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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망한 구원자 (120)화 (120/123)

외전 15. 키언, 샤로니아 편(4)

샤로니아가 침대 헤드에 기대어 책을 보고 있던 키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샤워를 끝낸 그녀에게서 향기로운 냄새가 진동했던 탓에 키언은 슬쩍 책을 덮었다.

“그렇게 빨리 덮어도 되는 책이었어요?”

샤로니아가 쿡쿡 웃었다.

“원래 당신이 잠자리에 들 준비를 끝낼 때까지만 보려고 했던 거요.”

키언은 책을 협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뒤, 샤로니아의 허리를 감아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러자 샤로니아가 잠옷 자락을 다리 위로 끌어올리며 유혹의 기운이 다분한 모습으로 안겨들었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모습에 키언의 눈썹이 한차례 꿈틀거렸다.

“오늘…… 무슨 날인가?”

그가 좋으면서도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샤로니아가 어깨를 떨며 숨죽여 웃었다.

“제가 오늘 요부가 될 작정을 하고 왔는데, 싫으세요?”

그녀가 손끝으로 키언의 가슴을 느리게 쓸어내리자 그에게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분명히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는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 키언은 두 눈을 좁게 뜨고 샤로니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잡은 이성의 경계는 그녀의 손길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가만히 계시면 제가 황홀경을 맛보여 드리지요.”

샤로니아가 키언의 가운 끝을 잡아당겨 풀고 난 뒤, 그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으윽…….”

키언은 짜릿한 쾌감에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거절하지 못할 정도의 자극이라고 해도 그녀의 속셈이 무엇인지는 알고 넘어가야 했다.

“자, 황홀경을 맛보여 주는 대가가 뭔지 미리 말하시오.”

열기에 침잠되어 흐릿해진 황금빛 눈동자가 마지막 힘을 짜내어 묻는 말에 샤로니아는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미리 알려드리면 거절하실 거잖아요.”

“위험한 일이로군.”

키언은 그녀가 이렇게 나오는 걸 보니 엄청나게 위험한 일일 거라고 단정 지은 듯했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샤로니아는 생긋 웃으며 유혹의 기운을 높였다.

“위험하다는 건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이에요. 폐하께서 위험하다고 판단하신 일이 실상은 그리 위험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지요.”

샤로니아가 키언의 뺨을 쓰다듬으며 귓가에 낮게 속살거리는 말에 키언은 잠시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그 말은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하지만 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덮어놓고 알았다고 하는 것까진 바라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끝까지 버틸 줄은 몰랐는데.

샤로니아는 김이 빠져서 키언의 옆자리에 털썩 누웠다.

“벌써 끝난 건가?”

키언이 웃음을 눌러 참으며 묻는 말에 샤로니아는 눈꼬리를 뾰족하게 세웠다.

“제가 무슨 말을 하든지 안 들어주실 거잖아요.”

“글쎄…….”

그가 샤로니아 쪽으로 몸을 돌려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위험한 걸 들어주기는 싫긴 한데, 당신이 아까 하던 일은 흥미가 식질 않아서.” 

키언이 무슨 일을 벌일 건지 일단 말해보라고 재촉하자 샤로니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어차피 말을 안 해도 안 된다고 할 거고, 해도 안 된다고 할 거면 차라리 말하는 게 낫지 않겠나. 그렇게 결론을 내린 샤로니아가 키언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다 입을 열었다.

“예전에 마즈다크 왕국에 바람을 일으키는 마도구가 있었거든요. 이를테면 풍차 같은 거요. 그게 있으면 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날 수 있어요. 그걸 만들어 보려고요.”

“응? 그게 위험한 건가?”

샤로니아의 말을 듣던 키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엄청나게 위험천만한 일을 계획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양호했다. 그런 걸 만들겠다는데 허락 못 할 이유가 없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만들어도 좋소.”

키언의 허락이 떨어졌는데도 샤로니아는 기뻐하기는커녕 눈을 도르르 굴렸다.

“왜, 또 뭐가 남은 건가?”

키언이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끼며 묻자 샤로니아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바람을 일으키는 동력을 얻기 위해선 마정석이 필요해요.”

“마정석? 그건 일전에 마물을 없앤다고 다 쓴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죠. 정확히 잘 알고 계시네요.”

샤로니아가 빙긋 웃는 것을 보고 팔 위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난 키언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오, 샤론. 설마 거길 가겠다는 건 아니겠지?”

마정석을 구했던 곳은 마물이 득실거리는 호라산이었다. 더군다나 그곳은 키언과 샤로니아가 목숨을 잃을 뻔한 곳이다.

“왜 아니겠어요?”

웃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키언이 황망하게 입을 벌렸다.

