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늘한 어조조차 품위가 있었다.
그 우아함 때문이었을까. 남자를 아무것도 하지 못할 샌님으로 느낀 듯, 내게서 손을 뗀 괴한들이 비웃으면서 남자에게 다가갔다.
“이건 또 뭐냐?”
“정의의 사도, 뭐 그런 거야?”
“좋지 않은 꼴 보기 전에 가지? 말려봤자 너만 다쳐.”
“…….”
흉기를 든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남자는, 무심한 눈으로 그들을 보기만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분명 아무것도 쥐지 않고 있던 남자의 손아귀에 검이 생겼다. 매끈한 흑신의 검이 무척이나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로 괴한들 사이로 뛰어든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검을 휘둘렀다.
바람에 나뭇잎이 휘날리듯 사람들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 어떤 것도 할 새가 없었다.
피비린내가 훅 끼쳐 왔다. 시야가 온통 붉게 물들었다.
순식간에 혼자 남은, 마지막 한 명이 남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괴한의 앞섶이 이미 축축했다.
“사, 살려…….”
괴한은 말을 마치지 못했다. 남자는 애원하는 괴한까지 깔끔하게, 칼로 베어버렸다. 쉽게 말하면 죽여버렸다.
……갑작스런 상황은 놀라울 만큼 현실감이 없었다.
남자는 쓰레기를 보듯 제가 죽인 괴한들을 한 차례 바라보았다. 곧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했다.
피 묻은 검을 쥔 남자가 내게 뚜벅, 뚜벅, 가까이 다가왔다.
남자의 발걸음을 따라 새파란 풀이 짓눌린다.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훅, 비릿한 냄새가 퍼졌다.
남자는 망연자실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내 앞에 천천히 쪼그려 앉았다.
“너.”
시선이 마주했다.
날 보는 눈이 보석처럼 새파랬다. 아니, 호수와 같은 물빛이라고 말하는 게 옳았을 것이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무척이나 맑은 호수를 들여다보았을 때의 색. 동시에 무미건조하고,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무형의 빛깔.
사신의 눈빛이 저러지 않을까.
무심코 미친 생각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모두 죽어버린 괴한도 무서웠고, 아무렇지 않게 괴한을 죽여 버린 눈앞의 남자도 무서웠다.
다행히도 남자는 내게 위해를 끼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저 뭐랄까, 궁지에 몰린 쥐를 구경하는 태도였다.
남자가 서서히 손을 뻗었다. 내게 다가오는 손에 잔상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차가운 손이 뺨에 닿았다.
“…….”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새하얗게 물든 머리로 겨우 말이란 걸 만들어냈다.
“……구, 구, 구, 구, 구해주셔서 고, 고, 고맙습니다.”
…그가 날 구해준 게 맞는지 모르겠다. 고맙다고 말하는 게 옳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저 목소리가 달달 떨렸다.
“구해주신 대가로 나중에 사, 사례를 하겠어요. 저, 전 프리드린 라비아라고 해요. 세, 세린 성주서 제 조부 되셔요. 그, 그럼…….”
“응? 저기?”
도망치듯 마차로 뛰어가던 나는, 달리던 길에 꼴사납게 넘어져 버렸다. 덕분에 구두 한 짝이 저 멀리 날아갔지만 차마 돌아가서 주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괴한을 만난 것도, 저 남자가 한 짓도.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끔찍한 일이었다.
* * *
하지만 인생사란, 피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야말로 눈앞에 놓이는 법 아니겠는가. 정말 재수 없게도,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남자를 다시 만나고 말았다.
……그것도 내가 처음으로 참석하는 귀족 연회, 카림의 생일 파티에서.
어떻게 카림의 성까지 갈 수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정신을 차리니 마차가 카림의 성 앞에 도달해있었고, 비로소 정신을 차린 하녀는 눈물바람이었고 마부는 죄송하다고 외치며 무릎을 꿇고 있었을 뿐.
오늘 내 후견인으로 납신 백모님, 세린스 귀부인은 내 손을 꼭 움켜쥐었다.
“이게 무슨 변고라니. 많이 놀랐나 보구나.”
백모님의 따뜻한 음성에 눈물이 핑 돌았다. 비로소 현실로 돌아온 것 같다.
“백모님…….”
“자, 이것 좀 마시고 진정하렴.”
백모님이 따뜻한 밀크티를 건네주셨다. 마시고 나니 안도감이 찾아왔다.
