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요망한 구원자 (98)화 (98/123)

98화

루카스는 샤로니아의 임신 사실을 아직 몰랐다. 그러니 황금 사과를 가지고 오라는 키언의 말에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키언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친절하게 그 사실을 알려 준 것이다.

뭐, 엄밀히 따지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샤로니아의 임신 사실을 알리기 위해 적은 편지를 사람 편으로 보냈으니까.

아무리 빨리 도착한다고 해도 인편으로 보낸 편지는 대엿새쯤 걸린다. 그사이에 독수리의 발목에 매달아 보낸 편지가 먼저 도착한 것일 뿐.

아무것도 모르는 루카스는 샤로니아를 생각하며 ‘왕국 내에서 황금 사과를 구할 수 있는 대로 다 구해 오너라.’라고 명령을 내렸다가, 키언을 떠올리고는 ‘지금이 얼마나 바쁜 때인 줄 알아! 어딜 오라 가라야!’라고 혼자 씩씩거렸다.

루카스의 변덕이 죽 끓듯 하든 말든 예전의 사랑스러운 왕녀님을 그리워하는 수하들은 구하기 어려운 황금 사과를 한 바구니나 구해 놓았다.

“갔다가 금방 올 거야.”

루카스가 제 보좌관인 벤자크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그 말, 꼭 지켜지길 바랍니다.”

벤자크가 별로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심드렁하게 답했다.

“내가 늦게 돌아오면 그건 내가 루하르 제국 황제를 통쾌하게 물 먹여서 더 있고 싶어진 것일 테니까 그렇게 알면 돼.”

과연 그렇게 될까요? 벤자크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자 루카스가 손가락을 흔들어 대며 버럭 소리 질렀다.

“뭐야? 그 기분 나쁜 눈썹은? 지금 눈썹이 말했어. 내 말이 안 믿어진다고!”

“눈썹은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딱딱하게 대꾸한 벤자크가 옆에 있던 헤이든에게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그의 말속에 생략된 주어가 루카스인 것을 알아차린 헤이든이 쿡쿡 웃으며 답했다.

“당연하지. 나만 믿게.”

마치 자신을 물건 주고받듯이 맡기는 이들을 보고 루카스가 뚱하게 팔짱을 꼈다.

‘어디 두고 보자!’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분노의 화살이 키언에게로 향했다.

“다녀오십시오.”

벤자크가 정중하게 인사하는 것을 본 루카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병 주고 약 주냐? 그의 심사가 꽈배기처럼 배배 꼬였다.

루카스와 헤이든이 이동 마법을 통해 루하르 제국으로 이동하고 난 뒤, 시종 하나가 들어와 말했다.

“전하께 편지가 왔습니다. 루하르 제국에서 온 편지인데요.”

“전하께서는 잠시 출타하셨으니 거기 두고 가거라.”

벤자크는 별생각 없이 지시하곤 업무를 시작했다.

샤로니아의 임신 소식을 담은 ‘그’ 편지는 이렇게 간발의 차로 묻히고 말았다.

* * *

“귀하신 몸이 왔는데, 아무도 마중을 안 나오다니 이게 말이 돼?”

루카스가 도착하자마자 화를 냈다.

그건 이동 마법으로 곧장 본궁에 도착해서 그런 거잖아요. 헤이든이 쯧, 한번 혀를 찬 뒤에 말했다.

“전하, 마음이 그렇게 안 풀리시면 제가 기회를 봐서 패 드릴 테니, 전하께서는 일단 체통을 지키세요.”

응? 누구를? 황제를 패겠다고? 루카스의 눈동자가 잠시 떨리더니 그제야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해졌는지 크흠, 낮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역시 사람은 극한에 몰려야 제정신이 드는 법이다.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한들 자기 아내가 황제를 쥐어 패는 걸 보고 싶진 않겠지. 헤이든은 입가에 슬며시 올라온 웃음을 눌러 참았다.

그들을 본 시종이 벌써 키언에게 소식을 전했는지 본궁에 들어서기도 전 시끄러운 발소리가 우르르, 들려왔다.

“왜 아무도 나가보지 않은 거야? 내가 나가 보기 전에 누구라도 먼저 나가서 맞이했어야지!”

