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학교와 고아원의 공식적인 개원을 알리는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그동안 뒤에서 수군거리던 많은 귀족이 파티로 몰려들었다. 보나 마나 파티보다 신전의 멸망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클 테지만 말이다.
신전의 타락에 일조했던 귀족들은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먹잇감을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래도 제국에서 종교 자체를 박해하려는 건 아닌지 물의 여신상을 세웠다고 한다.
그 위용이 엄청나다고 벌써부터 소문이 파다했기에 물의 여신상을 보기 위해 많은 인파가 몰렸다.
“어머, 생각보다 더 대단하네요.”
“분수가 정말 장관이에요. 여름에 보면 더 좋을 것 같네요.”
여신상을 보며 감탄하던 귀부인들은 곧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저 여신상 얼굴이 어쩐지 눈에 많이 익는데? 그렇지 않나요?”
“그러게요. 어디서 봤더라?”
마침 그 주변을 지나고 있던 샤로니아는 슬쩍 부채를 꺼내 얼굴을 가렸다.
“오, 지금 당신 얼굴을 마법으로 영구 보존하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되겠소?”
키언이 샤로니아의 귀에다 대고 낮게 속삭였다. 그녀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부채 뒤로 감추는 모습은 여간해서는 구경하기 힘든 진귀한 장면이었으니까.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요? 샤로니아의 눈꼬리가 뾰족해지자 키언은 웃음을 참으며 입을 다물었다.
겨우 여신상 앞을 벗어나 얼굴을 가린 부채를 내릴 수 있게 되었을 때였다.
맞은편에 루카스와 헤이든이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오빠!”
샤로니아가 손짓하자 그녀를 알아본 두 사람이 웃으며 다가왔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헤이든이 퍽 어울리지 않은 모습으로 무릎을 굽히며 인사했다. 드레스 차림의 그녀가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한데 아직도 적응이 안 될 때가 있다.
“결혼 준비는 잘 되어가요?”
바보 오빠가 청혼은 제대로 해냈나 보다. 결혼식 준비를 한다고 시끄러운 걸 보면 말이다.
“그럼, 당연하지. 결혼식을 마치면 마즈다크 왕국으로 넘어가기로 했어.”
루카스가 자부심 넘치는 얼굴로 자랑하듯 말했다.
그동안 마즈다크 왕국 재건을 위해 애써왔던 모든 일이 결실을 맺을 때가 되었다는 게 무척 뿌듯해 보였다.
“잘 되었네. 그래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가문에서 반대하진 않았어요?”
샤로니아가 헤이든을 향해 묻자 그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뭐, 저희 가문에서 저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사랑의 힘은 모든 걸 가능케 하죠.”
그녀의 등 뒤로 장엄하고 웅장한 배경 음악이 울리는 것 같은 건 착각인 걸까.
“안 봐도 훤하네. 보나 마나 다 뒤집어엎었겠지.”
뒤에 가만히 서 있던 키언이 불쑥 끼어들었다.
“뒤집어엎! ……다니요. 그럴 리가 있겠어요? 오호호호.”
헤이든이 예전의 성질대로 울컥하다가 부자연스럽게 뒷말을 마무리했다. 아무래도 이제는 마즈다크 왕국의 안주인으로서 행동거지에 신경을 쓰기로 한 것 같았다.
샤로니아가 그런 헤이든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보낸 뒤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헤이든이 뭘 해도 사랑스럽다는 듯 두 눈이 하트로 변해 있었다.
‘내가 못 살아…….’
샤로니아는 그 충격적인 장면에 이마를 짚었다.
바보 오빠는 이제 눈 뜨고 못 봐 줄 정도로 더욱 바보가 되어 버렸다.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샤로니아는 그래도 끝까지를 예의를 지키며 헤이든의 손을 꼭 잡아준 뒤 그 자리를 벗어났다.
오빠가 행복해 보이는 것은 좋았지만 또 팔불출이 된 건 보기가 안 좋고,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난감하다.
“내가 결혼할 때, 오빠도 이런 마음이었을까요?”
샤로니아의 목소리에 힘이 없는 것을 알아챈 키언은 설핏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 제게 팔짱을 끼웠다.
