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요망한 구원자 (104)화 (104/123)

에필로그 (1)

기다림에 지친 자그마한 발이 까딱까딱 움직였다.

“벨라아!”

그때, 붉은 머리칼을 한 아이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늦었잖아.”

이자벨라는 제 사촌인 데미안을 보고 불만스럽게 볼을 부풀렸다.

“미안, 미안, 하지만 아주 조금 늦었는걸.”

싱글싱글 웃는 데미안을 보고 이자벨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붉은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데미안은 새하얀 은빛 머리카락에 파란색 눈동자를 가진 이자벨라와 완벽히 대조되는 외모를 지녔다. 뭐, 대조되는 것이 외모 하나만은 아닐 테지만 말이다.

“내가 그랬지? 약속은 중요한 거라고. 특히 차기 왕이 될 사람은 반드시 약속의 중요성에 대해…….”

데미안은 이자벨라가 종알종알하는 말을 들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어떻게 다섯 살짜리가 저런 잔소리를 할 수 있을까 싶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치 않았다.

잔소리하는 동안 통통한 뺨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과 허리 위에 야무지게 올린 손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으니까.

어쩌면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이자벨라가 싫어하는 짓만 골라서 하는지도 몰랐다.

“늦겠다. 얼른 가자!”

데미안은 천연덕스럽게 이자벨라의 손을 움켜쥐고는 뛰었다.

“그러다 다치십니다!”

냅다 달리는 데미안을 보고 엘런이 기함하며 쫓아왔다.

오늘은 황실 아카데미에서 일 년에 한 번 실력 평가가 있는 날이다. 이날은 아카데미 학생들이 그간 배웠던 기량을 뽐내고 각 부문의 우수한 학생을 선출하여 시상하는 일이 이루어졌다.

상을 받은 학생에게는 일 년 동안 엄청난 특전이 주어졌고, 무엇보다 상 받는 것을 명예로운 일로 여겼기 때문에 학생들은 이날을 위해 엄청난 준비를 했다.

이자벨라와 데미안은 아직 어려서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없었지만, 오늘은 특별히 테스트 장면을 볼 수 있도록 출입을 허가받은 상태였다.

“어? 엄마, 안녕?”

이자벨라가 광장에 나타난 물의 여신상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순진하기는.”

큭큭 웃는 데미안을 보고 이자벨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이건, 우리 엄마야.”

물의 여신상은 샤로니아와 똑 닮은 외모 덕분에 아직도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었지만 이자벨라처럼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닮은 것뿐이지, 엄마가 아니야.”

데미안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이맘때의 아이들은 조그마한 일에도 ‘내 말이 맞아’라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같은 나이인 둘은 만날 때마다 시시콜콜한 일로 실랑이를 벌이곤 했다.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아?”

“‘너’가 아니라 ‘오빠’라고 불러야지.”

데미안이 어깨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이자벨라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팔짱을 단단히 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엘런은 웃지 않기 위해서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이자벨라보다 1시간 먼저 태어난 데미안은 이렇게 자신을 오빠라고 우겼다. 진통을 시작한 것은 샤로니아가 먼저였지만 헤이든의 체력이 더 좋았던 탓인지 그녀가 먼저 출산하고 말았다.

태어난 시간만 따져서 냉정하게 말한다면 데미안이 오빠임에 틀림없었지만, 1시간 차에 굳이 그런 걸 따져야 할까? 엘런의 눈에는 데미안과 이자벨라의 실랑이가 그저 소꿉장난처럼 귀엽게만 보일 뿐이었다.

“오빠, 아냐.”

이자벨라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자 데미안이 설득하듯 말했다.

“내가 널 지켜줄 거니까 오빠가 맞아.”

이런 식의 대화는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았기에 보다 못한 엘런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벌써 테스트가 시작했을 텐데 이러고 계셔도 괜찮아요?”

“아, 맞다!”

“큰일이네. 빨리, 빨리!”

그제야 아이들이 부리나케 테스트장으로 달려갔다.

아카데미에서 이루어지는 테스트는 시사와 상식, 검술, 마법 등 여러 종류였는데 이자벨라와 데미안이 도착했을 때는 마력 테스트가 한창이었다.

