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7. 테오르 편
테오르는 키언이 벗어서 넘겨준 장갑을 받아 들고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그가 장갑을 벗은 이유는 아마도 샤로니아의 손을 맨손으로 잡기 위해서일 테니까.
5월이면 루하르 제국 전역에 흰 감자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테오르는 그 아름다운 풍경 가운데 있으면서도 어쩐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깨가 쏟아지는 황제 부부의 뒤를 따라 걷고 있어서인가? 그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사람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닭살 행각을 일삼는 황제 부부에게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그는 자신이 황궁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때 키언의 모습을 떠올리곤 실소했다.
‘사람이 저렇게 많이 변해도 되는 건가?’
당시의 키언의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그 괴리감에 경악할 정도로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
* * *
“하고 많은 직업 중에 왜 하필 황제 보좌관이 되길 지원했지?”
테오르는 싸늘한 키언의 눈빛을 보고 잘못 온 게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지원해 놓고 취소하겠다고는 체면상 말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보기 좋게 면접에서 떨어질 수 있을까? 고민하던 테오르는 그냥 대놓고 속물처럼 말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멋있어서요. 어디 가서 이만큼 내세우기 좋은 직업도 없지 않습니까?”
“…….”
키언의 눈썹이 일순 꿈틀했다. 그러더니 꼼짝도 하지 않던 그가 테오르의 신상 기록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뭐, 보시다시피 저는 드베인 백작가 차남입니다. 작위를 이을 것도 아니니 제가 살 궁리는 스스로 해야죠.”
테오르가 지나치게 담백한 목소리로 집안사를 말하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이쯤 했으면 충분히 면접에 떨어질 만큼 무례했다고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루하르 제국에는 황제에 관한 여러 가지 일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이 인간 내면의 두려움을 극대화시키는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공작가를 차지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일화는 소문만 무성했지 정확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소문들을 제치고 그가 어떻게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냐고 묻는다면, 물론 신전에서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한 것도 있었지만, 그가 여러 차례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마즈다크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 일어난 전쟁은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차례의 대륙 전쟁으로 번졌다. 그는 그러한 전쟁에 자진해서 나갔고 목숨을 걸고 싸웠다.
전쟁을 통해 그가 보여 준 지도력과 승전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기기 충분했다. 그 당시 제국민들에게는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무능력한 황실보다는 키언과 같은 전쟁 영웅이 훨씬 더 필요했으니까.
그래서 그는 언제나 전쟁귀, 미친 살육자와 같은 별명이 따라붙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존경과 선망을 받는, 참으로 묘한 존재였다.
하지만 테오르는 키언을 실물로 처음 본 지금 그를 둘러싼 소문이 결코 사실무근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오금이 저리진 않을 것이다.
제 얼굴을 찬찬히 살피는 키언의 예리한 시선에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지만 테오르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씨익 웃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아주 바보 같은 웃음이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라는 말을 할 때가 되었는데…….’
눈을 도르르 굴리고 있자니 키언이 곧 입을 열었다.
“이만 돌아가도 좋아…….”
역시! 테오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이어지는 키언의 말에 딱딱하게 몸이 굳었다.
“그리고 내일부터 출근하지. 필요하다면 앞으로 지낼 숙소는 황궁 내에 마련해 줄 테니 필요한 짐이 있다면 가져오고.”
“네? 지, 지금 뭐, 뭐라고 하셨습니까?”
테오르는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 더듬거리며 다시 물었다.
“그 정도로 감격할 것까진 없는데.”
키언이 실소하는 소리에 테오르는 꽥, 소리치고 싶었다.
합격이라니? 도대체 나의 무엇이 합격할 만했다고? 하지만 목숨이 하나라서 차마 그렇게 소리치지 못하고 끙, 앓는 소리만 낼 뿐이었다.
“그럼, 할 일은 내일 차차 이야기하기로 하고 그만 가 보게.”
