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4. 키언, 샤로니아 편(3)
루하르 제국 황실에는 역대 황제와 황후의 초상화를 모신 방이 있었다. 그곳은 루하르 제국의 역사와도 진배없어서 아무나 출입이 허가되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샤로니아도 그곳에 자신의 얼굴을 올려야 했기 때문에 초상화의 모델로 시간을 할애하는 중이었다.
“황후 폐하, 그럼 오늘도 실례하겠습니다.”
황실 화가인 앤드류가 꾸벅 인사하며 캔버스 앞에 섰다.
먼저 와서 자세를 가다듬고 기다리던 샤로니아가 허락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모델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샤로니아는 초상화를 그리기 위한 첫 만남에서 정말 꼼짝도 하지 않느라 허리가 뻣뻣해져 애를 먹었다.
만일 앤드류가 조금 움직이는 것쯤은 괜찮다고 말해 주지 않았다면 초상화가 완성되기도 전에 포기했을지도 몰랐다. 이제는 앤드류를 만나는 게 세 번째여서 조금은 여유가 생겼다.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시종이 알리는 말에 앤드류도, 샤로니아도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그대로 있어도 되는데. 알리지 말고 올 걸 그랬나 보오.”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키언이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그가 한창 바쁠 시간이라는 걸 아는 샤로니아가 물었다.
“어쩐 일이세요? 오늘 국정 회의가 있는 날 아니었어요?”
그 말에 뒤따라 들어온 테오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한숨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방 안을 울리자 깜짝 놀란 테오르가 어깨를 움찔 떨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불만을 표하려던 것이 아니라 정말로 몸이 저절로 반응한 것이었다. 뭐, 황제가 회의 시간을 제멋대로 늘렸다 줄였다 하는 것이 하루 이틀이어야 괜찮은 척을 할 것 아닌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할 일을 내팽개치는 무책임한 황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한번 작정하면 무서울 정도로 집중력을 발휘하곤 했는데,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키언은 국정 회의에서 서로 논의할 여유도 주지 않고 몰아치듯 모든 안건을 일사천리로 해결해 버렸다. 나중에는 회의에 참석한 가신들이 눈치를 보며 말을 아낄 정도였다.
‘황후 폐하의 초상화가 완성되는 것을 직접 보고 싶어서 그러신 거라고 난 절대 말 못 해.’
테오르는 웃는 얼굴 뒤로 자신만이 아는 진실을 감추었다.
그런 테오르를 향해 쯔쯧, 한차례 혀를 찬 키언이 앤드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림은 어느 정도 완성됐는가?”
“워, 워낙 섬세한 작업이다 보니 이제 절반쯤 완성했습니다.”
“그래? 난 더 빨리 끝날 줄 알았었는데…….”
앤드류의 눈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황제의 의도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초상화 작업을 빨리 끝맺길 원하는 것인가?
그는 어쩐지 키언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괜히 머릿속에 들지 말아야 할 상상이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가 너무도 사랑하는 황후를 지나치게 유심히 관찰하는 화가가 마음에 들지 않아 두 눈을 뽑아 버렸다느니, 아니면 질투심에 미쳐 화가를 무참히 살해하고 만 폭군의 비극적인 이야기 같은 것 말이다.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갑자기 사죄하는 앤드류를 보고 키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응? 그게 무슨 죽을죄씩이나 된다고. 난 더 잘됐다고 말하고 싶은 거였는데. 미완성인 초상화를 보고 싶었거든.”
앤드류는 사실 여부를 확인하듯 키언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웃으면서 사람을 죽인다는 소문이 자자한 황제는 표정만으로는 속내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내가 부담스러운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앤드류를 보고 키언이 고개를 살짝 갸우뚱했다.
“아, 아닙니다! 그, 그럴 리가요!”
앤드류는 기함하며 손을 내저은 뒤 잠시 심호흡을 했다. 황실 화가가 되기까지 험난했던 여정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신분이나 뇌물 같은 것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었다. 오로지 실력만으로 이 자리까지 온 것이었으니, 무시무시한 소문을 주렁주렁 매단 황제가 제 그림을 지켜보아도 괜찮아야 했다.
“뭐, 아니라니까 그리는 걸 좀 지켜보겠네.”
키언이 손짓을 까딱하자 시종이 의자를 가져와 앤드류 옆쪽에 내려놓았다.
테오르는 앤드류에게 연민의 시선을 보낸 뒤 슬쩍 방을 나왔다. 아무래도 황제는 저기에 자리를 깔고 한동안 있을 것 같으니 자신은 밀린 일들이나 처리해야겠다.