그냥 분위기만으로도 긴장감이 잔뜩 느껴졌던 탓에 그들은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걸어가 미리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경기장처럼 이루어진 돔 형태의 공간에는 학생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자기 이름이 호명된 학생은 중앙에 마련된 단상에 나가 수정 구슬에 손을 올려 마력을 측정했다.

수정 구슬은 초록색, 파란색, 빨간색 등으로 마법 수치를 표시해 주고 있었는데, 높은 레벨인 빨간색이 나올 때면 여기저기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우와, 신기하다.”

이자벨라의 눈에 반짝 빛이 들어왔다.

“제가 듣기로는 지금까지 빨간색이 나온 학생은 다섯 명밖에 없답니다.”

엘런의 설명에 이자벨라의 입이 헤에, 벌어졌다.

마법 수치가 높게 나온 학생들은 그것 자체가 영광이었다. 그들 중에서 최종 대결을 통해 우승자를 결정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저기, 저기에 있는 사람들이 마법 수치가 높은 사람들인가 봐.”

데미안이 한 무리의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들은 긴장감이 역력한 표정으로 나머지 학생들의 마력 측정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수정 구슬이 빨간색으로 변하는 사람이 적을수록 유리했던 탓에 한 명씩 학생이 교체될 때마다 긴장된 표정 변화가 두드러졌다.

“재밌겠다. 나도 해 보고 싶은데. 그치?”

데미안이 온몸이 근질거리는 것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다 끝나면 해도 되지 않을까?”

이자벨라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의 반짝거리는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엘런은 당황해서 얼굴을 긁적였다.

“그, 글쎄요. 해도 되……겠죠?”

모든 학생의 마력 측정이 끝난 뒤에 엘런이 교수진에게 다가가 아이들의 뜻을 전했다.

초조한 기색으로 기다리던 이자벨라와 데미안은 엘런이 환한 얼굴로 손짓하자 자리에서 폴짝 뛰어내려 도도도 달려갔다.

“자, 편하게 숨을 내쉰 다음, 이 위에 손을 올려놓으시면 됩니다.”

엄하고 까다롭기로 유명한 마법부 교수들의 눈매가 푸근하게 휘어졌다.

데미안이 먼저 수정 구슬 위로 손을 얹었다. 구슬 안에 여러 가지 색깔의 빛이 휘돌다가 곧 붉은빛이 나타났다.

“우와, 대단하다.”

이자벨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는지 자리를 옮기던 학생들이 우뚝 걸음을 멈추고 수정 구슬을 바라보았다.

“역시, 마즈다크 왕족답습니다.”

교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즈다크 왕족에게만 전승되는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어린아이에게도 이토록 대단한 힘이 숨겨져 있을 줄은 몰랐다.

교수들의 인정을 받은 데미안은 어깨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것을 조금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이자벨라가 곧 수정 구슬에 손을 얹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다들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수정 구슬에 시선을 집중했다.

“이거 왜 이래요?”

울상이 된 이자벨라가 물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누구도 대답해 주지 못했다.

“황녀 전하, 아무래도 수정 구슬이 좀 쉬어야 할 것……?”

이자벨라를 위로하려던 엘런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수정 구슬에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현란한 빛무리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이건 도대체?”

교수들도 본 적 없던 현상에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곧 수정 구슬이 황금색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오오, 이럴 수가!”

“이게 가능하다니?”

연신 감탄을 뱉어 내는 교수들을 본 엘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금색이 뭐기에 그러세요?”

“이건 마법 수치 최상위를 가리키는 겁니다. 붉은색보다 더 높은 수치라고요!”

“우리 아카데미가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온통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표정이 풀린 이자벨라가 데미안을 바라보고 씨익 웃었다.

“아무래도 네가 날 지켜 주는 게 아니라, 내가 널 지켜 줘야 할 것 같은데?”

데미안이 반박도 못 하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러니까 앞으론 누나라고 불러.”

훗, 이자벨라의 입가에 키언과 완벽한 싱크로율을 자랑하는 비뚜름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그날 저녁, 만찬장에서 식사 중이던 키언은 이자벨라의 먹는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음식에 손을 대지 않고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이자벨라에게만 시선을 집중하고 있자, 보다 못한 샤로니아가 말했다.

