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 엘런과 이멜다 편
엘런은 사실 약간의 정리벽이 있었다. 그녀의 방에 들어가 본 사람이라면 그것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는 여러 종류의 차를 맛보고 대접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방 한편의 커다란 장식장에는 입이 벌어질 정도로 간격을 딱 맞추어 진열해 놓은 차들이 있었다.
차를 담은 유리병에는 이름과 날짜, 원산지 등이 자세하게 기입되어 있었는데, 같은 모양의 유리병과 마찬가지로 같은 모양의 라벨을 붙인 모습이 아주 질서정연했다.
그녀의 정리벽은 성수를 담아 파는 크리스털 물병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주문 제작을 통해 완성된 물병은 대부분 엘런의 방으로 직배송되었다. 그러면 그녀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핀셋을 사용해 세심하게 물병에 라벨을 붙이는 작업을 했다.
금박 테두리를 입힌 라벨은 크리스털 물병을 더욱 고급스러워 보이게 했다. 엘런은 책상 위에 일렬로 늘어선 크리스털 물병을 보고 미소 지었다.
라벨의 위치와 높낮이가 완벽히 일치했다.
그녀는 창가를 통해 비친 햇살이 크리스털 물병을 투과하면서 만들어 낸 아름다운 빛무리를 턱을 괴고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이 성수 사업은 꾸준한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이제는 루하르 제국 누구나 상비약처럼 놓고 쓰는 물품이 되었던 탓이었다.
샤로니아의 통 큰 배려 덕분에 엘런은 꽤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그걸 생각하면 크리스털 물병만 빛나는 게 아니라 제 미래까지도 빛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엘런, 나 왔어.”
쿵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이렇게 노크 없이 불쑥 들어오는 것은 이멜다밖엔 없었다.
“어서 와.”
엘런이 이멜다의 손에 들린 벨벳 상자들을 받으며 말했다.
이멜다는 디자이너의 감각을 살려 크리스털 물병을 담을 포장 용기를 만들었다. 오리지널 버전은 짙은 보라색 벨벳 상자였지만 시즌별로 조금씩 다른 한정판 디자인을 내놓았기 때문에 이게 또 인기가 제법 많았다.
“예쁘다, 이번엔 연분홍이네?”
엘런이 감탄하며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이제 곧 사교 시즌이잖아. 로맨틱한 감성을 불어넣어 봤지.”
이멜다가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엘런은 이멜다의 재능이 이렇게 상자 만드는 데 쏟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을 늘 가졌더랬다.
“성녀님 제안은…… 아직도 고민 중이야?”
엘런이 이멜다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얼마 전, 샤로니아가 엘런과 이멜다에게 원한다면 자기 사업을 해도 좋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음…… 나도 잘 모르겠어. 솔직히 나도 내 이름을 딴 부티크를 갖고 싶긴 한데, 황궁에서 나가는 건 싫단 말이야.”
아무래도 샤로니아를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지 이멜다가 머뭇거렸다.
“꼭 황궁을 나갈 필요가 있을까? 가게는 시내에 얻고 너는 여기서 생활해도 되는 거잖아.”
엘런이 넌지시 제 생각을 말했다. 가게를 관리해 줄 유능한 직원이 있다면 이멜다가 굳이 가게에 상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 예전에는 그녀가 고생해서 한 땀 한 땀 옷을 지었지만, 이멜다는 디자인과 세밀한 부분을 관리 감독하고 그 외의 작업은 얼마든지 숙련된 재단사가 맡아도 될 터였다.
“그, 런가?”
엘런의 말에 이멜다가 솔깃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부티크는 모든 디자이너의 꿈이다. 이멜다도 내심 그런 꿈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네가 하겠다면 난 뭐든지 도와줄 거야.”
엘런이 평상시와 다르게 씩씩하게 말하자 이멜다가 피식 웃었다.
* * *
제국 최고의 명성을 거머쥐었던 레오나 부티크는 점차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멜다의 디자인과 옷 짓는 솜씨를 제 것처럼 포장해서 귀부인들을 기만했던 것을 숨길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이게 내가 주문한 드레스라고?’
