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3. 키언, 샤로니아 편(2)
라타비아 왕국으로 가는 항해는 중간에 해적을 만난 걸 빼면 순조로웠다.
평생 배를 탄 사람들조차 구토하게 만드는 샤로니아의 강한 바다 너울에 녹초가 되어 나가떨어진 해적들이 줄줄이 잡혀가고 커다란 범선인 퀸 메리 호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배 이름은 여성스럽게 지어야 안전하다던데 정말 그런가 보네요.”
샤로니아가 호기심에 자극을 받았는지 신기해하며 말했다.
“성난 파도 속에서도 여성처럼 온화하고 포근하게 항해하라는 기원을 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배의 선장인 딜런이 샤로니아의 곁에서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해적으로 인해 자칫 막심한 피해를 입을 뻔한 것을 구해 주었다고 생각해서인지 평상시 과묵한 선장이 말을 많이 했다.
그것을 지켜보던 키언은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미 잠자리에 들 시간을 지나쳐 표정에서 불만이 드러났다.
“배는 만든다거나 짓는다고 하지 않고 ‘모은다’라고 합니다. 덩치가 크다 보니 만든 부분을 퍼즐 맞추듯 조각조각 모아야 하거든요.”
하지만 눈치 없는 선장은 계속해서 샤로니아가 흥미 있을 법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바다에는 재미있는 신화가 많습니다.”
키언은 선장이 신화 얘길 꺼내자 도저히 참지 못하고 크흠, 헛기침을 뱉어냈다.
바다에 떠도는 미신이나 신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아마 날이 새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선장은 ‘S’ 자로 휘어진 키언의 눈썹을 보았고, 시간이 늦었으니 다음에 더 이어서 말해 주겠다며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선실로 들어온 샤로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키언을 바라보았다.
“방이 너무 호화로운 거 아니에요?”
그도 그럴 것이 선실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마호가니 침대가 중앙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고, 그에 어울리는 협탁과 화장대 등 새로 마련한 것 같은 가구들이 방을 꽉 메우고 있었던 탓이었다.
샤로니아는 침대 무게 때문에 바닥이 내려앉는 건 아닐까 염려했다. 아니, 애초에 출입문 자체가 이만한 침대를 들여올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가 신기해하는 것을 본 키언은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떠올렸다.
간만에 시킨 일이 만족스럽게 처리된 것을 보니 돌아가서 포상이라도 해야 할까 싶었다.
“당신에게 어울리는 방으로 꾸미라고 지시했더니 이렇게 됐군.”
테오르가 들었더라면 뒷덜미를 잡으며 길길이 날뛰었을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키언이 씨익 웃었다.
어차피 테오르는 이 말을 들을 수 없을 테니 자신의 말에 문제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이건 좀…….”
과한 것 같은데. 중얼거린 샤로니아가 할 수 없다는 듯이 화장대 앞에 앉았다.
“내가 도와주겠소.”
귀걸이와 목걸이를 풀어놓으려는 샤로니아를 보고 키언이 성큼 다가갔다.
“제가 해도 되는데요.”
샤로니아가 만류했지만 키언은 고집을 부렸다.
목걸이를 풀며 보니 그녀의 목이 너무 연약해 보였다. 저렇게 가는 목에 어떻게 이렇게 무거운 목걸이를 걸고 다니면 아프지 않을까?
“생각보다 무게가 많이 나가는군.”
키언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샤로니아가 몸을 휙 돌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의도를 알 수 없었던 키언은 잠시 움찔했다.
“이제라도 아셨으니 다행이네요.”
응? 뭘? 키언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샤로니아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목걸이, 폐하께서 선물하신 거잖아요. 폐하께서 주신 것들은 거의 다 이런 것밖에 없다고요.”
지나치게 화려하고 과한 것들로만 그녀의 보석함을 꽉꽉 채워놓은 키언은 그래도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흠, 그래?”
키언은 생각에 잠긴 사람처럼 턱을 쓰다듬었다. 샤로니아가 보기에는 반성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 그는 반성 따윈 하지도 않는 중이었다. 조금 더 가벼운 보석은 뭐가 있을까, 그것으로 또다시 보석함을 가득 채울 궁리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시중드는 사람이 아무도 없네요?”