“그렇게 좋으세요?”

“좋다마다. 안 먹어도 배가 부른 기분이 뭔지 알 것 같소.”

팔불출도 저런 팔불출이 있을까. 샤로니아는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이자벨라의 볼이 빵빵해지는 것만 보아도 저렇게 좋다니.

맛있게 음식을 먹던 이자벨라가 키언의 시선을 느끼곤 마주 보며 생긋 웃었다.

“아구, 이쁜 것.”

그러면 키언은 뜨거운 캐러멜처럼 녹아 흐물흐물해졌다.

“못 말리는 부녀 같으니라고…….”

샤로니아가 한차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애교가 철철 넘치는 이자벨라를 볼 때마다 제 배 속에서 나온 아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벨라, 안 그래도 오늘 아카데미에서 마법 수치 테스트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키언의 황금색 눈동자에서 꿀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들으셨어요? 들으셨을 줄 알았어요!”

이자벨라가 자랑스럽게 어깨를 폈다.

“당연히 들었지. 너에 관한 거라면 무엇이든 알고 있단다.”

키언의 말은 절대 빈말이 아니었다. 이자벨라가 하루 동안 무엇을 하고 누굴 만나고 어떤 말을 했는지 등등이 보고서로 작성되어 그의 책상 위에 올랐으니까.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자벨라가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려 키언에게로 향했다.

아이가 움직일 때마다 은빛 머리카락이 나풀거리고 머리 위에 달린 커다란 리본이 춤추듯 움직였다. 키언과 샤로니아의 장점만 모아놓은 듯한 외모의 이자벨라는 외모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르르 녹이는 재주를 지녔다.

“잘 먹어야 건강해진다고 하셨잖아요. 자, 아 하세요.”

이자벨라가 포크로 돼지고기 커틀릿 하나를 콕 찍어 키언에게 내밀었다.

아마 이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어도 못할 거야. 그 모습을 본 샤로니아가 혀를 내둘렀다.

“고맙구나.”

키언이 눈이 휘도록 웃으며 이자벨라가 내민 커틀릿을 냉큼 받아먹었다.

“우리 공주님도 먹여 줄까?”

키언이 이자벨라를 들어 올려 제 무릎 위에 앉혔다. 그리고 식탁의 음식을 이것저것 끌어다가 이자벨라에게 먹였다.

“퍽…… 보기 좋네요.”

흡사 어미 새와 아기 새 같은 모습에 샤로니아는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드세요.”

이자벨라가 음료수 잔을 키언 앞에 밀어놓았다.

“그래, 고맙구나.”

웃으며 음료수를 마시려던 키언이 일순 멈칫, 했다. 음료수 잔이 차가워도 너무 차가웠으니까.

마치 누군가가 잔 안에 얼음을 넣은 것처럼 표면에 결로 현상이 생겨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키언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자벨라가 헤헤, 웃으며 말했다.

“나 대단하죠?”

아이의 반응을 보아하니 결코 우연이 아닌 듯했다. 키언이 샤로니아에게 눈짓했다. 이 음료수 잔을 좀 확인해 보라고.

“벨라, 마법을 쓴 거니?”

음료수 잔을 살펴본 샤로니아가 물었다. 따로 마법을 가르쳐 준 적도 없고, 이런 현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는데 어떻게 된 걸까.

“마법? 그건 모르겠고 그냥 한 건데요?”

샤로니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들었지만 그저 하나의 해프닝쯤으로 여기고 말았는데 정말 우연이 아니었다고?

“다른 것도 이렇게 만들 수 있니?”

샤로니아가 자못 긴장된 얼굴로 이자벨라에게 질문했다. 아이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보여 드릴까요?”

이자벨라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다란 칠면조 요리에 손을 대자 놀랍게도 냉동 칠면조가 되어 버렸다.

때마침 인사도 할 겸 송로버섯 요리를 들고나온 황실 주방장 로티에가 당황하며 꽥 소리 질렀다.

“어, 어느 정신 나간 놈이 여기에 냉동 칠면조를 갖다 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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