키언의 목소리를 들은 루카스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뭐지? 내가 오해했나? 황제가 날 이렇게 극진하게 생각할 줄은 몰랐는데? 배배 꼬였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건 키언의 뒷말을 듣자마자 도로 원점이 되었다. 아니, 이제는 풀 방법이 없을 정도로 완전히 꼬이고 말았다.

“……아주 귀한 사과이시다. 조그마한 흠집도 용납할 수 없으니 극진히 모셔.”

뭐야? 내가 아니라 귀한 사과를 영접하러 나온 거였냐?

루카스가 눈썹을 꿈틀거리다가 사과 바구니에 다가서는 시종들을 보고 입매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휘이이잉―. 그가 일으킨 바람이 사과 바구니를 하늘로 높이 띄웠다.

줄곧 황금 사과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키언이 그제야 루카스와 눈을 마주쳤다.

“이제야 내가 보이나 보지?”

“꼭 이렇게 해야 했나?”

마주친 두 남자의 시선에서 파지직, 불꽃이 튀었다.

“얌체.”

“좀생이.”

거침없는 단어 선택에 주변에 늘어서 있던 시종들이 입을 쩍 벌렸다.

그래도 그중에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키언이었다. 어쨌든 사정을 모르는 루카스보다, 아쉬운 쪽은 키언이었으니까.

“일단 샤론을 만나 봐. 그러면 내가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될 테니까.”

“흥, 이건 내가 전달하지.”

루카스는 키언이 한 수 접고 먼저 말을 건넸기에 못 이기는 척하며 고갯짓을 까딱했다.

“뭐, 그걸 원한다면야.”

키언은 여전히 하늘 높은 곳에 떠 있는 사과 바구니를 흘끔 올려다본 뒤에 대답했다.

제기랄. 소리 없는 뒷말이 덧붙었다.

키언의 입술이 욕설로 달싹이는 것을 본 헤이든이 참지 못하고 큭큭거리며 웃었다.

그 후, 사과 바구니를 공중에 둥실둥실 띄워서 앞세운 채 무리가 우르르 뒤따르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살다 살다 이런 해괴한 꼴은 처음 보는군요.”

헤르몬 궁에 도착했을 때 마샤가 처음으로 내뱉은 감상은 그랬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바른말을 하고야 마는 꼬장꼬장한 성격의 시녀장 덕분에 하늘 높이 떠 있던 사과 바구니가 슬그머니 밑으로 내려왔다.

“크흠, 샤론은? 샤론은 어디 있지?”

제 모습이 남들 보기에 그렇게 멋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한 루카스가 흠흠, 헛기침을 내뱉으며 샤로니아를 찾았다.

“침실에 계십니다. 안내해 드리지요.”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서 샤로니아가 기뻐할 거라는 둥, 저게 마즈다크에서만 나는 황금 사과냐는 둥, 할 말이 얼마든지 있을 것인데 시녀장보다는 기사단장이 어울릴 것 같은 여자는 사람 무안하게 딱 할 말만 했다.

‘으휴, 이게 다 황제 네 탓이야.’

키언을 향해 눈으로 욕한 루카스가 마샤를 따라 2층에 위치한 샤로니아의 침실로 향했다.

“황후 폐하, 일어나 계신지요? 손님이 오셨습니다.”

그 딱딱하던 대장부 마샤가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조심스럽게 노크하는 장면을 본 루카스는 제 눈을 의심했다.

더군다나 일어나 있냐니? 지금은 해가 중천인데? 도통 알 수 없는 말과 행동이 가득했다.

루카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방 안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아, 손님 누구?”

“마즈다크 왕국에서 루카스 전하 내외분께서 오셨습니다.”

“정말? 얼른 모셔.”

반가운 기색의 목소리를 들으니 저절로 그리움이 퐁퐁 샘솟았다. 샤론, 역시 너도 내가 많이 보고 싶었구나!

마치 이산가족이 상봉하듯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침실에 들어서는데 어째 느낌이 이상하다?

샤로니아는 절대로 대낮에 침대에 누워 있을 성격이 아닌데? 그러고 보니 응접실로 안내한 것이 아니라 침실로 데려온 것부터가 이상했다.

더군다나 침실의 풍경도 밝고 화사한 것이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암울하고 어두워 보였다. 가령 병색이 짙은 환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그런 느낌이랄까?

루카스의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면서 추락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루카스는 고개를 붕붕 흔들며 샤로니아에게로 다가갔다.

“오랜만이야.”