“거긴 너무 위험해.”

“이동 마법으로 다녀오면 돼요.”

“마물이 나오면 어쩌려고?”

“유능한 기사들이 있는데 뭐가 문제겠어요. 저도 예전처럼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거고요.”

샤로니아는 반박할 말을 미리 준비해 놓은 사람처럼 막힘없이 술술 이야기했다. 키언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제가 말한 물건을 만들면 제국민들에게 엄청난 도움이 될 거예요. 네? 폐하?” 

샤로니아가 기다란 속눈썹을 깜박이며 애교 섞인 목소리를 내자 키언은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좋소, 단 이동마법으로 갔다가 마정석만 구한 뒤 빠르게 돌아오는 걸로.”

“네, 물론이죠.”

기뻐하는 샤로니아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그것을 바라보던 키언이 그녀에게 충동적으로 바짝 다가가며 물었다.

“그러면 아까 말하던 황홀경은 다시 맛보여 주는 거요?”

대화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는 걸 깨달은 샤로니아가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예, 당연하죠.”

샤로니아가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키스하기 시작하자 키언은 깨달았다. 허락이니 뭐니 실랑이를 했지만, 그녀가 자신을 유혹했던 순간, 이미 자신은 선택지가 없었다는 걸.

사랑하는 아내가 요망함을 넘어서 요부가 되겠다는데 이토록 기꺼운 일이 또 있을까.

* * *

신전에서 인공적으로 사육해서 변이를 일으킨 마물이 아닌, 태고부터 이 땅을 살아 오던 마물들이 호라산에는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위잉―.

이동 마법진이 내뿜는 밝은 빛과 함께 키언과 샤로니아를 필두로 한 일행이 호라산에 발을 내디뎠다. 샤로니아가 호라산행을 말한 후 일주일간의 준비를 거친 뒤 진행된 일이었다.

“여긴 여전하군.”

키언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모래만 날리는 삭막한 땅은 가시덤불과 키 작은 나무들만 간간이 자라고 있을 뿐, 볼품이 없었다.

“최단 시간에 마정석을 찾는 게 목표이니, 다들 잘 부탁하네.”

“예, 황후 폐하.”

기사단과 인부들로 구성된 무리가 고개를 숙였다. 이 무리 중에는 광맥을 기가 막히게 찾는 전문가들도 여러 명 포함되어 있었다.

“자, 그럼 미리 나눠 놓은 조대로 흩어져서 주위를 둘러보고 찾으면 신속하게 신호한다.”

“존명, 폐하의 명을 받잡습니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호라산이었기에 이들은 미리 회의를 거쳐 매뉴얼을 짜놓은 상태였다. 3개의 조가 키언의 명을 받고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키언과 샤로니아도 자신들을 호위하는 무리와 함께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여기는 처음 와 보는 것 같군.”

얼마쯤 걷다가 키언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황량한 모래사막이 어느 순간 끝나더니 바위로 이루어진 골짜기가 모습을 나타냈다.

바위가 겹겹으로 이루어진 골짜기였기에 시야 확보가 어려웠다. 당장이라도 바위 뒤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것처럼 스산한 분위기가 계속됐다.

키언과 샤로니아의 호위를 맡은 기사단장 코넬르와 일행은 검을 빼 들고 잔뜩 긴장한 채로 사방을 경계했다.

“바위가 많은 걸 보니 잘 찾아온 것 같긴 한데…….”

샤로니아가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코끝을 찡그렸다. 그녀의 예감은 늘 적중하는 편이었는데, 지금 그녀의 예감은 잘 찾아왔다고 느끼는 동시에 마물을 맞닥뜨릴 것 같다고 말하고 있었다.

“조심하세요.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아요.” 

“그러게, 불행하게도 나도 같은 느낌이 드는군.”

키언이 검을 빼 들었다. 그와 동시에 땅이 쿠그그긍, 진동했다.

땅울림의 여파로 커다란 바위들이 마치 모래성 무너지듯 와르르 굴러떨어졌다.

“다들 내 옆으로 모여요!”

샤로니아가 마법으로 실드를 치면서 외쳤다. 일행은 재빨리 그녀 주위로 모여 날아오는 바위로부터 안전하게 피했다.

바위로 된 골짜기가 전부 뒤집히고 나자 그 안에서 거대한 식물계 몬스터인 샘블링 마운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와우……!”

키언이 잠시 넋 나간 얼굴로 탄성을 뱉어냈다.

“으아, 저걸 실물로 보게 될 줄이야!”

“책에서 본 것보다 더 흉측한데요?”

놀랍기는 기사단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들도 키언과 비슷한 얼굴로 멍하니 입을 벌렸다.