“아, 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테오르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 짜내 인사를 한 뒤 황제의 집무실을 나왔다.
황궁 복도를 걸으며 그는 저도 모르게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아, 어쩌지? 도망갈까? 아니면 망명이라도 해야 하나?’
그는 곧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길에 접어들었음을 실감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신은 정말 작위와는 완벽하게 상관없는 인생이어서 그나마 좀 있어 보이는 직업을 갖고 싶어 지원했던 것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내로라하는 가문에서 많은 지원자가 몰려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뽑히다니? 그것도 떨어지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망발을 마구 지껄였는데도 말이다!
‘속물이 취향이신가?’
테오르는 진지하게 고민하며 터덜터덜 걸음을 내디뎠다.
* * *
테오르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아니, 어쩌면 그가 생각한 이상이었다.
황제의 보좌관이 목숨이 위태로운 자리인지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황실 안은 말 그대로 무법천지였다. 신전 측 사람들로 거의 다 채워져 있다 보니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고나 할까.
아군과 적군을 가려내기 위해 살얼음판을 걷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동안 음식에 탄 독과 자객의 습격 등 키언은 목숨의 위협을 수차례나 넘겼다.
‘사직서.’
테오르는 출근과 동시에 품에 지니게 된 봉투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그가 이걸 당당하게 내밀지 못하는 이유는 별다른 게 없었다.
그동안 정이 들어서도 아니고, 황제를 존경하게 되어서도 아니다.
‘보나 마나 뻔하지!’
사직서가 수리되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키언은 웃으면서 사직서를 태워 버리고 없던 일로 할 사람이었다. 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래도 만에 하나의 확률을 생각하며 그는 사직서를 품 안에 고이고이 챙겨 넣었다. 혹시 이걸 써먹을 기회가 있지 않을까? 그는 그런 기회가 온다면 망설이지 않고 실행할 작정이었다.
“폐하,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테오르는 급하게 처리해야 할 안건이 생겨 키언의 침실 문을 노크했다.
분명히 아직 잠들 시간이 아닌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냥 돌아가면 될 것인데 자꾸 불길한 기분이 엄습했다.
그는 한 소리 들을 작정을 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키언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피곤하셨나?’
별로 그런 기색은 없었는데. 테오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 안을 살피는데 어둑해진 실내에 창문이 열려서 커튼이 날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주무실 때 원래 창문을 열어놓으시나?’
테오르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때 발에 툭, 차인 찻잔이 데구르르 굴러갔다.
흠칫,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테오르가 침대 쪽으로 달려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그와 동시에 숨어 있던 자객이 달려들었다. 아마도 창문으로 잠입한 순간 테오르가 나타나 숨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테오르는 일단 손에 잡히는 대로 베개를 방패 삼아 방어했다.
푸욱, 베개를 뚫고 나온 검이 테오르의 뺨에 상처를 냈다.
조금만 비껴 맞았어도 이 자리에서 즉사했을 것이다. 허억, 허억,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때마침 자객이 들이닥친 것을 눈치챈 그림자 기사단이 나타나 순식간에 자객을 제압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키언의 상태를 살핀 기사단원 하나가 수면제가 든 차를 발견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약과 독에 어느 정도 내성이 쌓여 있던 키언이 시끄러운 소리에 가물거리는 눈을 겨우 떴다.
“송구합니다.”
자칫 잘못했더라면 황제의 목숨이 끊어졌을 수도 있는 중차대한 문제였기에 그림자 기사단이 침통한 모습으로 부복했다.
“살았으니 됐어. 하지만 배후는, 확실히 밝히도록.”
두통이 생겼는지 그가 한 손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말했다.
“네, 폐하.”
기사단이 일사불란하게 제 위치로 흩어지는 것을 본 테오르는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왜 그래?”
키언이 묻는 말에 테오르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사직서를 낼 절호의 기회 말이다.
