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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렇게 그 남자는 청혼했다
“결혼하자.”
청혼은 갑작스러웠다.
언니는 이야기했다, 청혼을 받은 순간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고. 행복한 미래가 눈앞에 펼쳐져서 숨이 멎을 듯 기뻤노라고.
나 역시, 지금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끔찍한 지옥이 눈앞에 그려져서.
그랬다. 나는 이 남자의 청혼을 달가워할 수가 없었다.
“…….”
고스란히 말문이 막힌 나는 망연자실하게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 남자, 카림, 릴 데스테리언.
‘카림’이란 왕, 즉 말리크가 되지 못한 말리크의 동생을 이르는 말이었다.
지금 내 눈앞의 이 남자는 지금 유일한 카림이었다. 말리크는 즉위할 때에 전통을 따라, 이 사람을 제외한 형제를 모두 죽여 버렸기 때문에.
그런 카림은 왕실이 안고 있는 영원한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내가 이 사람을 꺼리는 이유는 단순히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대답.”
제멋대로인 속삭임이 이어졌다. 절대로 수락할 생각이 없던 나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싫…….”
“설마 거절하려고?”
내 말을 끊은 그가 다리를 꼬았다. 그 자태가 지금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도 우아했다.
“잘 생각해보는 게 좋을 거야, 프리드린.”
“원대하신 카림, 더 생각할 건 없어요. 정말 죄송하지만 제가 약혼자가 있어서…….”
“없잖아.”
또다시 내 말을 끊으며 딱 잘라 대답한 남자는 눈을 휘었다. 꼭 ‘내가 그 정도도 모를까 봐?’라고 말하는 듯했다.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기는 했다. 내게 약혼자라니, 그게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차라리 언니가 키우는 고양이에게 약혼한 고양이가 있다는 편이 믿을 만하지.
“선택하기 어려우면 한마디로 정리해 줄게.”
뭘?
이윽고 남자의 입에서 선명한 협박이 흘렀다.
“거절하면 죽여 버린다?”
“네, 네……?”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세상천지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강제로 결혼하는 편이 차라리 났지.
다만, 마음속으로 깊게 탄식한 나는 나를 구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떠올렸다.
말리카시여, 제발,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 * *
2. 그렇게 두 사람은 조우했다
카림의 성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나는 잠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카림에게 그런, 정말 어처구니없는 청혼을 받기 딱 한 달 전이었다. 그날 왕후, 즉 말리카는 자신의 말단 시녀인 나를 갑작스럽게 불러들였다.
눈앞이 아득할 정도로 아름다운 말리카는 내 요모조모를 뜯어보았다. 그러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 라비아 양.
품위 있는 목소리도 구슬이 굴러가는 듯 청명했다.
― 참 예쁘네요. 라비아 양이 지금 몇 살이죠?
― 성인식을 치른 지 일 년 됐어요.
― 좋은 나이군요.
상냥하게 웃은 말리카는 걱정스럽게 말을 이었다.
― 그간 세린 제1재상께서 걱정이 참 많으셨답니다. 사랑스러운 막내 손녀의 몸이 좋지 않아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연회 자리에 참석하실 수가 없었다고요.
그 말대로였다.
열여덟 살 때까지, 나는 방 밖으로 제대로 나올 수조차 없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었다. 열아홉 살이 되자마자 놀랍게도 멀쩡해졌지만.
겨우 건강해지자 내 앞날을 걱정한 백모님께서 날 말리카의 시녀로 추천했다. 그날 이후 일 년간 말리카의 시녀로, 왕궁에서 머물렀다.
사실 내 나이면 이미 결혼했거나, 최소한 약혼자라도 있어야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결혼의 장인 귀족들의 연회 자리에 단 한 번도 참석할 수가 없었다.
긍정의 의미로 눈을 내리깔자 말리카는 사근사근하게 속삭였다.
― 라비아 양께서는 내 시녀로 일 년이나 애써 주셨지요.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라비아 양께서 처음 참석하실 연회 자리는 내가 직접 준비해드리고 싶어요.
그 말에 고개가 저절로 바짝 치켜 올라갔다.
말리카께서 직접 준비해주는 거라니, 이런 행운이 있나! 저 말은 결국 ‘영애의 결혼은 내가 준비해주고 싶다.’라는 뜻이었다.
이보다 명예로운 일은 없었다. 세상천지 어떤 멍청한 귀족이 이런 기회를 걷어찬단 말인가.
날 응시하는 말리카는 환하게도 웃는 얼굴이었다.
― 머잖아 카림의 생일인데, 마침 좋은 자리겠군요.
