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샤로니아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말로만 전해 듣던 유형의 임산부를 실제로 만나게 될 줄이야.
“배가 나오기에 운동을 좀 빡세게 했더니, 배가 엄청나게 당기더라고요. 그래서 알게 됐어요.”
호호홋, 부자연스럽게 웃는 헤이든을 보고 키언이 쯔쯧, 혀를 찼다. 참, 그녀답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어쩌면 그렇게 둔감할 수 있냐고 욕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축하해요. 오빠, 축하해.”
샤로니아가 웃으며 헤이든과 루카스에게 차례로 인사를 건넸다. 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생명의 잉태는 축하받아 마땅한 일이었으니까.
“샤론, 고마워. 이건 아무래도 운명인가 봐.”
응? 어째서? 왜 거기에 ‘운명’ 같은 단어가 들어가는 거지? 루카스의 말을 들은 키언은 어떤 그럴싸한 이유를 대든 받아들일 마음이 조금도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와 내가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면 아이까지 같은 시기에 가질 수 있느냔 말이야. 이건 다 우리가 사이좋은 남매라는 징표라고!”
샤로니아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얼굴을 긁적였다. 그리고 헤이든에게 눈짓했다. 저런 낯간지러운 말 하는 걸 그냥 두고 볼 거예요?
헤이든은 그런 것 따윈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창밖에 지나가는 황실 근위병의 무기를 보고 흥분해 있었다.
“우와, 저거 엄청 비싼 무긴데. 역시 제국의 재력이 좋긴 좋구나.”
오히려 루카스의 말에 꽂힌 키언이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 슬쩍 어깨동무하며 말했다.
“그러게, 당연히 좋은 징표겠지.”
어깨동무한 그들은 겉으로는 아주 친근한 사이처럼 보였다. 하지만 조금만 눈여겨보면 둘 다 표정이 썩 밝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키언이 워낙 크고 다부진 몸매를 가지고 있었기에 루카스의 덩치가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착시 현상이 일어났다. 더군다나 키언이 어깨동무를 한 상태로 힘주어 걸음을 옮기자 어쩐지 끌려가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언은 오늘에야말로 샤로니아에게 루카스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음을 보여 줄 기회라고 생각했다.
키언은 루카스와 굉장히 친밀해 보이는 자세를 한 채로 보란 듯이 샤로니아를 향해 싱긋 웃었다.
“우리는 잠깐 나갔다 오겠소.”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눈치가 백단인 그녀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지만 키언은 끝까지 그림 같은 미소를 유지하며 밖으로 나왔다.
얼떨결에 어깨동무한 상태 그대로 서재에 도착해 버렸다.
“이것 좀 그만합시다.”
루카스가 키언의 팔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아, 뭐, 그러지.”
키언이 팔을 풀고 보았더니 루카스가 의심의 눈초리를 한 채 자신을 째려보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정말로 남매가 확실하다니까.’
샤로니아와 똑같이 가느스름하게 변한 눈매를 바라보던 키언은 픽 웃으며 그에게 다짜고짜 책을 안겨 주었다.
“내가 큰맘 먹고 아빠가 되는 노하우를 전수해 주는 겁니다. 뭐, 고마운 건 나도 알고 있으니 인사는 생략합시다.”
키언은 상대방의 의사는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책을 척척,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 든 루카스는 책이 점점 쌓이자 으윽, 신음을 내뱉으며 휘청거렸다.
아주 두꺼운 책이 계속 쌓여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쯤, 키언이 책 쌓기를 멈추고 말했다.
“이 정도만 읽으면 기본은 하겠지.”
그는 출산과 육아에 대한 지식을 전수할 수 있어서 아주 뿌듯한 얼굴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루카스는 책더미에 묻혀 키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지금 이걸 다 가져가라고? 마즈다크 왕국에는 책이 없는 줄 아…….”
“선물입니다.”
루카스가 거절하지 못할 명분을 만든 키언은 저도 모르게 씨익, 웃었다.
“아빠가 될 준비를 반드시 해야 한다고 당신 동생이 말하더군.”
키언은 샤로니아 이야기를 꺼내면 루카스가 절대로 거절하지 못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
“뭐, 그렇다면야…….”
루카스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키언은 제 예상이 맞아떨어지자 피식 웃었다. 저렇게 알기 쉽다니.