나는 찻잔을 꼭 움켜쥐었다. 여전히 손발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백모님은 그런 나를 보며 눈을 상냥하게 휘었다.
“프리드린, 놀란 건 알겠지만 머뭇거릴 시간이 없단다. 넌 강한 아이잖니.”
따뜻한 눈빛과 다르게 냉정한 말이었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결국 이런 날이 왔어. 이번 기회를 놓치면 최소한 반년은 기다려야 할 거야.”
…반년이라. 그 말에 생각하게 되는 것이 있었다.
난 고작 일 년 하고도 몇 개월 전까지만 하더라도 침대에 누워 있는 것만 가능했던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언니가 화려한 드레스를 입는 게 부러웠고, 사람들을 만나는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난 살고 싶었고, 살아서 내가 누리고 싶은 것을 마음껏 누리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아가기를 바랐다.
그렇게 지금 이날이 찾아왔다.
놀란 건 사실이었지만 도둑 따위에게, 다시 만날지 모르는 남자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고작 그것 때문에 반년이라는 시간을 날릴 수도 없었다.
어쨌든 난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살아 있으니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말리카께서 준비해주신 자리잖니.”
백모님이 쐐기를 박았다. 그래, 내게 이보다 더한 행운이 찾아올 날은 없을 터였다.
“……네, 전 괜찮아요.”
“그래, 아주 의젓하구나. 그래야 우리 세린의 핏줄이지.”
백모님은 내 붉은 머리를 어루만졌다.
“우리 프리드린은 아주 예쁘니까 오늘 가장 빛이 날 거야.”
…그 말이 사실이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그렇게 백모님의 손에 이끌려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드레스룸은 내가 평소에 가질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말리카나 말리카의 직속 시녀들이 입고 있는 것을 부럽게 바라보기만 했던 것들이었다.
집에서 가지고 온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값비싼 장신구와 드레스에 눈이 돌아갈 것 같았다. 장신구는 이름조차 모를 보석이 가득 달려 있었고, 드레스는 천조차도 반짝반짝 윤이 났다.
백모님이 골라준 건 개나리처럼 샛노란 드레스였다. 내 독특한 금빛 눈과 잘 어울린다고 했다. 거기에 다이아몬드로 만든 티아라를 얹으니 눈이 부시게 화려했다.
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옷이 날개라는 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나 같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예뻤다.
…다만 좀 부담스러운 건 있었다. 몸매를 너무 부각시켜서.
이그드라실께서 쓸데없이 내 가슴에 후하게 베푸셨기 때문에, 지금 모습이 말도 못 하게 야해 보였다.
“어울리는 사람이 몇 없는 옷인데, 우리 리니가 입으니까 무척이나 아름답구나.”
백모님은 그런 나의, 하얗게 드러난 어깨를 매만지며 속삭였다. 내 속을 읽은 것만 같았다.
“리니, 네가 잘되는 게 내가 잘되는 거란다. 자신감을 가지렴. 너보다 예쁜 아이는 없을 거야. 오늘 우리 프리드린이 제일 주목받겠어.”
안심시키려고 하는 말인 건 알았지만, 칭찬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괜히 안도한 나는 순진하게 웃으며 백모님의 뒤를 따랐다. 아까 있던 일을 지우려고 최대한 애를 쓰면서.
그리고 그렇게 도착한 연회장.
수많은 사람이 모인 곳은 활기로 가득했다. 오케스트라의 화음이 연회장에 내리깔렸다.
왕궁의 것과 다른, 생전 처음 보는 독특한 장식품이 천장에 매달려 있었고 바닥에 깔린 융단조차 값비싸 보였다.
특이하기 그지없는 것들을 연신 훔쳐볼 수밖에 없었다. 백모님은 그런 내게 우아한 눈웃음을 보였다.
“아주 아름답지?”
“네…….”
“하지만 네가 더 빛난다는 걸 명심하렴.”
그 격한 칭찬에 내 얼굴이 달아오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괜히 사람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참여한 여자의 반수는 내가 입고 있는 것과 비슷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육감적인 몸매를 자랑하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부럽다는 듯 훔쳐보는 여자도 있었고, 침을 흘리며 바라보는 남자도 있었다. 생전 처음 참석해보는 연회는 신기한 것만 가득했다.
“세린스 부인.”
먼저 걸어가는 백모님의 뒤를 졸랑졸랑 쫓아가고 있을 적, 웬 중년 여인이 백모님을 불렀다. 자리에 멈추어 선 백모님이 중년 여인을 돌아보았다.