샤로니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무리 선실이라도 고용인 하나쯤은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오늘은 내가 그대의 시중을 들 거요.”
“네? 폐하께서요?”
거울 안에 빙긋 웃는 키언의 얼굴이 마주 보이자 샤로니아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처음으로 함께하는 장거리 여행인데 방해받기 싫어서 내가 그리하겠다고 했소.”
샤로니아의 미간의 주름이 더욱 깊어지자 키언이 쿡, 웃으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자, 자, 내가 엄청나게 유능한 걸 알면 깜짝 놀랄걸.”
그가 유들유들하게 말하며 자신을 끌고 파티션 뒤로 향하자 샤로니아가 헛웃음을 뱉어냈다.
“그럼 이제 편한 옷으로 갈아입혀 드리겠습니다.”
키언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아주 정중하게 말하자 샤로니아의 표정이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복잡해졌다.
샤로니아는 이날 여행을 떠나면서 인사해야 할 사람들이 많았기에 꽤 화려하고 복잡한 의상을 입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옷은 어려울 것……!”
키언이 헤매기는커녕 능숙하게 옷을 벗기기 시작하자 샤로니아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커졌던 눈은 곧 가느스름하게 변했다.
겹겹으로 덧입은 치마끈을 찾아 푸는 손길 하며, 등 뒤로 빽빽하게 달린 리본을 해체하는 손길에 저절로 의심이 꽃피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페티코트 고리를 풀고 실크 스타킹을 고정한 끈에 손에 대는 순간, 샤로니아는 참지 못하고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과거를 탓하는 건 잘못된 거라는 걸 알지만, 기분이 썩 좋진 않네요.”
키언은 그녀의 기분이 갑자기 저조해진 이유를 단번에 파악하지 못해 잠시 눈을 깜박였다.
“과거……?”
그가 곱씹듯이 그녀의 말을 따라 하자 민망해진 샤로니아가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지금 내 과거의 여자에 대해 기분 나빠하는 건가?”
그의 입꼬리가 단박에 씨익 올라갔다.
“폐하께서 과거에 누굴 만났든지 탓하는 건 아니지만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인걸요.”
샤로니아는 솔직히 제 심정을 말했다. 제 옷을 거침없이 벗기는 손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좀 웃기긴 했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걸 어떡하겠나.
“흠, 그렇다면…… 기쁜데?”
응? 기분 나쁜 게 아니라 기쁘다고요? 샤로니아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키언을 바라보았다.
그는 스타킹을 고정하는 끈이 없어지지 않도록 가지런히 놓아둔 뒤에 스타킹을 돌돌 말며 아래로 내렸다. 그의 손이 허벅지를 지나 발목까지 맨살을 훑듯이 스쳐 내려가자 샤로니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진지하게 여자를 만나본 적 없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자 키언은 픽 웃고 말았다. 도대체 저 자그마한 머리로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깊은 관계를 가져 본 적은 더더욱 없고.”
“그게 말이 돼요?”
“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샤로니아가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지독하게 잘생긴 그의 얼굴이 대신해 주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잘생겼는데 여자들이 가만히 뒀다고요?”
제 입으로 말하고도 민망했던지 샤로니아가 얼굴을 붉혔다.
“칭찬인가?”
또다시 키언이 픽 웃었다.
“당신도 알다시피 난 전장을 떠도느라 여자를 만날 시간이 없었어. 황제가 되고 나서 접근해 오는 여자들은 꽤 있었지만 그건 내가 좋아서라기보다 황후 자리에 관심이 있어서였지. 당신도 듣지 않았나, 내 별명?”
“아…….”
샤로니아는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잘생긴 목석’이라는 그의 별명을 듣고 잠시 그의 기능(?)을 의심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도 이상하잖아요. 폐하께서 이렇게 여자 옷을 잘 벗…….”
샤로니아는 제 말이 꽤 이상하게 들리는 것 같았기에 말하다 말고 입술을 말아 물었다.
“이상할 것도 많군. 이런 건 잘할 수밖에 없는 일이야.”
그가 샤로니아를 파티션 안쪽에 놓여 있던 탁자 위에 앉히며 말했다.