그래서 그런지 동질감 혹은 연민 같은 게 샘솟아 안 해도 될 설명을 장황하게 덧붙이고 말았다.
“이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해. 내가 미리 줄을 그어놨으니까 보기 편할 거야. 그리고 이 책은 육아계의 성서 같은 것이니 꼭 숙지해 놓아야 하고…….”
루카스는 무거운 책을 들고 한동안 설명을 듣다가 결국 폭발했다.
“선물이 아니라, 날 골탕 먹이려는 속셈인 걸 내가 모를 줄 알고?”
오, 이런 건 눈치가 빠르단 말이야! 키언이 작게 감탄하자 루카스가 더욱 길길이 날뛰었다.
이러면 사이가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지려나? 키언은 그제야 뭔가를 깨닫고 얼굴을 긁적였다.
* * *
시간이 빠르게 흘러, 어느덧 출산할 시기가 임박했다.
만삭의 몸인데도 불구하고 기사단 훈련을 그만두지 않은 헤이든은 이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훈련장에 나와 있었다.
“오늘, 내일 하신다면서요? 굳이 힘들게 훈련장까지 안 나오셔도 되잖아요.”
“누가 들으면 죽을 날 기다리는 줄 알겠네.”
그녀를 보고 사색이 된 수하의 머리통을 헤이든이 검집으로 딱, 소리 나게 내리쳤다.
“아흐, 진짜! 어떤 아기님이 나올지 걱정되지도 않으세요?”
제발, 고운 심성과 마음 씀씀이를 가지시라고요! 수하가 참지 못하고 버럭 내지르는 소리에 헤이든이 눈을 부릅떴다.
“우와, 기사가 임산부한테 소리를 지르네?”
기가 막힌 수하가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뻐끔했다. 그 표정이 우스워서 픽, 웃고 난 헤이든이 중얼거렸다.
“궁에만 있으면 갑갑하단 말이야.”
그건 자애로운 왕비 연기가 하기 싫으셔서 그런 거잖아요. 수하는 차마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뱉진 못하고 눈을 굴렸다.
헤이든은 기사단 안에서는 본모습대로 막 행동했지만, 왕궁에서는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기품 있는 왕비였다. 그 괴리감에 기사단원들은 몸을 떨었지만 계속 그런 모습을 보다 보니 적응이 되어 모두 이제는 그러려니 했다.
“뭐, 씩씩한 아이가 나오겠지.”
헤이든이 빙긋 웃으며 배를 쓰다듬는데 갑자기 그녀의 눈썹이 와락 일그러졌다.
“왜, 왜, 왜요?”
수하는 불길한 기분을 느끼며 더듬더듬 물었다.
“……배가, 아파.”
헤이든이 미간을 찡그렸다. 아이가 배 속에서 기사단 입사 시험을 치르는 것처럼 열정적으로 배를 걷어차고 있었다.
“아, 아프다고요?”
그녀의 입에서는 웬만해서 아프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 말인즉슨, 큰일이 났다는 뜻!
“끄악, 이, 이걸 어떡하지?”
의사든 마법사든 기사든 누구든 좋으니 아무나 여기 좀 와 봐! 수하가 외치는 소리에 기사단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 * *
“빌어먹을! 더럽게 아프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헤이든이 한바탕 욕설을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너무 아파서 연기고 뭐고 아무 생각이 없는 게 틀림없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을 처음 접한 시녀들은 어깨를 움찔 떨며 서로 흔들리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델라크 가문에서 그녀를 보필하기 위해 따라와 지금은 시녀장이 된 린다만이 평상시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그러게, 출산은 힘든 거라고 미리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시더니. 린다가 쯔쯧, 혀를 차는 소리에 헤이든이 울컥해서 외쳤다.
“젠장! 그 힘든 게 검에 찔린 것보다 더 아픈 건지 누가 알았겠느냐고!”
그녀의 목소리가 왕궁 복도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던 탓에 방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루카스의 표정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출산이 검에 찔린 것보다 더 아프다고?”
책에 그런 말은 안 적혀 있었는데. 불안하게 손톱을 깨무는 그를 보고 벤자크가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건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일 겁니다.”
