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그 말에 경악한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내뱉을 수 없는 말이 목구멍에서 까끌거렸다.
‘아니에요, 하지 마세요! 그거 아니라고요!’
“그러게요. 두 분, 나란히 계시니 아주 보기 좋네요. 미남미녀가 나란히 있으니 눈이 참 즐거워요.”
말리카는 상큼하게 웃는 낯으로 추임새를 더했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누가 그랬던가.
그거 다 거짓부렁이다. 나는 저 말에 진심으로 발작을 하고 싶었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말리크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대도 그렇게 생각하오? 내가 보기에도 아주 잘 어울려. 아름다운 한 쌍이군.”
정말 새삼스럽게도, 나는 말리카가 이 자리에 나를 부른 이유를 명백하게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자기가 나를 이곳에 보냈겠다, 아예 카림과 날 엮어주려고 작정했구나! 말리크도 짜고 치는 도박판이었어!
아주 솔직해지자면, 그런 일만 없었다면 나도 이렇게 학을 떼고 싫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카림이라니, 왕족이라니. 객관적으로 얼마나 괜찮은 자리냐고.
게다가 말리크와 카림의 사이도 좋은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무엇보다 수틀리면 언제든 날 죽일 수 있는 사람과는 절대로 함께 살고 싶지 않았다.
내 유일무이한 꿈은 무병장수란 말이다!
“라비아 양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
내 타들어 가는 속을 전혀 모를 말리크가 평온하게도 물어 왔다.
괜히 냅킨으로 입가를 훔친 나는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이럴 때는 모르는 척이 상책이다.
“네? 어떤 하문이신지…….”
“릴은 라비아 양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거든. 허나 라비아 양께서는 릴을 어찌 생각하시는가. 우리 릴 정도면 모자람이 없지 않은가?”
“아이 참, 레반. 프리드린에게 왜 그런 걸 여쭈시고 그러세요.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이런 자리에서는 부끄러워서 제대로 대답을 못 할 거예요.”
말리카가 적당히 추임새를 넣었다.
…둘이 아예 작당을 했구나.
이러다가 정말, 이 자리에서 코가 꿰이겠다.
불안함이 스물스물 허리를 타고 올라왔다.
‘카림을 감시하기는 무슨.’
애초에 말리카가 계획한 ‘카림 장가보내기 프로젝트’에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내가 선택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허튼 대답을 했다가는 당장에 목이 잘리겠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을 때였다.
“저기요, 형님.”
그 곤란한 상황에서 날 꺼내준 건 우습게도 카림이었다. 그는 기가 막힌 듯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제 결혼 문제인데 제게 먼저 물어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네게 먼저 묻지 않았느냐.”
“대체 언제요?”
“고작 삼 분 전에 네 취향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좋은 마음으로 나선 것뿐이다.”
“뭐, 그건 그거고요. 그런데 다시 보니까.”
카림의 시선이 다시금 내게 닿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법 노골적으로 훑어보았다. 구석구석, 제법 세심하게 살펴보더니 툭 내던졌다.
“마음에 안 드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어서요.”
“…….”
하하, 좋아해야 하는데 기분이 나쁜 이유가 뭘까. 새장 속에 갇힌 관상용 새가 된 것 같아서 그런가.
말리크의 시선이 내 얼굴로 향했다. 날 곰곰이 뜯어보다가 속삭였다.
“왜. 어제는 눈 밑에 있는 점이 한없이 예뻐 보이다가도 오늘은 거슬리더냐?”
“역시 형님께서는 절 참 잘 아십니다.”
카림이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그 천진난만한 행동에 머리가 아려 왔던지 말리크가 관자놀이를 압박했다.
“릴.”
“형님도 참, 너무 채근하지 마세요. 마음에 쏙 드는 이가 나타나면 그때 하면 되잖습니까.”
“네 마음에 쏙 드는 이가 언제 나타날 줄 알고? 네 말대로라면 넌 평생 결혼하기는 글렀다.”
“세상에 반은 여자고 반은 남자라죠. 어딘가에는 있지 않겠습니까?”
툭 내뱉은 카림이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아무래도 숙취 때문에 골이 아파 오는 모양이다.
말리크도 덩달아 인상을 썼다.
“알겠으니 술이나 작작 좀 마시거라. 다음 날 고생할 걸 알면서 왜 그렇게 들이붓는지 모르겠다.”
“제 삶의 유일한 낙인데요.”
“유일은 아니지 않느냐.”
뼈가 있는 말이었다. 형제의 대화를 듣기만 하던 말리카는 남몰래 웃음을 머금었다.
“이런 잔소리를 듣기 싫으면 어서 결혼하거라.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냐? 네 나이가 벌써 몇인데.”
“전혀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에 말리크는 끄응, 소리를 내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난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백모님은 잘해보라고 했지만 무슨, 그럴 마음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이 얼굴이 드러났던 걸까.
슬쩍, 눈짓으로 카림이 나를 돌아보았다.
눈과 눈이 마주한 그 순간.
그가 느끼하게도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
순간 헛구역질이 치솟을 것 같았다.
저기요, 안 본 눈 삽니다.
* * *
“프리드린.”
체할 것만 같은 조찬 시간이 끝나고, 티타임을 빙자한 말리카가 나를 불러들였다.
할 말이 뻔해서 별로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흑흑, 힘이 없는 걸 어떡해.
불쌍하고 가여운 말단 시녀는 상전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부르셨나요, 아름다운 말리카.”
“혹시 카림이 마음에 안 드실까요?”
네, 네! 정말 마음에 안 들어요!
솔직한 말은 가슴속에서만 메아리쳤다. 하지만 노련한 말리카가 내 얼굴에 떠오른 감정을 읽지 못할 리가 없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냉정하게 생각해 볼래요?”