‘저 화가 양반 덕분에 오늘은 칼퇴근하겠네.’
테오르가 룰루랄라 하며 떠나고 샤로니아는 자리에 앉아 아까와 똑같은 포즈를 취했다. 엘런과 하녀 몇 명이 재빨리 다가와 샤로니아의 자세를 바로잡아 주고 옷의 주름 같은 것들을 매만져 주었다.
“재밌어 보이시네요.”
샤로니아가 화폭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키언을 보며 말했다.
“알잖소. 당신에 관한 거라면 난 뭐든 재밌어하는걸.”
키언이 눈도 깜짝하지 않고 닭살스러운 말을 내뱉자 앤드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는 제 옆에 떡하니 자리 잡은 황제의 존재를 지우려고 수없이 노력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그래도 이렇게 무리하게 시간을 뺄 필요까진 없으셨어요.”
샤로니아가 슬쩍 키언을 타박했지만, 그는 얼굴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답했다.
“무리하다니? 전혀 무리한 적 없소. 내 가치 기준이 당신 중심으로 바뀐 지가 언제인데 그런 섭섭한 말을…….”
샤로니아는 혀를 찼다. 그의 애정이 기꺼웠으나 다른 사람은 아예 안중에 없는 듯한 태도는 아무래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앤드류가 억지로 캔버스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저 불쌍한 사람이 황제에게 어떻게 불편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신 표정을 보니 내가 썩 반갑지 않은 모양인데?”
키언이 슬쩍 눈썹을 들어 올리며 샤로니아에게 묻자 그녀가 앤드류 쪽에 시선을 주며 말했다.
“저는 괜찮지만…….”
자신에게 시선이 몰리자 앤드류가 펄쩍 뛰었다.
“저, 저도 괜찮습니다! 저는 없는 사람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그렇다는군.”
키언이 어깨를 으쓱한 뒤, 여상하게 대화를 시작했다.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데.”
“아, 감사해요. 아무래도 초상화가 황실 역사가 되다 보니 일부러 고풍스러운 느낌으로 입어 봤어요.”
초상화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멜다는 역대 황후 중에 가장 돋보이게 만들어드리겠다며 의상 제작에 들어갔다.
그녀는 평상시에 즐겨 쓰지 않던 중후하고 무게감 있는 원단으로 드레스를 제작했다. 거기에 밋밋하지 않도록 베이지색 공단과 금사 레이스로 만든 장식을 달았다.
그걸로 끝나지 않고 키언이 목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특별히 주문한 진주 목걸이를 두르고 황실에 대대로 내려오는 티아라를 쓰고, 이날을 위해 특별히 주문한 레이스 장갑을 꼈다. 덕분에 샤로니아는 누가 봐도 황후라고 할 만큼 품위 있고 우아해 보였다.
“뭐, 당신은 뭘 입어도 항상 예쁘니까.”
크흠, 앤드류는 괜히 목이 타는 기분을 느끼며 한차례 헛기침을 내뱉었다. 키언이 예상치 못한 말을 할 때마다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생각을 가다듬어야 했다.
“감사, 해요.”
샤로니아는 어쩐지 피로감을 느끼며 설핏 웃었다.
그때였다. 키언이 앤드류의 그림에 훈수를 두기 시작한 것은.
“무표정한 것보단 살짝 미소 짓는 게 낫지 않나? 저것 좀 보게. 웃는 얼굴이 저토록 예쁜데 그걸 그림으로 영원히 남기는 게 맞지 않겠나?”
잘 참던 앤드류의 미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만둘까? 그냥 때려치울까? 앤드류의 눈동자가 몰아치는 생각을 감당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네, 그, 그러시다면 입매를 조금 수정하겠습니다.”
그래도 그는 까다로운 귀족들을 많이 만나 보았던 경험을 되살려 일단 한고비를 잘 넘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게 끝이 아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눈동자 색이 가장 중요해. 자, 잘 보게. 황후의 눈동자는 이런 탁한 하늘빛이 아니라 에메랄드를 섞어놓은 듯한 신비로운 파란색이란 말일세.”
앤드류는 하마터면 붓을 떨어트릴 뻔했다. 도대체 그가 말하는 ‘에메랄드를 섞어놓은 듯한 신비로운 파란색’을 어떻게 구현해 낸단 말인가.
“…….”
앤드류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만 벙긋벙긋하자 키언이 한술 더 떠서 말했다.
“그리고 황후가 마르긴 했지만 자랑할 만큼 몸매가 좋은 편……!”