‘기대에 못 미쳐도 어느 정도껏이어야지.’
실망한 손님들이 하나둘씩 떠나갔다.
마담 레오나는 예약을 하지 않고서는 옷을 맞출 수도 없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근근이 가게를 유지하고 있었다.
손해를 줄이려면 가게 문을 닫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었지만 과거의 영화에 사로잡힌 그녀는 자존심 때문에 차마 그러지 못했다.
아직까지 예전의 명성을 기억한 손님들이 간혹 찾아왔기에 그녀는 휑한 가게에 앉아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잡일을 하는 하녀 외에는 다 해고했다. 그 덕분에 꼼짝할 수 없이 카운터에 묶인 몸이 되었지만 그건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생각을 거듭해 봤자 비참해지기만 할 테니까.
오늘도 레오나는 가게에 앉아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았다.
이멜다가 떠나고 수도의 유행이 바뀌었다. 믿기 힘들었지만, 그 유행을 선도하는 것은 새로 선출된 성녀라고 했다.
그녀가 퍼레이드에 입고 나타난 드레스를 보고 흥분한 귀부인들이 얼마 동안은 문턱이 닳도록 부티크를 찾았었다. 하지만 레오나가 그와 조금도 비슷한 드레스를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안 순간, 발걸음은 뚝 끊기고 말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사교계의 내로라하는 귀부인들과 영애들을 제치고 성녀가 유행을 선도한다니 이 얼마나 웃긴 일인가.
레오나가 해결되지 않는 의문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계속 반복하고 있을 때였다.
“아……!”
그녀가 별안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창밖으로 이멜다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레오나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앞뒤 가릴 것 없이 가게 문을 열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이멜다! 이멜다 랑베르!”
마치 오래전에 헤어진 가족을 찾은 사람처럼 목소리가 절박하게 흘러나왔다.
엘런과 재잘거리며 걷던 이멜다는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더니, 딱 그 꼴이었다. 제게 한 짓을 생각한다면 이렇듯 반가운 목소리로 저를 불러 세울 수 없을 텐데.
이멜다가 경계의 눈빛으로 레오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신가요?”
일단 정신없이 그녀를 부르긴 했으나 막상 할 말을 생각지 않았던 레오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러다 곧 망하게 생겼는데 못 할 말이 무엇인가 싶어서 불쑥 본심을 말했다.
“우리 가게로 와. 최고의 대우를 해 줄 테니…….”
하지만 이멜다의 눈빛이 더욱 싸늘해지자 아차 싶었다.
“아, 그, 그러니까 예전에는 내가 많이 미안했어.”
뒤늦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를 건넸다. 말하는 순서가 뒤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뭐 어때서? 말했으니 된 거 아닌가?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남에겐 까다롭고 자신에겐 너그러운 못된 버릇이 발동되었다. 레오나는 업계 최고 대우를 해 준다면 과거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 거라고 확신하며 빳빳하게 고개를 들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거절하겠어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답하고 돌아서는 이멜다를 본 레오나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자, 잠깐만!”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었다.
“네가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서 하는 말이겠지만, 그래, 다 이해해. 하지만 생각해 봐. 어디 가서 이렇게 좋은 대우 받기가 쉬운 줄 알아?”
내가 해 준다잖아! 이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도 모르고! 레오나의 얼굴에 미처 여과되지 못한 말들이 어지럽게 떠올랐다.
레오나가 하는 행태가 너무 어이없어서 사람 좋은 엘런마저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빚 때문에 억눌려 살아서 그렇지 타고나길 원래 야생마 같은 기질이 있던 이멜다는 혀를 차며 실소했다.
“저기요, 마담. 귀가 솔깃하는 제안을 주셔서 감사하긴 한데, 저는 그걸 할 수가 없거든요.”
이멜다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레오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저거 보이세요?”
이멜다의 손가락이 한 건물을 가리켰다. 얼마 전에 공사에 들어간 으리으리한 새 건물이었다.