검에 찔려본 경험을 가진 산모는 없을 테니까요. 벤자크가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지만 들리지 않는 듯 루카스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무래도 내가 들어가 봐야겠어.”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
여전히 벤자크의 말을 듣고 있지 않던 루카스가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를 따라 들어갈 수 없었던 벤자크는 그저 길게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어머, 전하께서!”
그를 발견한 시녀들이 놀라며 허리를 숙였다.
루카스는 그들을 못 본 사람처럼 곧장 헤이든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옆에 있겠소.”
그가 땀에 젖은 헤이든의 이마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었다.
“전하, 아파요.”
방금까지 욕설을 외치던 왕비가 순식간에 가녀린 여인이 되는 걸 목도한 시녀들이 입을 쩍 벌렸다.
“내가 미안하오, 다 내 탓이오.”
루카스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때, 극심한 진통이 몰려왔는지 헤이든이 비명을 지르며 신음했다.
“아악!”
“으아아아악!”
그런데 어째서인지 비명 소리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이를 어째! 왕비 전하께서 국왕 전하의 머리채를 잡으셨어!”
헤이든이 저도 모르게 루카스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던 탓에 방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빈 복도에 덩그러니 남아있던 벤자크는 비명 소리를 들으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제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 * *
같은 시각, 공교롭게도 샤로니아 또한 한창 진통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루하르 황실은 마즈다크 왕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아직이야?”
“뭐 들은 소식 없어?”
황궁 내의 사람들은 하루 종일 이 말을 얼마나 많이 반복했는지 모른다.
다들 샤로니아가 무사히 순산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까지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중이었다. 당연히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아 업무가 점점 밀리고 있었다.
그리고 황궁에서 가장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는 한 사람, 키언은 출산에 관한 모든 이론을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어젯밤만 해도 그녀와 함께 태어날 아이가 딸일지 아들일지 기대하며 이야기를 나누었었는데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딸이든 아들이든 상관없으니 얼른 세상 밖으로 나와 주었으면…….
샤로니아의 비명이 들릴 때마다 입술을 깨물어서 그런지 키언의 입술에 피가 살짝 맺혀 있었다.
“이제 곧 아기님 목소리가 들릴 겁니다.”
키언과 마찬가지로 얼굴이 창백해진 테오르가 중얼거렸다.
“지금 그 말 몇 번째인지 아나?”
키언이 슬쩍 눈을 흘겼다. 그도 그럴 것이 테오르가 같은 말만 벌써 몇백 번째 반복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렇다 쳐도 너는 도대체 왜 그렇게 긴장하는 건데?”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저만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요.”
테오르가 복도 반대쪽을 보며 슬쩍 턱짓했다. 거기엔 샤로니아의 긴 진통 시간을 참지 못하고 모여든 시종들과 황궁 사람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아아, 안 되겠어. 들어가 봐야겠…….”
그때, 방 안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걸음을 내딛던 키언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고, 그 자리에 모인 이들이 동시에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드디어, 드디어…….”
테오르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떨며 뚫어져라 방문을 응시했다.
곧 문이 열리고 마샤가 나왔다.
“자, 자네 지, 지금 우는 건가?”
대장부인 마샤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본 키언의 심장이 발치로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임신 기간 내내 샤로니아가 제대로 먹는 것을 보지 못했던 터라 키언은 불안한 마음을 누를 수가 없었다.
“아기님이 얼마나 예쁘시면 제 눈에서 눈물이 다 나오겠습니까? 제 평생 이토록 예쁜 아기님은 본 적이…….”
그 뒤로 마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쨌든 샤로니아가 무사하다는 말로만 이해할 뿐이었다.
키언은 비척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눈물이 나오려는지 코끝이 시큰거렸다.
“샤론…….”
오, 샤론. 나의 샤론…….
키언은 그녀의 젖은 뺨과 이마에 무작위로 입을 맞췄다. 지친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워 견딜 수 없었다.
“딸이에요. 그것도 아주 예쁜.”
샤로니아가 키언의 손에 뺨을 기대며 봄 햇살처럼 밝게 웃었다.
키언이 무슨 반응을 하기도 전에 시녀 하나가 강보에 싸인 아기를 데려왔다.
“태어나자마자 이렇게 예쁜 아기님은 처음이에요.”
아기를 보는 순간, 키언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제 머리색과 똑같은 은발에 샤로니아의 눈동자색을 그대로 물려받은 푸른 눈동자의 아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