“……왜냐하면 본능이니까.”
두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하는 동시에 키언의 손이 샤로니아의 맨다리를 타고 속치마 속으로 들어왔다. 자극을 받은 몸이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저릿했다.
샤로니아는 막힌 숨을 내뱉으며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처음이시라면…… 타고나신 것 같네요.”
“칭찬 고맙군.”
입꼬리를 들어 올린 키언이 샤로니아의 입술을 답삭 삼켰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좀 어이가 없긴 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저절로 이렇게 몸이 반응하는 걸 보면 말이다.
혼이 쏙 빠질 정도로 진하게 키스한 키언은 그녀의 나머지 옷들도 아주 손쉽게 벗겨냈다.
“폐하, 그래도 이건 좀…….”
샤로니아가 손으로 제 몸을 가리며 항변했다.
“아, 원래는 잠옷을 입혀드릴 예정이었습니다만 생각해 보니 다시 벗길 거라서 생략하겠습니다.”
키언이 마치 진짜 고용인처럼 정중하게 말하자 샤로니아는 실소하며 헛숨을 내뱉었다. 말투만 정중할 뿐이지 그 내용은 불순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그런 샤로니아가 사랑스럽다는 듯이 웃고 난 키언이 그녀를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 그가 걷는 내내 쉬지 않고 입맞춤을 해 댔던 탓에 침대에 등이 닿은 샤로니아의 호흡은 이미 가빠져 있었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등 뒤에 닿는 느낌에 샤로니아는 잠시 눈을 깜박였다. 선실에 이런 침대를 준비한 그의 저의를 너무도 잘 알 것 같아서.
“폐하는 다른 여자들을 다 마다하고 왜 제가 좋으셨을까요?”
샤로니아가 의문이 담긴 눈동자로 자신을 말끄러미 바라보자 키언은 피식 웃으며 벗은 제 옷가지들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져놓았다.
“글쎄? 당신을 처음 봤을 때 그냥 매료되었나 봐.”
키언은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푸른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고는 그녀의 눈꼬리에 촉, 입을 맞췄다.
심해를 연상시키는 푸른 눈동자는 보고 또 봐도 전혀 질리지가 않았다.
샤로니아가 키언의 옷 벗는 것에 손을 보태어 셔츠 단추를 풀어가기 시작하자 그는 또다시 픽 웃고 말았다.
“이 세상에 운명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우리가 그런 거라고 난 확신해.”
키언은 어쩐지 확고한 느낌이 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단단한 연결고리가 그들을 묶고, 인생 전반을 끌어가고 있다고.
그것은 뭐라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그의 영혼을 걸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강한 확신을 주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샤로니아는 제 마법을 다 쏟아부어 그를 살렸고 마력이 소진되며 그 기억을 잃었다.
키언 또한 생사를 오가는 급박한 순간에 만난 여자아이가 자신을 살렸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다만 잠재된 의식 속에 어둠을 밝히는 여명과도 같던 그 푸른 눈동자가 각인되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게 된 것은 정말 운명이기에 가능한 것인지도 몰랐다.
“운명이라니…… 참 듣기 좋은 말이네요.”
샤로니아가 키언의 가슴부터 복근까지를 느릿하게 손으로 쓸어내리며 생긋 웃었다.
그가 이성을 놓아 버릴 만큼 요망한 웃음이었다. 이럴 때마다 그는 그녀를 급하게 안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해야 했다.
전신을 뒤흔드는 야릇한 갈증에 그는 모든 인내심이 고갈된 사람처럼 급하게 그녀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사랑해,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저도요. 폐하를 사랑해요.”
그 후로 그들은 달이 희미해질 때까지 오래도록 서로를 탐했다.
그리고 샤로니아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날이 밝고도 한참이 지난 뒤였다.
“아! 일출을 보려고 했었는데…….”
샤로니아가 한숨을 내쉬며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자 키언이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달랬다.
“일출이야 내일 보면 되지 않소.”
하지만 샤로니아는 번번이 그의 유혹에 넘어가 새벽녘까지 그와 사랑을 나누느라 그 후로 며칠 동안은 일출을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