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 루카스, 헤이든 편(1)
수확제 자선 파티에서 마주 앉아 술을 들이켜던 두 사람은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단 자리를 옮겨서 얘기하죠. 따라와요.”
턱짓을 까닥하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헤이든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하자 루카스도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뭐, 광장에서 꽤 가깝기도 하고, 사람들 방해 없이 얘기하려면 여기만 한 데가 없어서 온 거니까 오해하지 마요.”
막상 자신의 본가로 들어서자 신경이 쓰였는지 헤이든이 말했다. 루카스는 그녀가 뭘 오해하지 말라는 건지는 몰랐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헤이든은 자신이 자주 다니는 비밀 통로를 사용해서 몰래 자신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루카스는 그녀가 자신의 집에 드나들 때 사용인들을 단 한 사람도 만나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며 감탄했다.
원래 집을 자주 비웠던 탓에 헤이든의 방은 거의 사람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았다.
“잠만 자고 나가는 방이라서 볼 건 없어요.”
헤이든은 티 나지 않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루카스에게 시큰둥하게 말한 뒤, 벽장에 진열되어 있는 위스키를 꺼냈다.
“앉아요.”
루카스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분고분하게 탁자 앞에 앉았다. 그녀가 아주 익숙한 동작으로 글라스를 꺼내 위스키를 따르고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원래 술을 즐기는 편인가 봅니다.”
관찰하는 듯한 루카스의 진득한 시선에 조금 불편해진 헤이든이 크흠, 헛기침을 내뱉으며 말했다.
“뭐, 차보다는 술이 좋죠.”
그러고는 괜스레 목이 타는 것 같아 술을 홀짝 마셨다.
바른 생활의 표본 같은 데다 할 일이 많고 사명감이 투철한 이 남자와 술 같은 걸 마시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헤이든은 복잡한 표정으로 잔에 담긴 위스키를 빙글빙글 돌렸다. 자신이 내숭 부리는 것을 포기한 지금은 그의 앞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나도 당신처럼 솔직해지면 좋을 텐데…….”
루카스가 중얼거리듯 말한 뒤 헤이든과 눈을 마주쳤다.
자수정처럼 반짝거리는 보라색 눈동자는 참으로 매혹적이었다. 아마 유명한 보석 수집가라면 보석보다 그의 눈동자를 더 탐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헤이든은 잠시 눈을 깜박였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남의 시선을 피해 본 적이 없던 그녀였다. 상대를 기선 제압하기 위해선 무조건 눈빛부터 누르고 봐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처음으로 다른 이의 시선을 피했다. 저 보라색 눈동자에 멍하게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는 항상 내가 원하는 걸 하기보다,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살아왔소.”
루카스가 담담히 자기 말을 시작했다.
“멸망한 왕국을 재건하기 위해서 사람을 모으고, 세력을 키우는 일이 가장 시급했으니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지요. 하지만 요즘엔 자꾸만 지난날에 회의감이 들더군.”
자조하듯 설핏 웃은 그가 독한 위스키를 쭉 들이켰다.
헤이든은 자신이 마시는 술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어째서 그가 들이켜는 술은 이토록 불안한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한차례 미간을 찡그렸다.
“그것참 별일이네요.”
그러고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 별일이 아무래도 당신 때문인 것 같아.”
루카스의 직선적인 말에 헤이든은 하마터면 마시던 위스키를 뿜을 뻔했다.
커헉, 간신히 역류하는 술을 삼키자 진한 알코올이 머리를 쨍, 하게 울렸다.
그녀는 입가를 닦고는 기막힌 표정으로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내내 시선을 피하다가 이렇게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친 것은 오늘 처음이었다.
“…….”
당황스럽게도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은 못 박힌 듯 시선이 얽혀서 하염없이 서로의 눈동자만 바라보았다.
얼마쯤 시간이 지난 뒤, 정신이 든 헤이든이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저하께서는 해야 할 일을 하시면 돼요. 전 아무 상관 없으니까요.”
이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이 말이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또다시 시선을 돌리려는데 루카스가 가볍게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려 붙잡았다.
그의 손길 때문에 시선을 돌릴 수 없게 된 헤이든은 난감한 표정으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뭘 어쩌자고. 그녀는 항의하듯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루카스는 제 눈에 오롯이 담긴 여자가 붉은 장미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었고 또 치명적이었다.
그녀는 저에겐 없는 불같은 열정을 소유하고 있었다. 모든 일을 의무감으로 해 왔던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틀림없었다.
그녀가 연약한 레이디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날 받은 충격은 심장이 얼얼할 정도였다. 자신이 보호해 주어야 할 여인의 테두리에서 그녀가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정말 힘겨운 일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녀가 여느 여인들과 달라서 힘들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녀 곁에 어떤 모습으로 있어야 할지 혼란스러웠던 탓일 것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왕실의 교육을 받으며 지독히 이성적인 틀 안에 갇힌 채 살아왔고 이런 틀을 완전히 깨트리는 여자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안 보면 괜찮을 줄 알았다. 자신에게 지워진 무거운 대업과 의무들을 떠올리며 그녀와는 맞지 않는다고 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그녀 생각밖엔 없었다. 지독하게도 되풀이되는 굴레였다.
루카스는 헤이든의 눈동자를 잠잠히 바라보며 그 이유가 점점 더 명확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거 압니까? 당신 눈동자가 달콤한 거?”
예상치 못한 루카스의 발언에 헤이든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자신은 상관하지 말고 왕세자로서 의무와 책임을 다하라고 기껏 말했더니 눈동자가 뭐 어떻다고?