샘블링 마운드는 흐물흐물한 덩굴이 얽히고설켜 거대한 몸집을 이루고 있었다. 채찍처럼 자유자재로 덩굴이 뻗어 나와 공격을 가하고 복원력이 뛰어나 웬만한 타격으로는 작은 상처도 낼 수 없는 마물이었다.

“우와, 저거 꼴에 입도 있나 본데요?”

기사단원 중 한 명이 샘블링 마운드의 흉측한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외모 감상은 그쯤하고 없앨 궁리를 하는 게 어때?”

키언이 자신에게로 뻗어온 덩굴을 잘라내며 말했다.

“네! 이미 그러고 있습니다!”

기사들 또한 마구잡이로 공격해 오는 덩굴을 잘라내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하지만 잘린 덩굴은 곧바로 자라나 원상 복구되었다.

“장난 아니네.”

“우와, 뭔 놈에 복원력이 저래?”

고군분투하는 기사들 입에서 계속해서 신음 섞인 탄성이 튀어나왔다.

그걸 본 키언이 손가락을 말아 물고는 삐익, 휘파람 소리를 냈다. 그러자 그의 전서조인 독수리가 날아올랐다. 독수리가 곧 그의 신호를 흩어진 다른 조에 전달할 것이다.

“파이어 블레이즈(fire blaze)."

샤로니아가 마법 시동어를 중얼거리자 그녀의 손끝에서 화염이 방사되었다.

하지만 샘블링 마운드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했다. 마물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계속해서 덩굴을 뻗어 공격해오자 샤로니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식물 주제에 불에도 안 탄단 말이야?”

그녀는 표정을 가다듬고 손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그녀 주위에서 파직파직, 전류가 흐르는 것을 보고 기사단이 기겁하며 물러났다.

“다들 알아서 피해요! 썬더 스피어!”

피할 시간도 주지 않고는 그녀가 어마어마한 번개를 내리꽂자 다들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그걸 보고 태연하게 웃는 건 키언밖엔 없었다.

모두 이쯤이면 저 흉측한 마물이 재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샘블링 마운드는 전류를 모조리 빨아들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변이를 일으켰다.

“기분 탓인가? 아까보다 더 커진 것 같은데?”

키언이 벙한 얼굴로 점점 몸집을 부풀리는 마물을 바라보았다. 전류를 흡수한 마물은 아까보다 두 배는 더 커진 것 같았다.

“으악, 아무래도 화난 것 같은데?”

“아까보다 더 빨라졌어!”

몸집이 커졌던 탓에 휘두르는 덩굴의 개수도 늘고 속도도 빨라졌다. 혼비백산한 기사단이 우왕좌왕했다.

“황후 폐하, 저 마물은 습기가 많아서 다른 마법은 통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기사단 중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에 샤로니아는 간신히 예전에 보았던 마물 도감의 내용을 떠올렸다. 샘블링 마운드는 마법 계열의 공격에 강하니 말려 죽이는 수밖에 없다고.

“젠장, 미안해요. 지금 생각이 났네.”

그녀의 말투가 황후의 품격에 맞지 않게 꽤 거칠어져 있었지만 그걸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으악! 살려 줘!”

그 와중에 기사 한 명이 덩굴에 붙잡히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이 손써 볼 겨를도 없이 덩굴이 그의 몸을 친친 휘감았다.

샤로니아는 그가 질식하기 전에 서둘러 마물에게 손을 뻗었다. 스스스슥, 그녀의 손바닥으로 물기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몸에서 습기가 빠져나간 샘블링 마운드는 기괴한 몸부림을 치며 저항했다. 하지만 곧 바짝 마른 장작처럼 빠르게 굳어 갔다.

퍽, 퍽! 기사를 휘감은 줄기를 검으로 치자 마른 덩굴이 투둑투둑 떨어져 내렸다.

털썩,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기사에게 아파할 겨를도 없이 동료 기사들의 손길이 와 닿았다.

“오오, 죽다 살아난 소감이 어때?”

“황후 폐하께 감사해. 네가 산 건 다 황후 폐하 덕분이니까.”

축하를 명목으로 온몸을 두들기는 손길에 살아난 기사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그때, 아까 전서조의 신호를 받은 다른 조들이 속속히 모여들었다.

“히익, 이, 이게 뭐, 뭡니까?”

석탄처럼 새까맣게 고체화된 샘블링 마운드를 본 다른 조원들이 멍하게 입을 벌렸다.

“일찍도 왔군.”

키언이 그들을 어떻게 처결할지 고민하며 비뚜름하게 입매를 들어 올릴 때였다.

푸드드덕, 그의 팔 위로 내려앉은 독수리가 입에 물고 있던 붉은 돌을 툭, 뱉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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