말리카는 그런 내 손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그 안에는 차마 거부할 수 없는 어떤 것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저도 이런 기회를 아무에게나 주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설득을 빙자한 회유와 협박이 시작되었다.
“프리드린이, 비록 방계이긴 해도 유서 깊은 세린의 핏줄인 걸 아주 잘 알고 있죠. 게다가 일 년이나 지켜봤는데 행실이 바르고 단아하셨어요. 그러니 제 가족으로 받아들여도 괜찮다고 생각했고요.”
저 뱅 돌린 말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동서로 날 점찍었다.’라는 뜻이었다. 이유도 간단했다.
혈통은 좋지만 결국 곁가지가 될 방계.
구색 맞추기는 정말 좋고, 그러면서도 굳이 견제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다.
생각해보면 카림은 날 선택할 이유가 없었지만, 말리카가 날 선택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둘의 입장과 위치는 아득한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으니까.
말리카는 카림이 한미한 사람과 맺어질수록 좋아하겠지.
“프리드린도 흔쾌하게 받아들이신 일이었어요. 이제 와서 거절하신다면, 라비아 영애가 갈 수 있는 자리는 카리나 영주 가문 정도일 거예요. 그런데 그 장남이 서른 살인 건 알고 있나요?”
카리나 가문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어제 들었다. 백모님께서 ‘말리카의 눈 밖에 나서 쓸 만한 곳과 결혼을 못 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내가 거절하면 그런 곳에 보내겠다고. 그것도 자신의 손으로.
결국 ‘시키는 일이나 잘해!’라는 협박이었다.
“……왜 저예요?”
그러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조심조심 말을 고르면서.
“물론 아름다운 말리카의 말씀이 맞아요,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니죠. 모두가 바라 마지않는 최고의 행운일 거예요.”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침을 꿀꺽 삼키며 겨우 속삭였다.
“저도 아름다운 말리카의 은혜에 무척이나 감사하고 있고요. 어떤 영애가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있었겠어요?”
말리카는 여전히 아름다운 눈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다행히 불쾌하지는 않은 눈치였다.
조심스레 가슴에 손을 모은 나는 조곤조곤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전 아름다운 말리카께서 시키신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되는걸요. 세상에 나온 지 겨우 일 년밖에 되지 않았어요. 왕실 식구가 되기에는 너무나도 미흡한 사람이에요.”
“프리드린, 전 그 일 년 동안 프리드린을 꾸준히 지켜봐 왔어요. 프리드린은 결코 미흡한 사람이 아니에요.”
속이 빤히 보이는 빈말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정말로 저렇게 생각했다면 조금 더 구체적인 칭찬과 설득이 이어졌을 테니까.
하지만 말리카가 선택한 것은 그 아름다운 얼굴에 처량함을 내비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불쌍해 보였다. 연민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대로 홀려버릴 정도로.
……그러니까 나도 자연스레 홀려버렸다는 것이다.
저런 얼굴을 하게 만든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잖아!
“프리드린도 카림의 공공연한 별명을 잘 아실 거예요.”
모를 수가 없는 별명이었다. 직접 두 눈으로 확인까지 했고.
“프리드린은 그 미친개를 훌륭하게 길들이실 수 있어요.”
이어지는 말에 무심코 생각했다.
……시녀에서 왕실의 똥개 조련사로 취직하라는 말로 들렸다면, 내가 정말 제대로 들은 거겠지.
“정 싫으시다면 굳이, 꼭, 결혼을 해야만 한다고 하지는 않을게요. 하지만 적어도 약속하신 일 년.”
부드러운 채찍을 휘두른 말리카는 이어서 샛노란 당근을 살랑살랑, 잘도 흔들었다.
“딱 그만큼만 카림의 곁에 있어 주시겠어요? 저를 위해서요.”
“정말요?”
나는 눈을 반짝 뜨며 되물었다.
큰 매력이라고는 없는 당근이었지만, 채찍에 얻어맞고 나서 들으니 무척이나 달게만 느껴졌다.
…너무 노골적으로 좋아하는 것 같아서 빠르게 변명을 토해내야만 했지만 말이다.
“아, 아름다운 말리카, 부디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저, 절대로 제가 카림이 싫다거나 밉다거나 해서 이러는 건 아니고요…….”
“그럼요, 잘 안답니다. 카림께서는 이그드라실의 유지를 잇고 계시잖아요?”
말리카는 고운 눈을 휘며 사근사근하게도 속삭였다.
나라의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이그드라실은 제국의 모든 사람이 신성하게 여기며 사랑하는 세계수였다.
그리고 그 힘을 이어받은 카림이야 뭐, 원래대로였다면 다들 존경해 마지않았을 것이다. 태조를 닮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낌없이 사랑하고 우러러봤겠지.
반대로 생각하면 모든 게 간단했다.
그런 사람이 얼마나…… 기괴한 행동을 하고 다녔으면 공공연하게 미친개라고 불리고 있을까.
어제 본 모습만 해도 왕실의 체면을 깎아먹는 모습이긴 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지 않았을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걸, 제가 가장 잘 알고 있답니다.”
상냥하게 이어지는 말리카의 말에 나는 격하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가련한 말리카는 눈부신 미소를 다시 한번 되새겼다.
“제 뜻이 무엇인지 잘 아셨을 거라고 믿을게요. 프리드린, 이제 제가 믿을 사람은 프리드린뿐이에요.”
말리카는 노래를 부르듯 읊조렸다.
어깨 위에 부담이 팍팍 얹어졌지만 뭐, 어쩌겠나. 불초한 아랫것은 하라면 해야지. 안 되도 되게 해야지.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