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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모님의 그 말이 단말마의 비명처럼 들렸다면, 지금 내 정신의 어딘가가 마비된 게 아니었을까.
아, 몸도 좋지 않은데 마음 편하게 쉬고 싶은 생각만 굴뚝같았다. 지금 카림을 보면 스트레스만 더 받지, 휴식에 결단코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두 사람이 도란도란 떠드는 소리가 아득하게도 들려왔다.
“아프지?”
“예? 갑작스레 무슨 말씀이신지…….”
“귀부인 조카.”
“카림께서 그걸 어떻게 아셨는지요?”
이어서 되묻는 백모님의 음성이 흔들렸다. 내 상태는 집에만 알린 모양이다.
…하긴, 괜히 전염병으로 의심받아서 쫓겨나면 안 되긴 하지. 우리 집에서는 익숙한 병마였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건 아니니까. 무슨 병이라고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세린스 귀부인.”
카림은 질문에 대한 답 대신 부드럽게 속삭일 뿐이었다. 백모님도 구태여 더 묻지 않으셨다. 어차피 대답을 못 들을 걸 아시기 때문이겠지.
“네, 카림.”
“잠깐 자리 좀 비켜줄 수 있나?”
“오, 어려운 부탁은 아니로군요.”
상냥하고 우아한 속삭임을 남긴 백모님은 군소리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카림이 날 해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으시는 모양이다.
내가 원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곧 끼익, 하고. 매정하게도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연달아 들려오는 묵직한 무게감의 발걸음 소리가 참 익숙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머잖아 흐리게 물든 내 시야에 카림의 모습이 가득 차올랐다.
……자꾸만 떠오르는 게 있어서 별로 보고 싶은 얼굴은 아닌데 말이지.
“…….”
하지만 카림은, 그 보기 싫은 얼굴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나도 괜히 오기가 생겨서, 지지 않고 그를 쳐다보았다. 아프지 않았다면 절대로 하지 못했을 짓이었다.
‘눈이 참 예쁘다…….’
…시선을 맞대고 있자 자연스럽게 든 생각이었다.
태생이 왕족이기 때문일까, 어떻게 눈꺼풀에 달린 속눈썹마저 우아하게 그늘지는 거지. 눈이 호수를 닮은 물빛인 건 그가 물을 다스리는 존재이기 때문일까.
흐린 시야 속에 맺힌 남자는 아름답다는 말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우아한 한 마리 맹수를 보는 것 같다.
프레이르에는 푸른 짐승의 제국이라는 이명이 있었다. 그래서 왕족인 저 남자에게서 맹수가 연상되는 걸까.
생긴 것만큼은 정말, 이렇게도 품위가 넘치는데.
“너.”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던지. 카림이 겨우 입을 열었다.
“생각한 것 이상으로…… 병색이 짙어. 정말 많이 아파하는 게, 느껴져. 온몸으로.”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음성이었다. 두어 차례 눈을 끔뻑거린 나는 겨우 대꾸했다.
“그걸 카림께서 어떻게 아세요.”
“어떻게 알긴.”
나지막한 음성으로 답한 카림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남자의 묵직한 무게감에 침대가 그쪽으로 끼익, 소리를 내며 기울었다.
“네가 어디에 있든 난 널 느낄 수 있어.”
“…….”
그 말에 나는 어떤 얼굴을 하고 그를 볼 수 있었을까.
삼류 로맨스 소설에나 등장할, 정말 황당무계한 소리였다. 아프지만 않았더라면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잘생긴 기사님과의 멋진 로맨스를 꿈꾸던 평범한 소녀였다고 해도, 저런 느끼한 대사까지 아무렇지 않게 즐기는 취향은 아니었다.
“이것 봐라.”
나를 뚫어져라 살펴본 카림이 슬며시 입꼬리를 말았다.
“못 믿겠다는 눈빛이네.”
……이크.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던 모양이다. 뜨끔했지만, 고슴도치를 맨손으로 잡은 것처럼 양심이 쿡쿡 찔렸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사람한테 거가 뭐예요. 제게는 엄연히 프리드린이라는 이름이 있다고요.”
“따박따박 잘 따지기까지.”
혀를 내두른 카림은 또 마음에 드네, 이게 내 취향이네…….
따위의 헛소리를 늘어놓지는 않았다. 천만다행이었다.
“내게도 카림이 아니라 릴이라는 이름이 있어. 그리고 이름으로 부르랬지.”
생일 연회에서 그랬었지.
하지만 나는 카림의 이름을 막 부를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렇게 친한 사이도 아니고, 신분적으로도 내가 밀리고. 무엇보다 타인을 이름으로 부르는 게 내게는 한없이 어색한 일이었다.
오래도록 아팠던 내 세상은 좁았으니까. 내가 친근하게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언니와 하녀 정도였다.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피어올랐다.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러겠어요.”
“카림으로서 하는 명령이라면?”
“…….”
명령이라면 당연히 들어야겠지만…… 황당할 뿐이었다. 내가 눈을 두어 차례 끔뻑거리자 카림이 조심스레 내게 손을 뻗어 왔다.