“이거 보이십니까? 제가 폐하 대신에 칼 맞아서 생긴 상처입니다.”
테오르는 생색을 내듯이 제 상처를 키언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전쟁터를 전전하며 온갖 상처를 보고, 또 몸에 갖고 있는 그가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할 자잘한 상처인 걸 몰라서 당당하게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렇군. 고맙다고 해야 하나?”
키언이 픽 웃으며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그 모습에 테오르는 흥분하며 품 안에 든 사직서를 내밀었다.
“아니요. 고맙다고 말씀 안 하셔도 상관없는데요. 이건 무조건 받아주셔야 합니다.”
사직서를 받아 든 키언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지금 죽을 뻔한 황제 앞에 이걸 내미는 게 맞다고 보는 건가?”
“폐하께서만 죽을 뻔한 게 아니라 저도 죽을 뻔했으니까 그렇죠!”
테오르는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 상태였기 때문에 평상시와는 달리,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불허한다.”
테오르는 제 눈앞에서 구겨지는 사직서를 보고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알려 주는 건데 말이야.”
또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서 테오르는 일단 그를 바라보았다.
“계약서를 잘 살펴보도록 해. 내 직속 보좌관은 종신직이니까.”
“예에? 뭐, 뭐라고요?”
테오르가 깜짝 놀라자 키언이 쯧, 혀를 차며 말했다.
“아직 그걸 몰랐단 말인가?”
테오르는 첫 출근 당시 너무 낙심한 나머지 계약서를 대충 훑어보고 책상 위에 던져 놓았던 것이 떠올랐다.
그가 하도 멍청한 표정을 짓자 불쌍해 보였는지 키언이 뒷말을 덧붙였다.
“뭐, 원한다면 위험 수당 정도는 추가해 줄 수도 있고.”
“이, 일단 확인 좀 해 봐야겠습니다. 내일 뵙지요.”
테오르가 비척거리며 나가자 키언은 사람을 시켜 사직서를 태워 버렸다.
“종신직은 무슨…….”
그는 약 기운이 돌아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지금 제 앞날이 바람 앞에 놓인 등불 같은데 보좌관을 어떻게 종신직으로 만들 수 있겠나. 그저 테오르를 붙잡아 두려는 임기응변이었을 뿐.
만일 다음에 또 사직서를 내민다면 거절할 만한 적당한 핑곗거리를 생각해 두어야겠다.
그만큼 그에게는 믿을 만한 사람이 절실했다.
테오르는 면접에서 떨어지기 위해 속물 같은 면모를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키언은 가식 없는 모습 때문에 그를 택한 것이었다.
제 이득을 위해 입발림하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줄줄 해 대는 사람들은 정말 끔찍이 싫었으니까.
다음 날, 뺨에 커다란 거즈를 붙이고 나타난 테오르가 불퉁하게 말했다.
“제가 깜박 속으니 재미있으셨습니까?”
“뭐, 재밌기보다는…… 안심이 되었지.”
한바탕 지청구를 늘어놓으려던 테오르가 일순 멈칫하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황제는 저렇게 가끔씩 예상치 못한 순간에 속마음을 드러내 사람을 당혹스럽게 했다.
으이구, 그놈의 정이 뭔지. 테오르는 긴 한숨을 뽑아내며 일부러 툴툴거리며 차를 끓여 그에게 내밀었다.
“자, 드십시오. 수면제는 안 탔고, 욕만 좀 탔습니다.”
“흠, 입맛이 뚝 떨어지는데 굳이 마셔야 하나?”
“목숨에 지장도 없는데, 오늘만 좀 드십시오.”
달칵, 테오르가 그의 앞에 억지로 찻잔을 들이밀었다.
잠시 후, 결국 차를 한 모금 마신 키언이 말했다.
“맛없군.”
딱 예상했던 반응에 테오르는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황제와 보좌관이 애증 관계라니. 기가 막혀 웃음밖엔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