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말리카와의 티타임은 그렇게 뒤숭숭하게 끝이 났다.
괜히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을 부렸다가 짐만 얻은 나는 복도를 걸어가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곳에서 일 년을 버텨야 한다고.’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던 카림의 모습이 떠올라서, 나는 괜히 몸서리를 쳤다.
여러 번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다. 어린 시절 호되게 앓아온 내가 바라는 건 한 가지였다.
무병장수!
가늘게 살아도 좋다. 그저 아프지 않고 오래오래 살기만 하면 대만족이다.
……그런데 나, 이런 상황이라면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는 건 맞을까?
수틀리면 카림의 손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나가는 거 아닐까?
“말리카가 뭐라고 하셨나?”
“까, 깜짝이야!”
그때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심장을 움켜쥐어야만 했다. 화들짝 놀란 가슴이 벌렁거렸다. 두근두근두근두근, 거칠게 뛰는 심장 소리가 시끄럽게도 울려댔다.
눈앞의 사람을 확인한 나는 빠르게 허리를 숙였다.
“워, 원대하신 카림.”
“응, 안녕.”
어떻게 생각하면 무심하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호기심이 가득 담긴 음성이었다.
그의 음성을 듣던 나는 무심코 생각했다. 맵시 있는 생김새만큼이나 우아한 태도가 몸에 배어 있다고. 어젯밤 연회에서 잠깐 본 망나니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대답이 없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본 그가 재차 물었다.
“말리카께서 오늘은 또 뭐라고 하셨나?”
“…별말씀 안 하셨는데요.”
“거짓말은. 차라리 귀신을 속여.”
스윽, 다가온 카림의 손이 나를 스쳤다.
은밀하기 그지없는 손놀림에 괜히 몸을 움찔거렸다. 그사이에도 끊임없이 돌진한 그의 손은 내 뒤에 있는 벽을 향해 다가붙었다.
“맞춰 볼까?”
졸지에 자리에 못 박인 듯 굳은 채, 카림의 팔과 벽 사이에 갇힌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긴장을 집어삼킨 입술이 달달 떨렸다.
“구, 굳이 그러실 필요가 있으세요?”
“필요?”
내 말을 곱씹은 카림은 거침없이 내뱉었다.
“필요라면 차고 넘치지.”
반쯤은 어깃장이었다. 내 눈을 빤히 내려다보는 카림의 눈은 호수를 닮아 있었다.
넓고, 푸르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한…….
물을 다스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저런 눈빛을 하고 있는 걸까.
“그러니 내가 맞추기 전에 답하는 게 네 신상에 이롭지 않을까.”
“저, 정말 별말씀 안 하셨는걸요. 원대하신 카림께서는 모르셔도 되는…….”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카림도 무서웠지만 말리카는 일 년이나 곁에서 모신, 그리고 앞으로도 모셔야 하는 내 직속 상관이었다. 말리카가 평소에는 온화하고 기품이 넘쳐도 화가 나면 가차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내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카림이 다시금 입술을 열었다.
“너.”
“네?”
“난 널 알다가도 모르겠어.”
나란 인간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지 고작 하루였을 텐데, 저런 말은 교만한 소리 아닐까.
카림이 조금 더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붉은 입술이 귓가에 바짝 다가붙었다. 더운 숨결이 고스란히 쏟아졌다.
“네 목적은 뭘까.”
“……네? 목적이라뇨? 그런 거 없어요.”
“형하고 형수가 할 생각이야 어차피 뻔하지. 너도 두 분과 어느 정도 생각이 같아서 동조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말리크와 말리카의 ‘카림 장가보내기 프로젝트’는 하루 이틀 계속된 게 아닌 모양이다.
그러면 내가 대체 몇 번째 사람인 걸까. 하하.
어쩌면 아침 점심 저녁 바뀌었다는 여자들이 모두 말리크와 말리카가 보낸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너 하는 짓을 보니 그건 또 아닌 게 아이러니하거든.”
“네? 제가 뭘 어떻게 했는데요?”
“넌 날 아주 벌레 보듯 하는데.”
“제, 제가 언제요?”
이건 바로 대꾸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벌레 보듯 한다니, 만에 하나 진짜라고 하더라도 발뺌해야만 했다. 이 자리에서 내 목을 뎅겅 베어버릴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이어지는 카림의 말에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그게 아주 마음에 든단 말이지.”
“…….”
이건, 뭐…….
나는 한동안 헤 벌어진 입술을 수납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덜덜 떨기만 했다. 그러다 겨우 중얼거렸다.
“대, 대체…….”
“응? 잘 안 들려.”
“제, 제게 왜 이러세요?”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묻는 말에 남자는 씨익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어 대수롭지 않게 툭 내뱉는다.
“첫눈에 반했다면?”
“그 말을 누가 믿어요!”
“오, 안 속네. 똑똑해라.”
혀를 내두르며 장난스럽게 내뱉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애초에 누가 저런 말을 믿을 수 있다고!
“근데 어쩌겠어. 나도 이렇게까지 내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은 처음 만나는데.”
“대체 어디가요? 카림께서는 어제 저를 처음 보셨어요.”