“농담이고. 많이 아픈 게 나한테도 전해져서, 낫게 해 주려고 온 거야.”
묘하게 다정한 어조였다. 곧 따뜻한 손이 상냥하게 내 땀투성이 이마를 쓰다듬었다.
메마른 사막에 단비를 내릴 줄 알고 물을 다스리는, 이그드라실의 유지를 잇는 자. 그에게는 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 힘도 있다고 했다.
“너라서 바로 낫지는 않을 거야. 받아들이는 걸 보면 이틀 정도 걸리겠네.”
한 번, 두 번. 그의 나긋한 손짓이 반복될수록 몸에도, 마음에도 묘한 안정이 찾아오는 느낌이었다. 온화한 무형의 무언가가 내게 스며드는 것 같았다.
“나한테 두 번이나 빚진 거다, 너?”
카림이 그 사이로 중얼거렸다.
“그것도 목숨 빚이야. 이자까지 쳐서 받아낼 거야.”
“이자까지라뇨…….”
“십 부 정도면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오, 완벽한 시나리오인걸.”
“십 부라뇨. 고리대금이 부업이세요?”
“고작 십 부 가지고 고리대금이라니. 이십 부는 되어야 고리대금 소리 겨우 듣지.”
“그래도 너무하세요.”
“조부가 세린 성주라고, 사례하겠다고 한 분은 어디로 가셨을까.”
……윽!
그건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이래서 사람은 항상 입조심을 해야 하나 보다. 흑흑.
하지만 이대로 입을 다물기에는 뭔가 억울했던 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쫌생이.”
“……지금 뭐라고 했지? 쪼, 쫌생이?”
…카림이 말을 더듬는 건 처음 보는 듯했다.
여전히 내 이마를 따뜻하게 어루만지고 있던 카림이 툭 속삭였다.
“이봐, 너.”
“프리드린이라니까요.”
“그래, 프리드린. 너 정말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해?”
“제가 뭘요?”
“나 정말 이런 대우 처음 받아보거든. 세상에. 괴한들에게서 구해줘,”
…구해주긴 했지.
그 괴한들을 내 눈앞에서 모조리 죽여 버리지만 않았더라도 이렇게까지 카림을 꺼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리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해준 사람에게 첫눈에 반하는 상황이지 않았을까.
“예쁜 구두도 선물해줘,”
그 침 묻힌 유리 구두를 선물이라고 생각해야 해? 신지도 못하고, 팔지도 못할 거.
“사탕도 줘, 지금 치료까지 해줘. 그런데 보답이 겨우 쫌생이라니.”
나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원대하신 카림, 저 한 가지만 여쭤봐도 돼요?”
“뭔데?”
“애초에 제가 아픈 이유가요. 그 사탕 때문이죠?”
의심을 입 밖으로 내자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잠시 멈추었다.
피식, 하고 카림은 입 밖으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 이건 정말 진짜로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이건 진심이라니. 그럼 그간 한 말은 다 거짓말이었냐.
그러다 자연스레 깨달았다. 카림이 내게 한 말은 모두 실없는 소리였단 걸. 아니…… 나에게만 한 말뿐이 아니었다. 내가 본 모든 것들이 그랬다. 하다못해 말리크께 했던 말들조차도.
“너, 의외로 감이 좋네.”
……칭찬인지 욕인지 구분할 수가 없는 말이었다. 열이 오른 나는 생각나는 대로 중얼거렸다.
“병 주고 약 주는 게 어디 있어요. 이래서 사탕 준다는 사람은 따라가는 게 아닌가 봐.”
내 말에 카림은 풉!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꽤 긴 시간을 시원하게 웃어재낀 카림은 의외로, 정말 의외로 두 눈을 따뜻하게 빛냈다.
“너도 참…… 엉뚱하다.”
공식적으로 미친개 소리를 듣는 사람에게 엉뚱하다는 소리를 듣는 나는 대체 뭘까. 가까스로 볼멘소리를 냈다.
“그건 원대하신 카림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거 같아요.”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세상천지 오직 나만 할 수 있는 말이지.”
“네? 어째서죠?”
요염한 눈웃음을 보인 카림이 대꾸했다.
“너에 대해 이 정도로 아는 사람이 나뿐일 테니까.”
“…….”
할 말을 상실한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못 믿는 눈치다?”
되묻는 음성은 장난스러웠지만 의외로 뼈가 있었다. 내 한숨이 다시 이어지자 고개를 갸우뚱거린 그가 중얼거렸다.
“진짠데.”
“카림, 죄송한데 우리 엊그제 처음 만났어요.”
“벌써 이틀이나 됐네. 그거 알아? 48시간이면 누군가에 대해 알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야.”
카림은 매력적인 눈웃음을 덧그렸다.
“너처럼 단순한 사람은 더.”
“……아, 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카림은 상냥하게 내 이마를 쓰다듬었다. 무방비해진 나는 그의 손길 밑에서 노곤한 수마에 빠져 들어갔다.
그렇게 내가 완전히 자리를 털고 일어난 건, 카림의 말대로 이틀이 지난 후였다.
그리고 그날.
빚을 갚으라며 날 불러들인 그 남자는.
기막히게도, 내게 청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