“폐하!”
샤로니아가 키언의 말을 황급히 끊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렇게 남세스러운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다니. 그녀는 목덜미가 뜨끈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키언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오늘은 이만하는 게 좋겠어요.”
“응? 아직 조금밖에 못 그린 것 같소만.”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요? 샤로니아가 눈꼬리를 뾰족하게 세웠다가 급하게 앤드류에게 말했다.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네.”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앤드류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감사 인사를 올렸다. 그러다 키언과 시선이 딱 마주친 그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눈치를 보았다.
황제가 저렇게 팔불출 짓을 일삼는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에 안 드는 자들은 살아서 황궁 밖으로 못 나갔다던데, 설마 나도……?’
머리털이 쭈뼛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조금만 참을걸. ‘에메랄드를 섞어놓은 듯한 신비로운 파란색’쯤이야 몇백 번 색을 섞다 보면 찾을 수 있을 텐데.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마당에 못 할 것은 없었다.
얼굴이 허옇게 질려 석상처럼 굳어있는 앤드류를 보고 키언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손바닥을 비비며 입에 발린 말을 해 대는 자들은 제가 그렇게 싫어해도 황궁 문턱을 닿도록 드나들더니 꼭 필요한 순간에는 없었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그저 더 완성도 높은 초상화를 얻기 위해 몇 마디 보탠 것뿐인데. 하지만 당장이라도 참형에 처한다는 명을 받은 것처럼 까무러칠 것 같은 앤드류의 얼굴을 보니 자신이 정말로 폭군이라도 된 것 같다.
“황후가 오늘은 이만하고 싶다니 할 수 없지. 그만 가 보게.”
키언이 손을 내젓자 앤드류의 얼굴에 화사한 봄꽃이 피어났다.
“그럼, 소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가 기쁜 얼굴로 화구를 챙겨 나가는 걸 보고 키언이 쯧, 혀를 찼다. 그 모습을 본 샤로니아가 참지 못하고 쿡, 웃음을 터트렸다.
“초상화를 보고 이래라저래라 하시는 것보단 저와 함께 산책하시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샤로니아가 키언의 팔에 팔짱을 끼며 말하자, 그의 표정이 좀 풀렸다.
“그럼 그럴까?”
그들은 웃으며 황궁 정원으로 나왔다.
가을에 접어든 정원은 어느덧 만개한 꽃들이 스러져가고 있었다. 그들이 만나고 벌써 몇 번의 계절이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노랗게 물들어 바닥에 떨어진 플라타너스 나뭇잎을 주워 들어 만지작거리던 샤로니아가 말했다.
“그런데 왜 그러셨어요? 황실 화가가 꽤 난처해하는 걸 폐하께서도 알고 계셨잖아요.”
그녀의 물음에 키언이 피식 웃으며 커다란 나무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내가 마치 화가를 일부러 괴롭힌 것처럼 말하는군.”
“폐하답지 않으셔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키언의 입가에 드리운 미소가 어쩐지 쓸쓸해 보여 샤로니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난 말이오, 나 자신을 한 번도 황실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소. 당신도 알다시피 내 혈통이 황제에 걸맞은 건 아니거든…….”
그가 마음속에 내내 이런 생각을 품고 있는 줄 몰랐던 샤로니아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당신의 초상화가 내 옆에 걸린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좀 흥분했나 봅니다. 내 존재가 처음으로 황실에 있어도 되는 존재같이 느껴져서.”
“폐하…….”
연민이 가득한 샤로니아의 목소리에 키언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샤로니아와 마주 보고 섰다. 가만히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키언이 말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너무했다는 생각은 안 드는데.”
“네?”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샤로니아가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황실 화가씩이나 되는 이가 당신 눈동자 색깔도 정확하게 고르지 못하다니. 아무래도 파직시켜야겠어.”
“네에?”
샤로니아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자 키언이 픽 웃으며 그녀의 눈꼬리에 촉, 입을 맞췄다.
“당신은 아마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그 화가를 옹호할 테지?”
“잘 아시는군요.”
샤로니아가 곱게 눈을 흘기자 키언이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속삭였다.
“그럼 그 화가를 파직시키는 대신 내게 키스해 줘.”
“오, 폐하. 화가를 파직시키는 문제가 아니더라도, 키스는 얼마든지 해 드리지요.”
“그것참 다행이군.”
둘은 마주 보고 쿡 웃음을 터트렸다. 미소 지은 채로 입술을 겹친 그들 위로 드높은 가을 하늘이 맑게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