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키언의 어린 시절(2)
전쟁은 참혹한 것이었다. 살점이 찢기고 피 튀기는 살벌한 현장보다 키언을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지극히 이기주의적인 인간의 본성이었다.
마즈다크 왕국을 차지하기 위한 이권 다툼은 또 다른 전쟁을 불러왔다. 배신과 음모, 술수와 농간이 개인과 개인 사이에, 혹은 국가와 국가 사이에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키언은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쳤다. 죽음의 경계선을 몇 번이나 넘었을까. 벌써 전장에서 구른 지 2년여가 되었다.
“공자님, 저것 좀 보십시오!”
수하가 외치는 소리에 키언은 적군을 베던 검을 거둬들이고 고개를 들었다.
마즈다크 왕성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키언의 두 눈이 좁아졌다. 왕성에서 불길이 일어났다는 것은 아무래도 좋은 징조는 아니었으니까.
“서둘러라! 왕족들은 반드시 사로잡아야 해!”
각 나라의 수장들은 눈이 뒤집힌 사람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왕성에 쳐들어갔다.
“꺄아아악!”
약탈과 노획에 기겁한 마즈다크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참으로 안타까운 종말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저희도 뛰어들까요?”
키언의 표정을 살피며 수하가 조용히 물었다.
“아니, 우린 이만 철수한다.”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내린 결정에 불만인 수하들도 있었으나, 대놓고 내색할 순 없었다. 어린 소년이 2년 동안 전장에서 구르며 청년이 된 것을 다들 지켜보았기 때문이었다.
키언은 고삐 풀린 인간의 잔혹성에 치를 떨었다. 그리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자신만큼은 저런 인간이 되지 말자고.
하지만 그 결심은 얼마 되지 않아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 * *
전쟁 도중에 몇 나라가 배신을 하면서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났었지만, 어쨌든 결론적으로 승전한 것이었기에 루하르 제국은 승리의 열기로 들떠 있었다.
전쟁에 참여한 가문들에게 엄청난 특혜와 부상이 주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키언은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2년 동안 볼 수 없었던 그리운 어머니의 얼굴만 뵙기를 고대할 뿐이었다.
“왔구나. 무사히 돌아왔어.”
어머니 조슬린의 눈가가 붉어지는 것을 본 키언은 그제야 자신이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 났다.
“그럼요, 당연하죠. 이 아들을 못 믿으셨습니까?”
키언은 어머니를 와락 껴안았다. 그러곤 대번에 이상함을 느꼈다.
“어머니,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왜 이렇게 마르셨어요?”
자신이 자리를 비운 2년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슬린의 몸이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무, 무슨 일은. 아무 일도 없었다.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그런 게지.”
강인하던 어머니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가냘픈 여인이 눈치를 살피며 시선을 회피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니까요. 이렇게 몸이 야윌 정도로 걱정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키언은 억지로 웃으며 이 상황을 넘겼지만, 어쩐지 싸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2주가 흘렀다. 황궁에서 전공을 치하하기 위해 입궁하라는 전갈이 왔다.
공작을 만나기 위해 뚜벅뚜벅 복도를 걷던 키언은 우연히 사일러스와 콜슨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형님, 이대로 보고만 계실 겁니까? 그 사생아 자식이 황궁에 들어가서 전공을 치하받다니요. 다른 가문에서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우리 공작가의 수치라고요.”
“콜슨, 시끄럽구나. 나라고 그런 생각이 안 드는 줄 아느냐?”
투덜거리는 콜슨을 한차례 노려본 사일러스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설마, 살아 돌아올 줄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저런 애송이가 어떻게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가 있죠?”
콜슨이 곧바로 맞장구쳤다. 그들이 키언을 공작가로 맞아들인 것은 다분히 계획적이었다.
오래전부터 전쟁이 발발할 낌새가 계속 있어 왔다. 전쟁이 터지면 공작가는 어떤 형태든 전쟁을 지원하게 되어있다. 아마도 직접 전쟁터에 나가야 할 확률이 높았다.
사일러스나 콜슨은 검을 쓰는 것엔 취미가 없었다. 남들 앞에 으스대고 잘난 척할 줄은 알았지만, 몸을 쓰고 땀을 흘리는 것은 질색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생각했다. 자신들을 대신해서 전쟁에 보낼 방패막이가 필요하다고.