이번에는 입이 떡 벌어질 뻔했다. 카림의 생일 연회라니!
당연하게도 아무나 참석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나라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 모여 친목을 도모할 장소였다. 좋은 남편감을 물색하기 좋은!
아미라(왕녀)라면 모를까, 귀족 중에서도 저기 아래 꼴지쯤 서열인 내게 돌아올 수 있는 행운은 아니었다. 혹시 그간 아팠던 보상을 이런 데에서 받는 걸까.
감동한 내 목소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 여, 영광이에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름다운 말리카.
― 별말씀을요. 그 대신 부탁할 게 있는데……. 들어주시겠나요?
― 부, 부탁이라뇨. 아름다운 말리카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 듣겠어요.
말리카가 그런 내 손을 움켜쥐었다. 비교적 작은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속삭였다.
― 잠시만 카림의 곁에 머물러줄래요?
― ……네?
― 딱 일 년 만요. 카림께서 뭘 하시는지, 누굴 만나는지……. 라비아 양께서 조심스럽게 지켜봐 주시면 좋겠어요.
그 부탁은 꽤나 당황스러웠다. 결국 카림을 감시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으니까.
카림과 만난 적은 없었지만, 내 귀에까지 들려오는 소문…… 에 의하면 별로 엮이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카림은 아침 점심 저녁 곁에 있는 여자가 바뀌고, 술과 유흥에 찌들어 사는 남자였다. 카림이 일 년에 말아먹는 국세가 어마어마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라 사람들은 카림을 이렇게 불렀다.
‘미친개.’
그런데 왜 내게 저런 부탁을 하는 걸까.
당혹을 숨기지 못하고 있을 적 말리카는 간곡하게도 속삭였다.
― 부탁할게요. 사례는 서운하지 않게 하겠어요.
― 사, 사례라뇨! 그러지 않으셔도 되어요. 아름다운 말리카께서 말씀하시는 거니 기꺼이 따를게요.
정말 저 때에는, 밀가루로 스테이크를 만들어달라고 해도 어떻게든 만들어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물론 나중에는 저렇게 생각한 내 자신을 매우 치고 싶었지만.
…어쨌든 간에.
말리카가 저러는 이유를 모르지는 않았다.
말리카는 카림을 견제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왕위를 차지한 말리크는 다른 모든 형제를 죽였지만, 카림만은 죽이지 못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그건 다 나라의 건국 신화 때문이었다.
이 나라, 프레이르는 광활한 사막 위에 세워진 나라였다. 당연하게도 물이 귀했고, 프레이르를 건국한 태조는 그 귀한 물을 다스리는 이였다.
프레이르를 건국한 첫 말리크는 척박한 사막을 적실 단비를 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아내는 대지를 다스려 생명을 키워낼 수 있는,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의 어머니였다.
남편이 비를 내리면 아내는 땅을 풍요롭게 해, 나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지금도 신성시하는 세계수, 이그드라실은 어쩌고…… 하는 신화의 내용이 있지만 그건 일단 차치하도록 하고.
건국 신화처럼 왕실에서는 종종 물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이가 태어났다. 그런 이를 ‘이그드라실의 유지를 잇는 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번 세대에서 그 기적을 목격했다.
왕실의 늦둥이로 태어난 카림이 메마른 사막을 풍요롭게 할 단비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말리크는 즉위할 당시, 다른 형제는 모두 죽여 버렸음에도 카림만큼은 해칠 수가 없었다. 신전에서 카림을 비호하고 나선 것은 큰 이유가 아니었다.
말리크야말로 건국 신화를 수호하고 이그드라실을 섬기는, 이 나라의 가장 독실한 신자였으니까.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생겨났다.
프레이르는 건국 신화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신전은 나라를 지탱하는 거대한 주축이었다. 그리고 신전은 신화 속의 이그드라실을 섬겼고, 카림은 그 이그드라실과 가장 가까운 존재였다.
덕분에 권력을 추구하는 이들은 신전과 결탁한 채, 카림을 앞세워 말리크에게 은근한 압박을 가했다. 개중에는 카림을 말리크로 세워야 한다는 이들도 존재했다.
말리크와 말리카의 입장에서는 결단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을 터였다. 가뜩이나 원래 신전은 말리카가 다스리는 곳이었는데, 카림의 존재 때문에 자신의 권력을 빼앗겼으니 더.
그러니까 말단 시녀인 내게 카림을 감시해달라고 한 거겠지.
혹시나 카림이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과 접촉해서 일을 꾸밀까 봐.
