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거대한 범선이 힘차게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샤로니아는 갑판에 서서 돛이 바람을 받아 팽팽해진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도, 수평선까지 드넓게 펼쳐진 바다도 모두 다 신기하기만 했다. 배에 부딪친 파도가 햇볕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키언이 그녀의 어깨 위에 숄을 둘러주었다.
“춥지 않소?”
“아, 추운 줄도 몰랐어요.”
그제야 바람이 꽤 차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로니아의 말을 들은 키언은 픽 웃었다. 생각보다 그녀가 이 여행을 즐거워한다는 사실이 기꺼웠으니까.
“벨라가 크면 함께 더 먼 곳으로 여행을 갑시다. 그러는 편이 당신에게 더 좋겠지.”
그가 차가워진 샤로니아의 뺨에 촉, 입을 맞췄다.
“벨라가 아주 좋아할 거예요.”
그들은 이자벨라가 자그마한 손을 파닥거리며 꺅꺅거리는 모습을 떠올리곤 마주 보며 웃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것이 이렇게 가슴 따뜻한 일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그들은 손을 마주 잡고 머나먼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기울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내려앉아 황금빛이 된 바다를 보며 샤로니아가 감탄했다.
“바다는 정말 멋지군요.”
“아직 놀라기는 이를 거요.”
키언이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꾹 누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잠시 후, 갑판 한편에 차려진 저녁 만찬을 본 샤로니아는 키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조명과 정성스럽게 준비된 꽃 장식, 그리고 마치 황실 주방장이 직접 요리한 듯한 일류 요리들…….
샤로니아가 입을 벌린 채 세팅된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모쪼록 즐거운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황후 폐하.”
요리를 전담한 주방장이 메인 요리를 내오며 인사했다.
“맙소사! 로티에 주방장?”
그 얼굴을 본 샤로니아가 놀라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진짜’ 황실 주방장이었으니까!
황궁에 있어야 할 주방장이 왜 이곳에? 배 위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만난 샤로니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무 놀라시니 제가 다 송구할 지경입니다.”
로티에가 샤로니아의 표정을 보고 허허, 웃었다.
“뭐, 그 정도는 아니네만…….”
조금의 언질도 주지 않은 키언을 향해 샤로니아가 슬쩍 원망의 눈길을 보냈다.
“첫 여행인데 최고의 음식을 먹어야 하지 않겠소? 안 그런가?”
“맞습니다. 이것 좀 보십시오. 오늘 오전에 갓 잡은 신선한 송아지 요리입니다. 얼마나 육질이 연한지 입에 넣자마자 바로 녹아 없어질 겁니다.”
두 남자가 죽이 맞아 허허거리는 장면을 보고 샤로니아가 나 참,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로티에가 자부심이 가득한 요리 소개를 한바탕 끝내고 돌아가자 본격적으로 식사가 시작되었다.
샤로니아는 오늘따라 불붙는 듯한 키언의 시선을 느끼며 크흠, 괜스레 헛기침했다.
대낮처럼 여겨질 정도로 갑판 여기저기 걸어 놓은 조명보다 그의 눈빛이 어째서 더 뜨겁게 느껴지는 걸까.
“원래 라타비아 왕국에 갈 일이 있었다고 하셨죠?”
그래서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아, 그거. 요즘 이쪽 항로에 해적이 자주 출몰한다고 해서.”
키언이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웃으며 말했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그의 눈빛은 아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기에 샤로니아는 잠시 헛숨을 내뱉었다.
“정말 해적이라도 나타나면 어쩌시려고요?”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건 확률이 꽤 낮다고 봐야 할 거요. 해적들도 생각이란 걸 할 수 있으면 감히, 황실 깃발을 내건 배를 건드리진 않겠지.”
키언이 씨익 웃는데 콰광, 소리와 함께 배가 흔들렸다. 웃던 그의 얼굴이 와락 굳었다.
“아무래도 해적들은 생각이란 게 없는가 보네요.”
샤로니아가 입매를 가리며 쿡, 웃었다.
“폐하! 동남쪽에 해적선이 출몰했습니다!”
어느새 갑판 위로 우르르 몰려나와 일사불란하게 대형을 만들고 대포를 조준할 준비를 마친 기사단이 보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아, 제기랄…….”
키언이 조용히 욕설을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고서야 황실 배를 건드릴 생각을 하다니.
그는 해적들의 멍청함에 치를 떨다가 흘끗, 샤로니아의 눈치를 보았다. 좋은 것만 보여 주고, 안겨 주고 싶었던 여행을 제 안일함으로 인해 망쳐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샤로니아는 아주 여유로운 표정으로 냅킨에 슥슥 입가를 닦고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맛있는 저녁 식사에 대한 보답을 해도 될까요?”