그러던 차에 사생아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것이 신이 내려준 기회라고 믿었다.
“거기서 죽어 주는 게 제일 현명한 건지도 모르고.”
사일러스가 쯔쯧, 혀를 찼다.
“그러게요.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제 어미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고 나면, 죄책감에 자살이라도 할지 모르죠.”
콜슨이 악랄하게 눈을 빛내며 키득거렸다.
“쉿, 경거망동하지 마라, 콜슨. 그 일은 아직 아무에게도…….”
사일러스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쾅, 소리와 함께 키언이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왔던 탓이었다.
“그 말, 무슨 뜻입니까?”
분노가 엄습한 금빛 눈동자가 붉게 타오르는 것을 본 콜슨은 픽 웃으며 키언을 도발했다.
“알면 괴로워서 죽고 싶을 텐데, 괜찮겠어?”
키언이 아득, 이를 갈았다. 나날이 수척해져 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그것이 다 저들의 소행이었다고?
“그건 제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그러니 말씀하시죠.”
키언이 고압적인 자세로 저벅저벅 콜슨에게 다가갔다.
안 그래도 눈엣가시였던 키언이 숙이기는커녕 날 선 기운을 그대로 드러내자 더욱 못마땅해진 콜슨이 이죽거렸다.
“평민에게 어울리는 식사를 제공해 주었지. 그리고 또…….”
“콜슨!”
사일러스가 급하게 콜슨의 말을 막았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남에게 맞춰준 적이 없던 콜슨은 이제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어떻게든 저 사생아 자식이 상처받아 비틀거리는 꼴을 보고 싶었다. 아우? 웃기시네. 진정으로 그렇게 여겨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전쟁에 대신 나갈, 껍데기만 아르다시스인 자가 필요했을 뿐.
제 주제도 모르고 기고만장하다니 그 값을 톡톡히 치르게 해 줄 것이다.
“……밤 유희도 함께 했지. 나이 든 것치고는 아직 쓸 만……!”
검을 빼 드는 걸 보지 못했는데 어느새 차가운 날붙이가 콜슨의 목 아래에 겨눠져 있었다.
“크큭, 그래서? 날 죽이겠다고?”
콜슨이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날 죽이면 너는 무사할 것 같으냐? 네 어미는 또 어떻고?”
오만한 자의 표본처럼 콜슨은 키언이 자신을 어쩌지 못할 것이라 굳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일러스는 달랐다.
키언의 눈빛은 이제 분노로 넘실대던 것을 뛰어넘어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더욱 소름 끼쳤다. 잔혹한 살인마를 맞닥뜨린 기분이랄까.
“사실, 입니까?”
지독한 저음이 목울대를 긁으며 흘러나왔다.
“왜, 못 믿겠나? 그렇다면 네 어미에게 물어보면 되겠군. 네 어미가 뭐라고 말할지 나도 궁금하니까 알려……!”
이죽거리던 콜슨이 목에서 흘러내리는 선혈의 느낌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 정신 나간 새끼! 지금 무슨 짓을? 콜슨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키언을 노려보았다.
부리던 사냥개가 주인을 물었으니 그 말로야 뻔했다. 앙심을 품은 콜슨이 키언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악독한 말로 키언의 심장에 상처를 내었다. 그나마 버텨오던 키언의 이성의 줄이 툭,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그와 동시에 으아악, 괴성이 들리고 키언의 옆구리에 단검이 꽂혔다.
허억, 헉, 사일러스가 피로 물들기 시작한 제 손을 보더니 흠칫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오, 역시 형님은 대단해요. 굿 잡!”
콜슨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사일러스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키언의 옆구리가 빠른 속도로 붉게 물들어 갔지만 이성이 끊어진 그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콜슨에게 다가갔다.
“뭐, 뭐야? 왜, 왜, 안 죽어?”
살벌한 키언의 모습에 위협을 느낀 콜슨이 책상 위를 더듬거리며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았다.
이런 벌레만도 못한 것들이 득세하는 세상에 과연 미래가 존재할까. 키언은 그런 세상은 보고 싶지도, 살고 싶지도 않았다.
“자, 잠깐만……!”
