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요망한 구원자 (115)화 (115/123)

외전 10. 루카스, 헤이든 편(3)

“미안해요. 오빠가 마음대로 벌인 일이에요.”

헤이든이 빠르게 걸어오며 루카스를 향해 두서없이 사과했다.

“그게 어째서 사과할 일이야?”

리암이 팔짱을 끼며 삐딱하게 말했다. 단번에 헤이든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이 문제는 가족 회의에서 다 끝낸 걸로 아는데.”

“난 동의 못 해. 델라크 가문이 어떤 가문인데. 오로지 실력으로 가주를 정하는 게 델라크 가문의 전통이야. 그런데 결혼을 핑계로 의무를 저버리겠다고?”

“하? 그게 그렇게 문제가 돼? 그럼 지금이라도 다시 실력을 겨뤄 보면 알겠네. 내가 오빠한테 지면 그땐 깔끔하게 물러나 줄 거야?”

“이야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는 건데?”

폭풍처럼 몰아치는 남매의 말싸움 가운데 끼인 루카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턱을 문질렀다. 팽팽하게 맞선 기운은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빠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잘 살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싫어?”

“그, 그게 아니잖아.”

덩치 큰 리암이 여동생 앞에서 쩔쩔매는 것은 분명히 진귀한 구경거리임에 틀림없었다. 벤자크는 이미 흐음, 콧소리를 내며 다툼의 향방을 점치고 있었지만, 루카스는 행여나 그녀가 상처받을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그리고 나랑 싸울 때 오빠가 전력을 다하지 않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헤이든이 쏘아붙이자 리암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럴 리가. 델라크 백작가의 명예를 걸……!”

“듣기 싫어.”

헤이든이 리암의 말을 싹뚝 자른 뒤, 루카스를 돌아보았다.

“죄송해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겠어요.”

화를 참느라 그녀의 어깨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본 루카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하겠소.”

그의 말에 억지로 미소 지은 헤이든이 고개를 홱 돌려 리암을 째려보았다. 극심한 온도 차이에 리암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내가 노처녀로 늙어 죽으면 그건 다 오빠 책임이야!”

리암이 뭐라고 답할 새도 없이 헤이든이 나가 버리자 그는 마른 얼굴을 쓸어 올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럴 줄 예상 못 했던 건 아니지만……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군.”

자조하듯 중얼거리는 리암이 너무 불쌍해 보여 루카스는 하마터면 그를 위로할 뻔했다.

“그렇게 볼 거 없습니다. 당신한테만큼은 동정받고 싶지 않으니까.”

리암이 툭 뱉듯이 말한 뒤 인사도 없이 가버리자 루카스는 허, 허, 기가 막혀 헛숨을 뱉어냈다.

“저하는 항상 운이 없는 편이셨으니, 이번에도 그러려니 하십시오.”

벤자크가 위로랍시고 한 말에 루카스의 눈매가 뾰족해지자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책상에 앉아 업무를 시작했다.

* * *

“세상에 쉬운 일이 없네.”

루카스가 샤로니아와 차를 마시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루카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샤로니아가 말했다.

“오빠‘들’은 다 그런가?”

“응? 거기에 왜 복수형이 쓰이는 거지?”

루카스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샤로니아가 픽 웃었다. 어쩌면 이렇게 자기 모습은 기억을 못 하는지.

“내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오빠가 어떻게 했더라?”

그녀는 짐짓 표정을 감춘 채 차만 호록거리며 마셨다.

“응? 내가 왜? 내가 어쨌기에?”

루카스가 두 눈을 끔벅이는 걸 보니 정말 제가 한 일은 새카맣게 잊은 게 틀림없었다.

“폐하의 집무실을 날려 버렸던 거, 정말로 기억이 안 나?”

샤로니아가 콕 집어서 말해 주자 그가 어색한 웃음을 늘어놓았다.

“하, 하, 하. 내가 그런 짓을 했다고?”

그제야 루카스는 이전 일들이 생각났다. 황제의 집무실을 날려 버린 것으로도 모자라 결혼식 당일까지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떠냐고 샤로니아를 설득했더랬다.

나, 왜 그랬지? 자조적인 웃음을 짓고 난 루카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담판을 지어야겠어.”