안 그래도 저런 고급 건물에 새로운 부티크가 들어선다는 소문이 있어서 전전긍긍하던 레오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 저게 왜……?”
간신히 반문하자 이멜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저 건물 주인이거든요. 제 부티크를 운영하기도 바쁜데, 어떻게 마담께서 운영하는 부티크의 직원이 될 수 있겠어요?”
“뭐? 마, 말도 안 돼. 네, 네가 어떻게?”
“저희가 그런 구체적인 내용까지 공유할 정도의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럼, 저는 바빠서 이만 가 볼게요.”
이멜다가 돌아서자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레오나가 비틀거렸다.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걸어 그곳을 빠져나온 이멜다와 엘런은 모퉁이를 돌아 레오나의 시각에서 벗어나자마자 푸훗,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 웃음 참느라 정말 죽을 뻔했어.”
엘런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가를 소매로 닦아 내며 말했다.
“네가 내 팔을 꽉 잡아 주지 않았으면 난 벌써 웃음이 터졌을걸.”
이멜다가 배를 잡고 키득거리며 말했다.
한참을 웃고 난 그들은 마주 보고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아, 너무 통쾌해!”
* * *
“성녀님, 저희가 시내에서 누굴 만났는지 아세요?”
“성녀님께서 그 표정을 보셨어야 했는데.”
하트론 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엘런과 이멜다가 재잘거리며 레오나와 있었던 일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차를 마시면서 그녀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샤로니아가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잘됐네. 안 그래도 이멜다가 개업할 때 무슨 선물을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좋은 아이템이 떠올랐어. 샤로니아가 덧붙이는 말에 이멜다가 손사래를 쳤다.
“에이, 성녀님은 그냥 개업식에 와 주시는 것만 해도 엄청난 선물이라니까요.”
하지만 무슨 생각에선지 샤로니아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계속 사양하는 게 미덕이 아니란 거 알지?”
샤로니아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어서 이멜다는 결국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나는 이멜다를 만난 이후로 몹시 초조해졌다.
그녀가 가리킨 건물은 시내에서도 가장 크고 좋은 건물이었다. 그런 건물이 이멜다의 소유라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보나 마나 허풍이겠지.’
저를 골탕 먹이려고 그냥 해 본 소리일 것이다. 레오나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손톱 끝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러다가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나서 일어나 밖을 내다보니 이멜다가 말한 그 건물에 간판을 설치하는 모양이었다.
‘이멜다 부티크’
엄청나게 큰 간판이었다. 마치 시내 밖에서도 간판이 보이게 하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지나치게 화려하고 선명한 간판이 떡하니 건물 전면에 붙었다.
‘헉, 진짜……라고?’
레오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사실이 아닐 거라고 최면을 걸듯 중얼거렸는데 저 간판을 보니 이제 그럴 수도 없게 되어 버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그녀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이멜다의 부티크가 문을 열기 전에 서둘러 가게를 정리해야 했으니까. 안 그랬다간 지금 주문받아 놓은 드레스마저 다 취소될 테고, 그건 곧 땡전 한 푼 남기지 못한 채 파산이라는 뜻이었다.
뭐, 엄밀히 말하자면 지금도 남는 것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빚더미에 앉는 것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멜다는 샤로니아가 개업 선물로 보내준 커다란 간판을 황홀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마음에 들어?”
이멜다의 표정을 본 샤로니아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럼요. 엄청, 엄청 멋져요!”
“이 간판을 처음 본 사람은 이멜다의 이름을 잊을 수 없을 거야. 그리고 이멜다의 드레스를 직접 본 사람은 다른 가게가 아예 보이지 않을 테고. 뭐…… 그런 뜻을 담은 선물이야.”
샤로니아가 설핏 웃으며 선물의 의미를 설명하자 이멜다가 참지 못하고 꺅꺅거리며 그녀에게 매달렸다.
“성녀님, 최고!”
“네가 최고지.”
둘은 엄지를 치켜든 채 마주 보며 빙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