응? 뭐라고? 키언이 반응을 나타내기도 전 샤로니아가 갑판을 성큼성큼 걸어가 해적선이 출몰한 방향에 섰다.
신출귀몰하다고 알려진 해적들답게 어느새 배를 바짝 붙여 놓은 상태여서 쉽게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저 황실의 수송선쯤으로 생각하고 한탕 하려던 해적들은 갑자기 나타난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휘파람을 불며 낄낄거리는 사내들을 보며 샤로니아가 쯧, 짧게 혀를 찼다.
“저, 미친놈들…….”
어느새 다가온 키언이 살기 어린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자 해적들은 더욱 여자를 빼앗아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의기투합해서 검을 빼 들었다.
배가 점점 가까워졌다. 해적들은 배가 가까워 올수록 발을 쿵쿵 굴러 소리를 내며 위협했다.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 해적들은 득달같이 배를 건너올 것이고 싸움이 불가피할 것이다.
기사단은 이미 검을 빼 들고 싸울 만반의 준비를 끝낸 뒤였다. 키언도 이를 아득 갈면서 검을 빼 들었다.
“넣어 두세요. 검을 휘두를 일은 없을 테니까요.”
응? 그게 무슨? 키언이 의뭉스러운 얼굴로 샤로니아를 바라보았을 때였다. 그녀가 손을 들어 해적단에게 흔들었다.
그녀가 자신들에게 인사를 건넨다고 여긴 해적들은 입이 헤벌쭉해져서 더욱 흥분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급하게 배가 닿기를 기다리던 그들은 곧 그녀의 인사가 평범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반가움이 담긴 만남의 인사가 아니라 헤어질 때 하는 인사, 즉 작별 인사였다는 것을 말이다.
쿠르르릉, 쏴아악! 갑자기 바닷물이 하늘 끝까지 솟구쳐 올랐다. 해적선과 황실 배 사이에 솟아오른 거대한 물 벽을 보고 당황한 해적들이 우왕좌왕했다.
“그러게 왜 좋은 시간을 방해해서는…….”
잠시 고개를 내저은 샤로니아가 까닥, 손짓하자 거대한 물 벽이 해적선 쪽으로 쏟아져 내렸다.
으아악, 선체에 쏟아져 들어온 물에 휩쓸린 해적들은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황망한 표정으로 갑판을 기어 다녔다.
다시 샤로니아가 손짓을 하자 이번에는 거대한 파도가 해적선을 들어 올려 곡예를 하기 시작했다.
좌우로 미친 듯이 스윙하는 배 안에서 견디지 못한 해적들이 구토를 하거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뒹굴며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악명 높은 해적, 그것도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뱃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이 난간을 붙잡고 구역질하는 모습은 정말 다시 보지 못할 명장면임이 틀림없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황후 폐하, 만만세!”
멍해졌던 표정을 추슬렀던 황실 기사들이 너도나도 검을 치켜들고 목소리 높여 외쳤다.
그것을 바라보던 키언이 쿡, 웃음을 터트리며 한쪽 무릎을 꿇고 샤로니아의 손에 정중하게 키스하며 말했다.
“마이 레이디, 당신에게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 * *
며칠 후, 배가 라타비아 왕국에 정박했다.
“어머, 세상에! 이게 뭐예요?”
부둣가에 길게 늘어선 환영 행렬을 보면서 샤로니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타비아 왕국 특유의 문양을 새겨 넣은 깃발과 꽃을 흔드는 인파가 부둣가 너머까지 이어져 있었다.
“골치 아픈 해적단을 소탕해 주신 분들을 뵙고 싶어서 나온 사람들이랍니다.”
기사 중 한 사람이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아무래도 한 건 제대로 해내신 게로군.”
키언이 픽 웃으며 배에서 내리는 샤로니아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마자 라타비아 왕국 국왕과 왕실 기사단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라타비아 왕국의 국왕, 제로니크 3세가 밝은 얼굴로 그들을 맞았다.
“오랜만이오.”
악수를 나누는데 제로니크 3세가 좀처럼 손을 놔주지 않자 키언의 한쪽 눈썹이 꿈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로니크 3세는 흥분해서 말했다.
“그 불한당 같은 해적 놈들이 우리 왕국으로 통하는 뱃길에서만 얼쩡거려서 얼마나 골치가 아팠는지 아십니까? 역시, 루하르 대제국은 뭐가 달라도 다르십니다.”