아끼는 여동생을 시집보내는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만큼 마냥 기다리고 있어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래, 뭐,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

샤로니아는 제 오빠가 조급해하는 것이 재밌는지 웃으며 말했다. 

“그럼, 갔다 올게.”

기합이 팍 들어간 루카스가 나가다 말고 다시 돌아왔다.

“응? 왜?”

샤로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루카스가 갑자기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내가 그 말을 못 했네. 너 행복하게 잘 사는 거 고맙다고.”

“아, 뭐야…….”

샤로니아가 쿡쿡 웃음을 터트리자 루카스는 민망해하며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 * *

델라크 백작가는 태풍의 눈 같은 고요함에 빠져 있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뒤 헤이든을 끔찍이 아끼며 키워온 리암은 그녀가 결혼 후 머나먼 타국으로 가 버릴 것이라는데 꽂혀 있었고, 헤이든은 제 결혼을 반대하는 오빠에게 마음이 단단히 상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난 누구 편도 아니야.”

델라크 백작가의 차남인 카스피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너 그걸 말이라고…….”

리암이 눈을 흘기자 카스피안이 픽 웃었다.

“어차피 우리 집에서 그 말괄량이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건 형도 알잖아.”

“그건 그렇지만…….”

눈이 마주친 형제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헤이든이 자기 침실에 박혀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명백한 시위였다.

그때 마침 집사장이 손님의 방문을 알려 왔다.

“뭐? 누가 왔다고?”

“마즈다크 왕세자 저하께서 오셨습니다.”

카스피안처럼 누구의 편도 아닌 집사장은 루카스의 방문을 오히려 달가워하는 눈치였다. 시위 중인 헤이든을 구해 줄 수 있는 건 그밖에 없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래서 집사장은 마치 미리 약속이라도 해 둔 것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루카스를 응접실로 모셔 왔다.

“어인 일로 이 누추한 곳까지 행차를 다 하셨습니까?”

리암이 이죽거리는 것을 본 카스피안이 쯔쯧, 혀를 찬 뒤에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헤이든의 둘째 오빠인 카스피안 델라크입니다.”

“기별도 없이 찾아온 걸 이해해 주면 고맙겠소.”

루카스도 가볍게 인사를 했다.

카스피안은 루카스의 외모를 보자 모든 것을 파악했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저하를 뵈니 동생이 왜 저렇게 난리인지 모든 의문이 풀렸습니다.”

“그렇, 습니까?”

루카스는 그 말뜻을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쳇, 평생 얼굴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닌데,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리암이 옆에서 구시렁거리자 카스피안이 웃으며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오신 김에 잘 되었습니다. 탑에 갇힌 공주님 좀 구출해 주시지요.”

안 그래도 며칠째 헤이든에게 연락이 오지 않아서 걱정하고 있던 루카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갇혔, 다고요?”

가만히 있을 때는 점잖고 예의 바른 모습이라서 몰랐는데, 한순간에 날 선 기운을 드러내는 것을 보니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전부는 아닌가 보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스스로 갇힌 거지요.”

카스피안이 루카스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며 그를 진정시켰다. 그는 루카스가 착하기만 한 게 아니라서 더 마음에 들었다. 안 그러면 성깔 넘치는 제 동생을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

“아마 저하께서 왔다는 걸 알면 헤이든이 무척 좋아할 겁니다.”

카스피안이 시종에게 루카스를 헤이든의 방으로 안내해 줄 것을 지시하자 루카스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결혼을 반대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의 물음에 카스피안이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가주는 헤이든입니다. 가주의 결정을 누가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 애 고집은 아무도 못 꺾지.”

툴툴거리던 리암마저 고개를 끄덕였다. 루카스는 그제야 이 험상궂은 사내들이 저를 마음고생시키려고 그동안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단 것을 깨달았다.

“그럼.”

루카스는 고개를 까딱하고는 시종을 따라 헤이든의 방으로 갔다. 원래 같았으면 그들에게 한 소리 해 주었겠지만, 결혼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걸 알아서 그런지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주인님, 마즈다크 왕세자 저하께서 오셨습니다.”

“뭐? 누, 누가 왔다고?”

