는데 저딴 게 눈에 들어오겠냐. 도리어 여자가 바뀌고 어쩌고 하는 걸 기회로 삼아 육탄돌격을 했지.
하지만 애초에 그럴 수 없는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내 눈앞에서 사람들을 썰…… 썰어버린 게 문제지.”
오한이 들어 몸이 부르륵 떨렸다. 그래, 그건 썰어버렸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렸다.
“언니, 형부가 그랬다고 생각해봐. 그 옆에서 멀쩡히 살 수 있겠어?”
“프리드린.”
언니는 아주 부드럽게 나를 불렀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목소리와 다르게 거침없었다.
“그깟 인간쓰레기 몇 죽은 게 대수야?”
나를 제외한 사람들에게는 항상 온화한 언니가 저런 거친 말을 내뱉는 걸 처음 보았다. 덕분에 내 귀를 의심하고 있을 적 거침없는 말이 이어졌다.
“그때 카림께서 나타나지 않았다면 네가 지금 여기 멀쩡히 이러고 있을 수 있었겠니? 최소한 강제로 범해졌겠고, 최악의 상황이라면 죽었겠지.”
…그렇게 생각하자니 할 말이 없었다.
“그딴 것들을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마. 그런 쓰레기들은 차라리 없어지는 편이 이 세상에 도움이 돼.”
언니가 내 손을 붙잡았다.
“자, 그럼 정리됐지? 이제 냉정하게 생각할 시간이다?”
머리로는 언니의 저 말이 맞다는 건 알았지만…… 감정적으로는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하다못해 눈앞에서 동물을 죽였어도 충격을 받았을 테니까.
그 모든 걸 목격한 당사자인 나는 언니처럼 저렇게 가볍게 여길 수가 없었다.
어쨌든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는 건 맞는 듯싶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가 붉은 입술을 열었다.
“혹시 카림께서……, 응, 이건 지금 물어볼 게 아니네. 네가 지금 알 턱이 없지.”
“응? 뭘?”
“애들은 몰라도 되는 그런 게 있단다. 결혼하면 잘 알게 될 거야. 그래도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 알아주는 바람둥이라고 하니까.”
……무슨 얘기지?
의아함에 고개를 갸우뚱거릴 적 언니가 말머리를 돌렸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볼래? 카림께 모자라는 게 뭐니?”
“……그건 무슨 의미야?”
“돈이 없어?”
이어지는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래, 언니 말대로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생각해보자.
돈, 그건 아주 중요한 물건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돈이 많으면 두 번 싸울 거 한 번 싸운다고 하지 않았던가.
가뜩이나 우리는 가난…… 까지는 아니지만 귀족치고는 풍족한 편은 아니었다. 카림은 그 돈이 썩어 넘치도록 많았다.
당연한 일이다. 세상천지 왕족이 가난해지는 건 그 나라가 망할 때다.
수긍하는 듯한 내 표정을 본 언니가 말을 이었다.
“아니면 권력이 없어?”
권력, 그것도 있으면 좋은 것이다. 일단 그는 나라의 유일한 카림이고, 말리크께 자식이 없는 지금 가장 적법한 왕위 계승자였다.
게다가 이그드라실의 유지를 잇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이 그 모양 그 꼴이더라도 추종자들이 상당히 많았다.
애당초 단순히 현 말리크의 뒤를 잇는 정도가 아니라, 지금 당장 말리크가 양위를 하는 게 옳다고 주장하는 광신도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니 말리카가 이곳까지 나를 보낸 것 아니었나.
“외모가 모자라?”
외모, 물론 남자 얼굴 뜯어먹고 살 건 아니지만…….
못생긴 것보다는 잘생긴 게 낫잖아?
카림은 생긴 건 아주 우아하고 품위가 넘쳤다. 맵시 있다는 말은 딱 그 사람을 위해 탄생한 것일 터였다.
내가 아무런 답을 하지 못하자 언니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내비쳤다.
“봐. 배부른 투정 그만하고, 결혼 준비나 열심히 하렴. 내가 대신 결혼하고 싶을 정도라니까.”
“그럼 언니가 형부하고 이혼하고 나 대신 결혼하면 되겠네.”
백모님께는 차마 할 수 없던 말을 언니한테는 할 수 있었다. 내 반박에 언니가 펄쩍 뛰었다.
“무슨 말이야. 너 지금 미쳤니?”
“왜? 언니가 대신 결혼하고 싶다면서.”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언성을 높인 언니가 심호흡을 했다. 생각을 정리한 듯 잠시 후에 겨우 중얼거린다.
“난 우리 여보를 아주 사랑한단 말이야. 그리고 카림께서 선택하신 건 너라고. 왕족모독죄로 처결당하고 싶니?”
“언니, 그런 핑계 대지 마.”
“핑계라니. 프리드린, 네가 아직 잘 모르겠지만 현실은 차갑고 냉정하단다? 카림쯤 되는 위치라면 우리를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앨 수가 있어요.”
……불과 오 분 전에 진짜로 죽이겠냐고 한 사람은 어디로 간 거람?
“현실이라니. 진짜 현실은 이거 아니야?”
내 반박에 언니가 두 눈을 깜빡거렸다. 그에 나는 발악하듯 소리쳤다.
“언니도 미친개하고는 상종하고 싶지 않잖아!”
언니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우씨, 그렇지. 이게 정곡이지?
씩씩거리는 나를 피해 언니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속삭였다.
“프리드린.”
“왜!”
“힘내렴.”
“…….”
그 응원 아닌 응원에 순간 할 말을 상실한 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언니는 한 술 더 떴다.
“행복해야 해.”
언니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는 시늉을 했다. 놀리는 듯한 그 태도에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 누구 장례식장 오셨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