“음. 굳이 말하자면.”
우습게도 그 순간, 카림의 눈에 진지함이란 것이 스쳐 지나갔다. 순식간에 사라져 버려서 내 눈의 착각인가 싶었지만.
“위기에 처했는데도 의연하게 서 있던 모습부터?”
“의연하긴요. 그거 겁먹어서 아무 말도 못 한 거거든요?”
“그런 거였어?”
피식, 소리 내어 웃음을 머금은 카림은 한마디 덧붙였다.
“귀엽네. 역시 다람쥐가 맞아.”
“…….”
말을 말자, 말을 말아! 네가 그 상황의 당사자였다면 지금 그따위 말이 나오겠냐고!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집어넣느라 온갖 애를 다 써야만 했다.
“그리고 병약한 미소녀고.”
내가 물론 예쁘긴 하…… 는.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저 말은 어떤 의식의 흐름인 거야?
“병약한 미소녀라뇨. 그건 갑자기 또 무슨 말씀이에요.”
“라비아 영주가 왜 막내딸을 꽁꽁 숨겨두었나 했더니, 오래 아파서 그런 거였다며.”
그게 병약한 미소녀라는 이상한 말을 뒤집어씌울 사항이냐고!
어처구니가 없었던 내 입은 또다시 떡 벌어졌다. 부정확한 발음으로 겨우겨우 중얼거렸다.
“그 잠깐 사이에 제 뒷조사를 하셨어요?”
“뒷조사라니, 그건 너무 거창하고.”
남자는 거만한 어조로 덧붙였다.
“가만히 있어도 세린스 귀부인이 네가 얼마나 좋은 조카딸인지 귀에 딱지가 얹게 말하고 가던데. 참하고 예의 바르고 아름답고 어쩌고…… 그러다 단점을 딱 하나 말했는데 그게 병력이었어.”
― 원대하신 카림, 제 조카라서 좋은 말만 늘어놓는 게 아니랍니다. 말리카께서도 인정하신 엄선된 사실뿐이에요. 라비아 영주 부부의 엄한 교육하에 곱게 자란 완벽한 아가씨예요. 이미 만나보셔서 아시겠지만 수도에서도 그렇게 예쁜 아이는 드물지요. 오래도록 아팠다가 겨우 쾌차해서 더더욱 저희 눈에 밟히는 아이랍니다.
굳이 전하지 않아도 백모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덕분에 내 벌어진 입을 다물 방법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한동안 어버버거리고 있을 적 카림은 갑자기 내 입 안에 동그란 무언가를 쓱 집어넣었다. 과일 사탕이었다. 달콤한 향이 입 안 가득 퍼져 나갔다.
얼떨결에 그걸 입으로 받은 나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물어야 했다.
“……갑자기 이게 뭐예요?”
“사탕.”
먹을 거 주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랬는…….
아니, 이게 아니지. 지금 사탕인 걸 누가 몰라서 물어보냐고!
카림의 페이스에 휘말릴 뻔한 나는 또다시 웅얼거렸다.
“그게 아니라, 왜 주신 거냐고요.”
“뭔가 달라는 얼굴로 쳐다보길래. 아니었나?”
“당연히요!”
“그래?”
웃음을 덧그린 카림은 툭 내던질 뿐이었다. 사탕 덕에 둥글게 부푼 내 뺨을 툭 건드리면서.
“네 입술이 사탕 물려주고 싶게 생겨서 그런 거라고 하자.”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었다.
* * *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었다. 평소처럼 자다 일어났을 뿐인데 갑자기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
불과 일 년하고 몇 개월 전, 열아홉 살이 되기 전까지 보였던 증상과 똑같았다.
덕분에 백모님은 가뜩 긴장하셨다. 급하게 집에 전보를 보낸 백모님은 초조하게 내 곁에 붙어 계셨다.
“혹시 재발이라도 한 건…….”
무척이나 걱정스러운 음성이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원인은커녕 병명조차 몰랐던 그 병. 기적처럼 나았다고는 하지만 병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까.
다만 정작 앓아누운 나는 그 병이 아닐 거라는, 이유 모를 확신이 있었다.
나름대로 처음으로 연회를 참석한 것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고, 오면서 겪은 일도 있었으니까. 게다가 말리카와 카림이 쌍으로 괴롭히기까지 했잖아.
긴장이 풀린 데다가, 그동안 받은 충격이 한꺼번에 몰려왔나 싶었다.
사실 그런 일을 겪고도 내내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인간이 아니지.
암, 그런 사람은 ‘거’ 소리를 들어도 된다. 마음 없는 물건이 맞을 테니까.
그런 생각이 이어지자 자연스럽게 카림이 떠올랐다. 그리고 카림이 먹인 사탕도.
…그런데 그 사탕이 수상하다면.
내가 지금 앓아누운 원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면.
그건 내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겠지?
괜히 고개를 심각하게 주억거릴 적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걱정 가득한 얼굴로 겨우 자리에서 일어선 백모님이 문을 열어젖혔다.
이윽고 놀라신 듯 언성을 높이셨다.
“원대하신 카림?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