“아마 더하지 않았을까?”
자신이 뒤에서 그의 염장을 질러 댔으니까. 하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서 그는 제 팔 위에 올려진 그녀의 손을 토닥거렸다.
“오! 황제 폐하, 여기에 계셨습니까? 황후 폐하께서도 함께 계시네요.”
말 많고 탈 많기로 유명한 베른 후작에게 딱 걸렸다. 아마도 신전에 관련된 뒷이야기를 캐려고 벼르고 있었겠지.
“후작, 오랜만입니다.”
키언은 웃으며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이럴 때 보면 그는 영락없는 황제이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남자가 갑자기 위엄 있는 황제로 돌변하는 모습의 간극을 지켜보는 것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샤로니아가 저도 모르게 픽 웃는 것을 본 키언은 아무도 모르게 그녀의 허리를 쿡 찔렀다.
“아, 흠, 베른 후작, 만나서 반가워요.”
그제야 샤로니아도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베른 후작은 입에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주제를 요리조리 바꿔가며 키언과 샤로니아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마도 테오르가 구하러 와 주지 않았다면 날이 샐 때까지 붙잡혀 있을지도 몰랐다.
“폐하!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인제 그만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베른 후작, 이만 실례하겠소.”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베른 후작.”
키언과 샤로니아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둘러 인사를 건넨 뒤 돌아섰다.
“왜 이렇게 늦었어?”
키언이 마치 복화술처럼 낮은 목소리를 내며 테오르에게 으르렁거렸다.
“저는 당연히 시간에 맞춰 왔죠.”
누가 ‘그’ 베른 후작에게 붙잡혀 있을 줄 알았나요. 테오르가 꿍얼거리는 소리에 샤로니아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구하러 와 줘서 고마워요.”
역시 황후 폐하는 천사세요. 테오르가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자 키언이 둘 사이에 끼어들며 눈을 부라렸다.
저 표정, 저 눈빛은 분명 아직도 안 풀린 거다. 일전에 그가 샤로니아의 잠옷 차림을 본 것에 대해서 말이다.
‘와, 씨, 뒤끝 좀 봐라.’
테오르는 겉으로 내색은 못 하고 속으로 키언의 욕을 잔뜩 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사람들이 모여 있는 물의 여신상 앞에 도착했다.
해가 질 때쯤 이곳에서 불꽃놀이를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던 탓에 파티에 참여한 대부분의 사람이 다 이곳으로 나와 있었다.
“준비는 다 된 것인가?”
“예? 예, 그럼요. 망할 놈의 불꽃놀이가……! 아, 아닙니다. 준비되었으니 시작하시면 됩니다.”
속으로 계속 욕을 중얼거리고 있었던 테오르는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을 수습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눈썹을 꿈틀거리던 키언은 그를 한번 노려본 뒤에 사람들 앞으로 나섰다.
“친애하는 루하르 제국의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 이렇게 황실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해 주시기 위해 발걸음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부패와 타락의 온상이었던 신전은 이제 황실의 부속 기관으로서 다음 세대의 인재를 길러 내는 학교와 고아원으로 새롭게 탈바꿈하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은 모두 그 사실에 동조하시고 많은 격려와 후원을 아끼지 않으실 것으로 믿습니다. 그럼, 인사말은 여기서 줄이도록 하죠. 헤밍턴 공작 노부인의 눈빛이 강렬해서 더 이상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지루한 것을 질색하는 꼬장꼬장한 노부인의 성품을 잘 알았던 사람들이 키언의 말에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자, 그럼 이제 준비된 불꽃놀이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키언의 말이 끝나자 시종들이 일제히 샴페인이 담긴 잔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키언이 잔을 높게 치켜들고 외쳤다.
“루하르 제국의 무궁한 발전과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하여, 건배!”
“건배!”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일제히 한목소리로 건배를 외치며 샴페인 잔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하늘 위로 오색찬란한 불꽃이 펑펑 터지기 시작했다.
키언은 아직 마시지 않은 잔을 들고 샤로니아에게 걸어와 챙, 소리가 나도록 그녀의 잔에 부딪혔다.
“아름답네요.”
샤로니아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떻소? 복수를 끝낸 소감이?”
키언이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물었다.