……카림의 생일 연회라니, 자신의 사람을 보내기에 정말 좋은 핑계였다.
이제 결혼을 해야 하는 내게도 나쁜 기회는 아니었다. 내가 말리카의 기대처럼 뭔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적 갑자기 덜컹, 소리가 나며 마차가 급정거를 했다. 골똘한 생각에 잠겨있던 내가 마차 바닥에 나뒹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악! 갑자기 뭐야?”
비명을 지르며 오만상을 일그러뜨렸다.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졸지에 마차 바닥과 진득한 스킨십을 나눈 온몸이 진득한 고통을 호소했다.
욱신거리는 허리를 움켜쥔 난 익숙하게 하녀를 불렀다.
“아야야……. 라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불길한 느낌이 서늘하게 허리를 스쳤다.
이상한 기분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마자 본 것은 마차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하녀였다. 하얀 이마에 붉은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
너무 놀라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인 모양이다.
생전 처음 접한 상황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어갈 적, 마차 문이 왈칵 열렸다. 복면을 뒤집어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멍청하게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적 날카롭고 차가운 물건이 목에 닿았다.
지레 겁을 먹은 내가 흠칫 굳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소리 지르면 죽을 줄 알아.”
살벌한 협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복면을 쓴 사람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 가진 거 다 내놔.”
……가진 것? 가진 걸 다 주면 목에 닿은 이걸 치워주는 걸까?
그런데 내가, 말리카의 시녀라고 해도 기껏해야 성주의 손녀에 불과한 내가 가지고 있는 게 뭐가 있었을까.
마차의 외관은 화려할지 몰라도, 내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온 건 몇 개 없었다. 기껏해야 싸구려 장신구 몇 개뿐이다. 가뜩이나 아버지, 라비아 영주는 무척이나 검소한 분이셨다.
“…….”
생전 처음 경험하는 상황에 얼어붙은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입술만 파르륵 떨 적, 괴한들이 마차를 뒤지기 시작했다.
기절해있는 하녀의 주머니까지 탈탈 턴 그들이 볼멘소리를 냈다.
“야, 오늘 본 애들 중 최고로 거지다. 이게 뭐야?”
“기가 막힐 정도로 털 게 없네.”
“그나마 이건 다이아몬드 아니야?”
내 팔찌를 풀면서 하는 소리였다.
괴한이 제 동료의 손끝에서 달랑거리는 팔찌를 보며 툭 내뱉었다.
“등신아, 큐빅이잖아. 이 짓이 몇 년 짼데 아직도 구분을 못 하냐? 줘도 안 가지니 내다 버려.”
“큐빅이야? 와, 어떻게 된 게 싸구려 자수정도 없냐. 이거 세린 가 문양 아니냐고. 성주쯤 되는 곳이 이렇게 거지라니.”
그들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싸구려 장신구들을 주섬주섬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들 중 하나가 입맛을 다셨다.
“뭔가 아쉬운데……. 이봐, 아가씨.”
“네, 네?”
나는 겨우 입술을 열었다. 마주한 괴한의 눈이 참으로 게슴츠레하다고 생각했다.
이윽고 괴한은 입맛을 쩝쩝 다시며 지껄였다.
“가진 게 없으면 몸으로 때워야지?”
마차 안에 음흉한 웃음이 메아리쳤다.
“그러게. 다시 보니 정말 귀엽게 생겼는데?”
“내 취향이야. 한눈에 반하겠어.”
“눈이 아주 예쁘네. 특이한 황금색이야.”
들려오는 목소리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잔뜩 겁을 집어삼킨 내가 몸만 달달 떨 적, 거친 손길이 팔을 움켜쥐었다.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다. 그들은 날 그대로 질질 끌고 나가 바깥, 아름드리나무 밑에 내팽개쳤다. 정신이 혼미하니 몸이 아픈지도 알 수가 없었다.
토악질 나오는 손길이 화사한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슬금슬금 다리를 타고 오르던 뱀 같은 손길.
“거지여도 아가씨는 아가씨네.”
“피부 죽인다.”
하얗게 빛바래버린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제발,
누가,
“돈이 다 뭐냐. 억만금을 줘도 예쁜 건 못 가지는데.”
나를 좀 도와줘…….
질끈 눈을 감았던 그때.
누가 나의 기도를 들었던 것이었을까.
“거기.”
사늘한 음성이 들렸다.
그대로 행동을 딱 멈춘 괴한들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물로 젖어 흐릿한 시야 안에 웬 남자가 담겼다. 무척이나 우아한 남자는 사늘한 얼굴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데스테리언에서 이게 무슨 버러지 짓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