이래서 라타비아 왕국은 올 때마다 힘들단 말이야. 키언은 제로니크 3세의 손에 붙잡혀 흔들리는 제 손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건 전적으로 내 아내인 황후 혼자 한 일이라네.”
“예? 그게 정말입니까? 이런 놀라운 일이!”
제로니크 3세가 눈을 반짝이며 샤로니아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여전히 악수한 상태 그대로 흔들어대던 그의 손이 일순 느슨하게 풀렸다. 그가 샤로니아의 손등에 키스하려고 한다는 것을 기민하게 눈치챈 키언이 막 빠져나가려던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인사고 예의고 나발이고, 네 그 두툼한 입술이 샤론에게 닿는 걸 볼 순 없지.
“하하하하, 그러게 정말 놀라운 일이지 뭔가.”
샤로니아는 좀처럼 악수한 손을 풀지 않는 두 사람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각보다 사이가 좋은 건가?
“큰 은혜를 입었으니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이번 방문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저희 라타비아 왕국에서, 제공할 것입니다.”
손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느라 제로니크 3세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끊어졌다.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어요.”
샤로니아가 싱긋 웃자 제로니크 3세가 석상처럼 굳었다.
어이, 이봐. 내가 알기론 당신은 왕비뿐만 아니라 후궁도 여럿을 두었다던데. 그런 반한 것 같은 눈빛은 곤란하다고!
키언은 잡은 이 손을 비틀어 꺾어 버리면 전쟁이 날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다른 건 필요 없고 대량의 씨감자와 감자 재배를 교육해 줄 사람이 필요해요.”
“예에? 씨감자요?”
대부분의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샤로니아 또한 호화로운 의복과 잠자리, 사치품 등을 원할 거라고 생각하던 제로니크 3세가 전혀 예상치 못한 ‘씨감자’라는 단어에 잠시 멍한 얼굴이 되었다.
“제대로 들은 게 맞다네. 씨감자, 우리가 원하는 건 씨감자거든.”
키언이 쐐기를 박듯이 또박또박 말하는데 ‘씨감자’에 악센트를 너무 강하게 주어서인지 마치 욕처럼 어감이 묘했다.
“그, 그렇다면 일단 왕궁으로 가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제로니크 3세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몸을 돌려 앞서 걷자 키언의 입매가 쿡, 말려 올라갔다.
“짓궂으시네요.”
샤로니아가 키언에게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낮게 타박했다.
“아까부터 생각한 건데, 라타비아 국왕의 얼굴이…… 감자를 닮지 않았소?”
“누가 듣겠어요.”
샤로니아가 키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하지만 그녀도 차마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어서 입술을 지그시 깨물다가 키언과 눈이 마주친 순간 참지 못하고 풋,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 * *
봄은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라타비아 왕국에서 들여온 씨감자는 무럭무럭 자라나 하얀색 꽃을 피웠다.
흙먼지가 날리던 황량한 벌판은 이제 아름다운 감자꽃으로 뒤덮여 장관을 이루었다.
사방에 널린 흰색 꽃만 보더라도 마음이 푸근해지고 부유해지는 느낌이었다. 날은 따스했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더욱 따스했다.
“벨라, 조심해서 걸으렴.”
이자벨라가 아장아장 걸어가면서 밭고랑에 남긴 자그마한 발자국을 보던 샤로니아가 미소 지었다.
신발과 드레스 밑단이 흙투성이가 되었는데도 쉬지 않고 빨빨거리며 다니는 이자벨라를 보다 못한 키언이 번쩍 들어 올렸다.
“요 장난꾸러기 공주님.”
눈높이가 쑥 높아지자 신이 난 이자벨라가 꺄르르 맑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다 떨어지기라도 하면요.”
키언이 이자벨라에게 목말을 태우자 샤로니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시오?”
키언이 이자벨라에게 한 움큼 잡힌 제 머리칼을 가리키며 픽, 웃었다.
어려도 이렇게 야무진 것을 보면 딱 샤로니아를 닮았다. 그래서 아내에게도, 딸에게도 기꺼이 잡혀 사는 것이지만.
키언이 흔들리는 하얀 꽃 무리를 눈에 담으며 미소 지었다.
“당신이 이 모든 걸 이루었소.”
드넓은 벌판에 핀 감자꽃을 보러 수많은 사람이 나와 있었다. 그들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
“아니요, 우리 모두가 한 일이에요.”
볼품없는 작은 씨감자가 싹을 틔우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수십 배의 열매를 만들어 내듯이.
“겸손하시기는.”
“그게 사실인걸요.”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갈 미래 또한 행복이 주렁주렁 열리기를.
마주 보고 미소 짓는 얼굴 위로 봄날의 햇살이 찬연하게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