백모님의 눈썹이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오, 오랜만이군요, 카리나 귀부인.”
카리나 귀부인을 마주한 백모님이 환하게 웃었다. 백모님에게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며 예를 표한 귀부인이 나를 돌아보았다.
“이쪽 영애는 누구신지요? 처음 뵙는 것 같아요.”
“제 조카랍니다. 프리드린, 인사드리렴. 카리나 귀부인이시란다.”
“부인께 인사드립니다. 프리드린 라비아예요.”
카리나 귀부인이 한 것처럼, 나도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며 무릎을 굽혔다. 카리나 귀부인은 흡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 라비아 영주의 차녀였지요? 오늘 세린스 부인께서 직접 후견인으로 납신다고 하여 기대가 많았답니다. 후견인으로 나오신 건 처음이시지요?”
“네, 덕분에 처음 연회에 참가했을 때만큼이나 설렌답니다.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에요. 아리엘은 어머님께서 맡으셨었으니까요.”
내 언니, 아리엘 라비아는 할머니인 세린 성후가 후견인으로 나섰었다.
백모님께 자식은 아들 한 명뿐이기 때문에, 백모님도 내 후견인으로 나서는 날을 무척이나 고대하고 있었다. 내가 오래도록 아픈 터라 거의 포기하고 있으셨지만.
백모님이 나를 돌아보았다. 자랑하듯 속삭였다.
“아주 아름답지요?”
“라비아 귀부인의 미모야 예전부터 유명했지요. 이렇게 보니 라비아 귀부인을 쏙 빼닮았네요. 이쪽을 보는 시선에 제 뺨도 따가울 정도예요.”
카리나 귀부인이 까르륵 웃으며 속삭였다.
으레 해 주는 입에 발린 소리를 한 카리나 귀부인이 본론을 꺼내 들었다.
“세린스 귀부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부디 한번 찾아주시지요.”
“조만간 한번 찾아뵐게요. 그럼 모쪼록 오늘, 즐거운 시간이 되시기를 바라요.”
백모님이 우아하게 속삭이자,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려 예를 갖춘 카리나 귀부인이 자리를 벗어났다. 카리나 귀부인이 사라진 자리를 보던 나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었다.
“친한 분이셔요?”
“그런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네?”
“프리드린, 카리나 영주 쪽과는 친해봤자 하등 도움 될 일이 없어. 말리카께서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거든.”
“…….”
이어지는 말에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말리카가 싫어한다면, 말리카의 시녀인 나도 거리를 둬야 하는 사람이었다.
백모님은 그런 내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얌체 같은 게 널 노리는 거야. 말리카의 눈 밖에 나서 아들이 쓸 만한 곳과는 결혼을 못 했거든.”
“아…….”
나는 괜히 한탄을 토해냈다.
말리카의 시녀라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나름대로 우리 가문이 뼈대 있는 곳이긴 했다.
조부가 성주였으니까.
성주는 성을 소유하고 있는 이로, 대귀족에 속하는 작위였다. 성주 밑에는 수많은 영주가 있었다. 지금 백부님은 세린 성주의 후계자를 의미하는 세린스 영주라는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차남인 아버지가 받을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재산 정도.
그나마 차남을 안타깝게 여긴 세린 성주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영지 중 하나를 주었을 뿐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얻은 것이 아름다운 라비아였다.
그나마도 슬하에 자식이 딸만 둘이기에 받을 수 있던 것이라고 했다. 작위를 이어받을 아들이 있었다면 백부가 결사코 반대했을 터였다.
아버지의 사후, 백부의 자식이 작위를 돌려받을 수 있기 때문에 별소리 안 한 것일 뿐.
“나도, 아버님도, 뤼세르도 널 저런 곳과 엮이게 내버려 둘 생각은 없어. 적어도 아리엘처럼 좋은 가문과 연을 맺어야 하지 않겠니.”
백모님이 따뜻한 목소리로 속삭였을 적, 시종이 외쳤다.
“원대하신 카림께서 납십니다!”
그에 각자 다른 일로 바빴던 사람들이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연회장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머잖아 문이 열렸다. 발걸음 소리조차 우아한 남자가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누군가가 남자의 얼굴을 보고 탄식을 내질렀다.
남자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시종을 지나치고, 사람을 헤치고, 더 안으로, 더 안으로.
“…….”
그리고 남자의 얼굴을 본 나는 그대로 졸도할 뻔했다.
…아무렇지 않게 도둑들을 죽여 버린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