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조금 전의 공포가 되살아났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빛바랬다. 무엇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어 제자리에 뻣뻣하게 굳어 있을 때,
남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나를 알아본 듯 남자의 호수 같은 물빛 눈이 휘었다. 남자의 붉은 입술이 유려한 호선을 그었다.
“너.”
아까와 똑같은 말이었다. 여전히 그 눈은 사신을 닮아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사람들의 놀란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다. “원대하신 카림을 뵙습니다.”라고 말하며 차례로 바닥에 무릎을 붙인 이들이 인사를 올리는 목소리도 아득한 곳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남자는 그런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 아무렇지 않게 말을 붙였다.
“구두 놓고 갔던데.”
“…….”
“이따 나 좀 볼까.”
바짝 얼어붙은 나는 그저 하염없이 남자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이 남자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왜, 왜?
내 태도가 이상했다는 걸 느낀 걸까. 옆에서 무릎을 굽히고 있던 백모님이 내 종아리를 툭툭 건드렸다.
“……얘, 프리드린. 리니.”
비로소 현실로 돌아온 나는 겨우 중얼거렸다.
“네, 네, 백모님?”
“카림께서 물으시잖니.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나지막한 백모님의 말씀에 나는 멍청하게 반문했다.
“카, 카림이시라고요? 이분께서?”
그러니까 그…… 아까 그 무서운 남자가 카림이었다고?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빠진 내가 눈을 끔뻑일 적 남자가 툭 대꾸했다. 아까와 다르게 이상하게도 가벼운…… 아니, 사람을 유혹하는 듯한 어조였다.
“그래, 내가 카림인데.”
그 말에 나는 재깍 바닥으로 엎어졌다. 건방지게 고개를 들고 있다간 이 자리에서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었다.
“워, 워, 워, 워, 워워워원대하신 카림을…… 뵙습니다.”
“원대하신 카림은 무슨. 릴이라고 불러. 아, 고개는 들고.”
그 말에 나는 멍청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남자는 기묘한 시선으로 내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넌?”
내 이름을 물은 남자는, 카림은 내 대답을 듣기 전에 알아서 답했다.
“아, 프리드린 라비아랬나.”
카림이 무기질적인 빛을 지닌 두 눈을 휘었다.
“예쁜 이름이네.”
“가, 감사합니다.”
“그래, 프리드린.”
부드럽게 내 이름을 부른 카림이 손을 내밀었다. 춤을 청하는 것이다.
근처에서 수군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는 다르게.
……나는 진심으로, 이 자리에서 졸도하고 싶었다.
저 사람이 왜 내 눈앞에 있는데!
그것도 카림이라는데!
지금 이게 말이나 되는 상황이냐고!
지금 이 순간 결단코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내 처절한 비명만이 속에서 메아리칠 따름이었다.
그런 내 경악을 전혀 알지 못할 카림은 평온하게도 중얼거렸다.
“아, 굳이 이따 볼 필요는 없네. 하비, 가져와.”
“예, 원대하신 카림.”
카림의 뒤에 서 있던 시종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두어 차례 박수를 쳤다.
머잖아 하인이 들고 나타난 것은 구두였다. 붉은 천 위에 놓인 투명한 유리 구두의 당당한 자태란.
사람들이 나지막한 탄성을 내지를 정도로 예쁘긴 했다.
내 눈에 그런 것이 담길 정도로 정신이 온전하지 않았을 뿐이지.
구두가 예쁘고 뭐고, 그냥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았다.
“신경 쓰여서 모르는 척할 수가 있어야지.”
그러거나 말거나, 평온하게 중얼거린 카림은 하인이 들고 있는 구두를 건네받았다. 내게 다가와 내 앞에 직접 몸을 숙이고, 허리를 굽혔다. 카림의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근처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멍청하게 눈을 끔뻑거릴 적 카림의 큰 손이 내 발을 감싸 쥐었다. 익숙지 않은 온도가 발을 간지럽혔다.
그렇게 화려한 유리 구두가 자그마한 내 발에 신겨질 때까지, 나는 멍청하게 눈을 끔뻑거리기만 했다.
“딱 맞네.”
머잖아 카림이 눈을 휘며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날 위해 준비된 것처럼 유리 구두는 내 발에 꼭 맞았다.
차가운 유리의 감촉이 생소했다.
나는 그제야 입을 뗄 수 있었다. 예의고 뭐고 다 잊어버린 채로.
“……이, 이게 뭔가요?”
“선물.”
카림은 참 천진난만하게도 웃어 보였다.
낮에 몇 명을 아무렇지 않게 죽인 사람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미소였다.