그녀가 먼저 인사를 건네는데 얼굴이 무척이나 야위어 보였다.

“너! 우리 샤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결국 울컥한 루카스가 키언의 멱살을 잡았다.

“뭐, 무슨 짓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엄밀히 따지면 내 잘못이 맞지.”

키언이 어찌 된 일인지 고분고분하게 답했다. 뭔가 싸한 기분을 느낀 루카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너, 이 자식! 도대체 무슨 속셈이야! 두 눈을 부릅뜨고 힘을 주는데 샤로니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임산부 앞에서, 이게 무슨, 추태이지?”

“응? 뭐, 뭐, 뭐라고?”

너무 놀란 나머지 루카스는 제 혀를 씹을 뻔했다.

“나 임신했잖아. 편지 못 받았어?”

루카스는 당황한 나머지 키언의 멱살을 붙든 채 굳어 버렸다. 조용히 다가온 헤이든이 그의 손가락을 하나씩 펴서 키언을 놓아준 뒤 그의 정복에 잡힌 주름을 탁탁 펴 주었다.

“그러게, 편지를 못 받았나 봅니다.”

키언이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것을 본 루카스의 이마에 힘줄이 툭, 불거져 나왔다.

이 자식, 지금 연기하는 거지? 루카스가 울컥해서 항변하려는데 헤이든이 그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전하께서 당하셨습니다.”

윽, 확인 사살할 필요까진 없잖아. 루카스가 원망스러운 얼굴로 헤이든을 바라보자 그녀가 쿡, 웃으며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렸다.

‘지금 팰까요?’

헤이든의 극한 요법을 견디지 못한 루카스가 비틀거렸다.

“임신 사실을 모른 것 같으니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에 또 이런 일을 저질렀다간 다신 안 볼 줄 알아.”

단호한 샤로니아의 말에 루카스는 굉장히 억울해졌다. 그는 키언을 한차례 째려본 후에 샤로니아에게 다가갔다.

“난 몰랐어. 아, 모른 걸 잘했다는 건 아니고……. 이, 일단 축하해. 그런데 몸이 안 좋은 거야?”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끙끙거리는 루카스를 본 샤로니아가 설핏 웃으며 대답했다.

“입덧이 심한 것뿐이지, 괜찮아.”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데……. 루카스의 표정이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키언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제야 내 심정을 이해하겠군.”

완전히 동의가 되진 않았지만, 루카스는 이쯤에서 그를 째려보는 것을 멈췄다.

“그래, 황금 사과! 네가 먹고 싶다던 황금 사과를 가져왔어!”

루카스가 잊고 있었던 아주 중요한 것을 생각해내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게, 내 정신 좀 봐. 얼른 황금사과를 가지고 오너라.”

키언도 덩달아 시종들을 채근했다.

방금까지 원수처럼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이 언제 그랬냐는 듯 의기투합해서 시종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을 보고 샤로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곧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노란 사과가 탁자 위에 올랐다. 다른 사과에 비해 상큼한 맛이 강하고 과육이 아삭아삭한 황금 사과는 마즈다크에서만 자라는 품종이었다.

“고마워, 잘 먹을게.”

샤로니아가 해사한 웃음을 짓자 루카스도 키언도 엄청나게 감격스러운 광경을 보는 듯 얼굴이 풀어졌다.

“……그런데, 난 오랜만에 새언니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으니까, 두 사람은 자리 좀 피해 줄래요?”

응? 두 사람이라니? 그 두 사람에 설마 내가 포함되는 건 아니겠지?

루카스와 키언은 자리를 피해 달라는 두 사람에 자신이 포함될 리 없다며 다른 사람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설마, 나?”

“나 말이오?”

루카스와 키언이 동시에 자기 자신을 가리키자 샤로니아와 헤이든이 참지 못하고 쿡, 웃음을 터트렸다.

“맞아요, 잘 아시는군요.”

그녀가 아예 보란 듯이 헤이든에게 팔짱을 끼고 손을 흔들었기에 루카스와 키언은 방 밖으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이게 진짜일 리 없어…….

황망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가는데 헤이든이 아주 상큼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허어어어, 젠장.

뭐지? 뭐가 이렇게 부럽지?

달칵, 그들은 닫힌 침실 문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서로 눈이 마주치고 흠칫 놀라 어깨를 떨었다.

둘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맴돌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