콜슨이 당황해서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키언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콜슨이 나자빠지는 것을 본 사일러스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손에 잡히는 물건을 되는대로 마구 휘둘렀다.
하지만 그뿐. 전장에서 생사를 오가며 살아남은 이에게 그런 몸짓은 그저 애들 장난쯤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털썩, 사일러스 또한 키언의 검에 쓰러졌다.
* * *
터벅터벅, 발걸음이 무거웠다. 몰래 공작저를 빠져나온 키언은 무작정 걸었다.
피를 얼마나 흘렸는지 이제 시야가 가물가물해지고 있었다.
픽, 그의 입가에 조소가 맺혔다.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남의 목숨을 끊었으니 저 또한 죽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나.
인적이 드문 길을 위태롭게 걷고 있는데 앞에 조그마한 인영이 나타났다.
우뚝, 그는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두 눈을 좁게 뜬 채 초점을 맞추어 그 인영의 정체를 파악하려 노력했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써서 얼굴을 감추고 있었지만, 어린아이가 분명했다.
고요하게 비치는 달빛 아래, 아이의 푸른색 눈동자가 이상하게도 가슴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날 죽이러 왔나요?”
이런 늦은 시간에 어린아이 혼자서 다니는 것도 이상한 일인데 묻는 말은 더 이상했다.
그러다 키언은 깨달았다. 지금 제 모습을 보면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모습을 보고도 저토록 담담하게 물을 수 있다는 것이 어쩌면 더 대단한 것이었다.
“아니.”
그는 아이에게 겁을 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고개를 흔들었다.
피를 많이 흘려서인지 그 작은 몸짓에도 현기증이 몰려와 그의 몸이 잠시 흔들렸다.
“다쳤네요.”
비틀거리는 키언을 본 아이의 푸른 눈동자가 잠시 요동했다.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그렇군요.”
또다. 지나치게 담담한 목소리.
도저히 아이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담담한 목소리가 자꾸만 아득해져가는 신경을 잡아끌었다.
“어딜, 가는 거지?”
이 늦은 시간에. 그것도 위험하게 혼자서. 열이 오르는지 호흡이 가빠져 뒷말은 모조리 생략되었다.
푸른 눈동자로 가만히 자신을 올려다본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디로든요.”
“그게 무슨……?”
갑자기 목청을 높여서인지 머리가 핑, 돌았던 탓에 키언의 무릎이 꺾였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왜 저 아이의 존재가 이토록 신경 쓰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헉, 헉, 가쁜 숨이 잇새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아아, 젠장. 이러다가 곧 죽겠군. 하필이면 이런 아이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다니. 키언은 자조하며 헛웃음을 뱉어 냈다.
죽음 앞에서도 자존심을 내세우는 걸 보니 곱게 죽을 운명은 아닌가 보다.
“제가 어디로 가든 상관하실 일이 아니에요.”
아까 키언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준 아이가 처음으로 설핏 웃었다.
그 미소가 달빛보다 시리도록 처연하게 보이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키언은 버티지 못하고 가물거리는 의식을 놓아 버렸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사람 같진 않으니까.”
조그맣게 중얼거리던 아이가 쓰러진 키언의 상처 부위에 손을 갖다 대었다.
우웅, 새하얀 빛이 흘러나오자 신기하게도 피가 멎고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그럼, 저는 이만. 착하게 사세요.”
의식을 잃은 키언에게 야무지게 인사한 아이가 어둠 속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동녘에 해가 밝아오기 시작했다.
햇살이 눈꺼풀 위로 내리쬐자 키언은 인상을 찌푸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제기랄, 죽은 건가?’
하지만 암만 생각해 보아도 죽은 것 같지 않다. 그는 무거운 몸을 일으킨 뒤 제 몸을 살폈다.
상처 부위를 살피는 데 모든 신경을 집중해서인지 이슬로 온몸이 축축해진 것도 깨닫지 못했다.
“하? 말도 안 돼.”
그는 다시 한번 헛숨을 내뱉으며 상처 부위를 헤집었다. 분명히 단검에 꿰뚫렸던 상처가 지금은 흉터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자신의 생명이 연장되었음을 비로소 받아들였다.
죽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살아 있다니.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어머니의 남은 여생을 위해서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할 일.
그는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 공작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