…아무리 그 나쁜 놈들이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고 해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신발을 한 짝만 버리고 간 게 영 마음에 걸려서. 불러도 돌아보지도 않고 말이야.”
귀에 착 감기는 목소리가 느른했다. 괜히 등줄기로 소름이 오싹 돋았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가 얼마나 공허한지, 네가 알까.”
“저런, 우리 프리드린이 무례했군요. 제가 대신 사과 말씀 올릴게요, 카림이시여. 그 정도는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겠지요?”
백모님이 우리 사이를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백모님을 돌아본 카림은 심드렁한 어조로 대꾸했다.
…귀라도 후볐으면 딱 어울릴 것 같은 말투와 태도였다.
“세린스 귀부인. 정말 오랜만이야.”
“네에, 저도 카림을 마주한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네요. 아직 저를 기억해주셔서 영광이에요.”
“우리 고결하고 아름다운 세린스 귀부인을 어떻게 잊을까.”
“여전히 말씀도 잘하시고요.”
“칭찬이라면 고맙게 듣지. 그나저나 오늘은 후견인이신가?”
“눈썰미도 좋으셔라. 맞답니다. 고대하고 있던 일이라 얼마나 설레는지 모르겠어요.”
백모님은 보란 듯 내 어깨를 붙잡았다. 노출이 심한 드레스 덕에 하얗게 드러난 어깨를.
그 손길 덕에 부각된 몸매가 돋보인 건 덤이었다. 전시된 상품이 된 듯해서 기분이 굉장히 이상했다.
“제 조카랍니다. 아주 예쁘죠?”
“응, 자랑할 만해.”
…굉장히 성의 없는 대꾸였다. 하지만 희망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한 듯 백모님의 얼굴은 확 밝아졌다.
이윽고 카림은 백모님께 허락을 구했다.
“귀부인의 조카와 한 곡, 춰도 되나?”
주, 죽어도 싫어. 거절해! 제발 거절해줘!
오늘 첫 상대가 정해져 있다고 해 줘!
내 간곡한 눈빛과 다르게 백모님은 하얗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물론이지요. 그 무엇보다 큰 영광이랍니다.”
백모님이 내 어깨를 두어 차례 두들겼다. 귀에 살그머니 속삭이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프리드린, 정신 똑바로 차리렴. 무려 카림이시란다.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 네가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상대.”
“…….”
그냥 울고 싶었다.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내가 상상한 귀족의 연회는 이런 게 아니란 말이야!
이 자리에서 날 구해줄 잘생긴 기사님은 대체 어디에 계신가요!
* * *
많은 귀족 영애들이 완벽한 무도회를 상상할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내 미래가, 평생이 달린 중대한 행사였으니까.
화려한 연회,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한 마리 나비처럼 살랑살랑 무도회장을 나부끼는 나.
그런 내 눈앞에 나타난 잘생긴 기사님.
내 손을 붙잡고 사랑을 속삭이는 기사님과 나누는 달콤한 로맨스까지.
그 끝은 당연히 아름다운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꿈만 같은 결혼식이었다.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그런 걸 상상하지 않는 영애는 정말로 드물 것이다.
하다못해 정말 적당한, 괜찮은 사람을 만나는 소소한 꿈이라도 가지고 있었을 터였다.
내 꿈은 더 컸다. 무려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말리카가 준비해준 자리였으니까. 게다가 카림의 생일 연회! 나라에서 한 자락 쥐고 있는 사람들만 참석하는 무도회!
하지만 내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은.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생각을 이어 나가면 눈시울이 붉어질 것만 같았다.
춤 한 곡이 끝나고, 티룸으로 자리를 옮긴 나는 내 앞에 앉은 카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음, 그래.’
냉정하게 생각하자면 신분이 높은 남자이긴 하다. 카림이니까.
‘하지만 상상 속의 멋진 기사님은 아니잖아.’
그래, 당연히 재력도 넘치긴 한다. 말리크의 동생이니까.
‘넘쳐나서 썩어 빠지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
그래, 심지어 못생긴 것도 아니다. 아주 잘생긴 축이다. 객관적으로 생각하자면 완벽한 로맨스를 꿈꿀 법한 사람인 건 맞았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하냐고!’
각인되어버린 첫 만남은 내게 묘한 공포심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그 사람을 죽였듯, 수틀리면 나도 죽여 버리지 않을까.
난 무병장수가 꿈이란 말이야! 그냥 오래오래 살고 싶다고!
“너.”
그런, 쓰잘데기라고는 수프 끓여 먹을 것도 없는 상념에 빠져 있을 적 카림이 날 불렀다. 여전히 겁을 먹고 있던 나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네, 네, 카림.”
“말리카께서 뭐라고 하셨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