아무리 술에 취했다 하더라도 이렇게 평정심을 잃은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였다.
헤이든의 표정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루카스는 그녀에게 슥, 더 가까이 다가와 눈을 들여다보았다.
“당신이 날 볼 때마다 석양을 마주 보는 것 같거든.”
평상시에 깍듯이 예의를 갖춰 존대하던 그가 술에 취해서인지 말투도 행동도 슬쩍 풀어져 있었다.
그런 게 더 취향을 자극했던 터라 헤이든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자기 눈동자가 석양 같든, 달빛 같든, 제게는 보이지 않을 뿐이니 별로 중요치 않았다.
“그립고, 아련하고, 그래서 계속 보고 싶고, 눈을 못 떼겠고…… 그런데 계속 보다 보면 불길에 휩싸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보석 같은 보라색 눈동자가 일순 짙어지자 헤이든은 깜짝 놀라 흠칫, 어깨를 떨었다.
제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면서 뛰기 시작했다.
“당신 없이는 도무지 의욕이 생기지 않아.”
그가 푸념하듯 내뱉는 말에 헤이든은 목덜미로 더운 열기가 훅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다행히 그녀는 훌륭한 검술사였고 기사였기 때문에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 맞추고 싶은 마음을 극적으로 누를 수 있었다.
“저하, 아무래도 다른 날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헤이든은 그렇게 말하면서 그의 손을 슬쩍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급하게 일어선 루카스가 그녀의 손목을 탁, 잡았다.
“내가 싫은 겁니까?”
“…….”
헤이든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가 싫기는커녕 너무 좋은 게 문제였으니까.
“당신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좋아합니다.”
해 질 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석양처럼 제 삶을 서서히 붉은빛으로 물들여 결국엔 불꽃처럼 타오르게 하는 이 여자를 그는 좋아했다. 아니, 사랑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왕국을 재건하겠다는 대업도, 그가 짊어진 의무도, 다 빈껍데기처럼 느껴졌으니까.
제 속에 숨겨 놓았던 말을 뱉고 보니 후련했던지 루카스가 눈매가 접히도록 싱긋 웃었다.
“아아, 내가 정말 미쳐…….”
그 미소에 이성이 날아가 버린 헤이든이 중얼거렸다.
술을 마시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그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맨정신이었어도 그에게 홀리기는 마찬가지였을 테니.
그녀는 아까부터 시야에 어른거리던 매혹적인 입술에 기습적으로 촉, 입을 맞췄다.
“이게, 제 대답이에요.”
크흠, 겸연쩍은 마음에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그가 허리를 훅 감아 당겼다.
“기다리던 대답이군요.”
그리고 그녀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입술이 겹쳐졌다. 이미 취기가 오를 대로 오른 데다가 꾹꾹 눌러놓았던 욕망이 터져 버렸기에 둘은 걷잡을 수 없는 격랑에 휩쓸리고 말았다.
숨이 막히도록 진한 키스가 정신없이 이어졌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침대로 향하는 동안 벗은 옷가지들이 바닥에 줄지어 떨어졌다.
그들의 입술이 잠깐 떨어졌을 때는 헤이든의 부츠가 벗겨지지 않았을 때뿐이었다.
루카스가 그녀의 부츠를 벗겨서 뒤로 휙, 집어던진 뒤 다시 깊고 진한 키스가 계속되었다.
루카스는 헤이든의 붉은 머리칼이 침대 위에 흐트러진 것을 보고 정말 불길 가운데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냥 그 순간은 불길에 제 몸이 다 타서 재가 되어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열락의 시간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루카스는 잠이 깨고 자신이 한 짓을 알게 되자마자 막을 수 없이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실소했다.
순서가 잘못되었다. 그녀를 사랑한다면 어떤 자극도 이겨 냈어야 했다.
머리로는 그걸 아는데 제 눈앞에 등을 돌리고 누워있는 헤이든의 뒤태를 보자 그런 생각은 머릿속에서 싹 사라지고 말았다.
술로 인해 흐려진 정신이 아닌, 맑고 또렷한 정신으로 그녀를 안고 싶었다. 그녀가 제 손짓과 몸짓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헤이든을 보고 있자니 어깨가 살짝살짝 떨렸다. 보나 마나 깨어 있는 걸 테지. 귀엽기도 해라.
루카스는 쿡,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감아 당겨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잘 잤습니까?”
매끄러운 아침 인사와는 달리 그녀의 피부에 입술이 닿는 순간, 이성이 훅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그는 술에 취하지 않았더라도 그녀와 닿았더라면 이런 결과를 면치 못했으리라 확신했다.
‘청혼을 해야겠군.’
그는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정면으로 봐 버린 헤이든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아, 미치겠네. 잠자리에서는 더없이 순진하고 솔직한 헤이든의 면모를 경험하고 난 뒤라 그런지 또다시 발동이 걸렸다.
“아직 주무십니까? 어제 또 술을 드신 건 아니겠지요?”
만일 엄청난 기운을 뿜어내는 하녀장이 문밖에서 소리치지 않았더라면 루카스는 그 뒷일을 책임질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신을 곤란하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는 옷을 다 챙겨 입은 뒤 곧바로 이동 마법으로 떠날 수 있었지만 한 번 더 키스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었다.
촉, 입술이 맞닿았다.
“그럼, 나중에 봅시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기에 마법을 사용해서 그곳을 빠져나오긴 했지만, 그 짧은 입맞춤의 여운은 생각보다 너무 오래가서 루카스를 괴롭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