시종이 전하는 소리에 안에서 다급하게 와당탕하는 소리가 들렸다.

루카스는 피식 웃으며 문이 열리기만을 묵묵히 기다렸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문이 벌컥 열리고 헤이든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지와 셔츠, 베스트 차림에 머리카락을 높게 올려 묶은 그녀는 방 안에서 체력 단련이라도 했는지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방에 갇힌 공주님을 구하러 왔는데.”

루카스가 싱긋 웃자 목을 쭉 빼고 복도를 이리저리 살핀 그녀가 오빠들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를 안으로 쑥 잡아당겼다.

“오빠들이 저하께 무슨 짓을 한 건 아니죠?”

헤이든이 놀란 눈으로 루카스의 몸을 이곳저곳 살폈다.

“무슨 짓은커녕 당신에게 가 보라고 보내 주던걸.”

그녀의 반응이 귀여워서 루카스가 피식 웃었다. 

“흠, 무슨 속셈이지? ……방에 틀어박힌 게 효과가 있었나?”

헤이든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루카스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긍정해 주었다.

“효과는 확실한 거 같소. 날 이렇게 당신에게 보낸 걸 보니. 그나저나 당신 모습을 보니 잘, 지낸 것 같군.”

루카스는 그녀가 답답해하다가 결국은 견디지 못하고 방 안에서 고강도 훈련을 했으리라 짐작하며 입매를 늘어뜨렸다.

“다른 건 다 괜찮았어요. 검을 휘두르려니 공간이 협소해서 그렇지.”

헤이든이 자신의 검을 들어 보이며 씨익 웃었다.

그 시각, 루카스를 헤이든의 방으로 올려보낸 리암과 카스피안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이것저것을 논의하고 있었다.

“가문은 이제 형이 맡아서 돌보는 걸로 하고, 헤이든의 결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준비……!”

“헉, 잠깐만!”

리암이 갑자기 뭔가 중요한 생각이 난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왜 그래?”

카스피안이 인상을 찌푸리자 그것보다 더 심하게 미간을 찌푸린 리암이 중얼거렸다.

“왜 아직도 안 내려오는 거지? 뭘 하기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카스피안은 리암이 왜 또 저러나 싶어서 한숨을 내쉬었다. 리암과 헤이든의 나이 터울은 12살이나 되었기에 카스피안은 가끔 리암이 오라비 역할을 하고 싶은 건지, 아버지 역할을 하고 싶은 건지 헷갈릴 때가 있었다.

“나는 내 집에서 그런 꼴은 못 본다.”

무얼 상상한 것인지 다혈질적인 성격의 리암이 씩씩거리며 계단으로 향했다.

아, 내가 정말 못 살아. 세상을 가장 편하고 합리적으로 사는 것이 목표인 카스피안은 이래서 자신이 집에 오고 싶어 하지 않는 거라고 중얼거리며 리암의 뒤를 따랐다.

헤이든의 방문 앞에 온 리암은 먹잇감을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소리를 엿들었다.

놀랍게도 방 안에서는 가쁜 숨소리가 연신 터져 나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리암의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더니 카스피안이 말리기도 전에 문을 벌컥 열고 소리쳤다.

“헤이든 델라크! 내가 널 그렇게 키웠……!”

하지만 방 안의 풍경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카스피안이 창피해서 못 살겠다며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루카스에게 좁은 공간에서 효율적으로 검을 다루는 방법을 보여 주던 헤이든은 노크도 없이 쳐들어온 오빠들을 보며 사납게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뭐 하자는 거야? 이제는 나랑 아예 인연 끊고 싶어?”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리암이 버벅거리며 변명했다.

“나, 난 그게 아니고…… 사내놈들은 믿을 게 못 된다고……!”

리암은 헤이든이 던진 칼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열었던 문을 급하게 닫았다.

탁, 문에 칼이 꽂히는 소리가 조용한 복도에 울려 퍼졌다.

“저, 저, 저, 지랄 맞은 성격하고는…….”

쯧쯧, 혀를 차던 리암은 갑자기 든 생각에 눈썹을 꿈틀거리며 슬쩍 턱을 문질렀다.

어쩌면 루카스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고마워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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