“글쎄요…….”
순식간에 복잡해진 눈빛이 어두워진 하늘 위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불꽃을 좇다가 키언에게로 돌아왔다.
“복수를 끝내면 엄청 후련하고 행복할 줄 알았는데 말이죠…….”
그녀가 불꽃이 어룽져 반짝거리는 키언의 황금색 눈동자를 가만히 올려다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찌 된 일인지 지금은 폐하 곁에 있어서 행복하단 생각이 드네요.”
수많은 감정을 담은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맺혔다. 눈물겹도록 처연하면서도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미소는 신성해 보이기까지 했다.
“우리, 몰래 빠져나갈까?”
무슨 마음을 먹은 건지 키언이 샤로니아의 귓가에 속삭이며 눈짓했다.
정말 못 말려. 피식, 웃고 난 샤로니아가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펴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사람들이 불꽃놀이에 온통 정신을 빼앗긴 사이를 틈타 조용히 파티장을 벗어났다.
파티에서 할 몫은 다했으니 상관없을 거다. 어차피 밤늦게까지 이어질 파티이니 알아서들 잘 놀다 돌아가겠지.
숨겨진 낡은 분수대까지 단숨에 달려온 두 사람은 차오른 숨을 내뱉으며 분수대에 걸터앉았다.
헉헉, 숨을 내뱉을 때마다 하얀 입김이 공중에 피어올랐다가 흩어졌다.
“이렇게 뛰어오지 않아도 됐잖아요?”
샤로니아가 가쁜 숨을 고르며 의뭉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하하하, 따라붙는 놈들을 따돌리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그만.”
키언이 호탕하게 웃으며 해명하는데 어쩐지 신나 보였다. 그렇다고 황제의 그림자들이 자신들을 못 찾아내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폐하는 가끔 개구쟁이 같아요.”
샤로니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를 따라 픽 웃었다.
저 멀리 신전 쪽 하늘 위로 불꽃이 터지는 것이 보였다. 방금까지 북적대던 인파 사이에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위가 고요했다.
하얗게 퍼지는 입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키언이 겉옷을 벗어 샤로니아의 어깨를 감쌌다.
“아, 괜찮아요. 별로 안 추운데…….”
숄을 두르고 있었던 샤로니아는 키언에게 옷을 돌려주려고 했다. 그녀가 어깨 위에 걸친 옷을 주섬주섬 벗으려고 하자 키언이 벗지 못하게 제 옷을 꽉 붙들었다.
“호의를 무시하다니 섭섭합니다.”
정중한 말투와는 상반되게 그는 단추까지 꼭꼭 잠가 샤로니아를 꼼짝 못 하게 했다.
“이게 뭐예요.”
그의 옷에 꽁꽁 싸매어진 샤로니아가 불만을 토로하자 키언이 웃으며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다 큰 계획이 있어서 하는 일이오.”
그가 싱긋 웃자 ‘정말 못 당하겠네.’ 중얼거린 샤로니아가 그의 입술에 촉, 입을 맞췄다.
그녀에게 기습적으로 입맞춤을 당한 키언이 잠시 눈이 커졌다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아, 어쩌지? 샤론, 당신을 너무 사랑해.”
뜬금없는 사랑 고백에 샤로니아도 웃음이 터졌다.
행복한 웃음소리가 한바탕 수그러든 후에 둘은 서로 어깨를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불꽃놀이가 다 끝났는지 하늘에 번쩍거리는 것들이 사라져 있었다.
“봄이 오면 꽃을 심고 싶어요.”
“너무 멀리는 아니어도 여행을 다녀옵시다.”
그들은 어느새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나둘씩 말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침대에서 뒹굴며 통속 소설을 읽고 싶어요.”
“소설 속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보다는 짐이 낫지 않소? 그런 의미에서 소설 말고 하루 종일 짐을 보고 있으면 되겠군.”
“뭐라고요?”
뻔뻔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키언 때문에 샤로니아는 어후, 질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그에게 붙잡혔다. 손만 뻗어도 잡히는 헐렁한 그의 옷이 문제였다.
키언은 그녀를 붙잡아다 다시 뺨이며 콧잔등이며 이마로 쪽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곤 씨익 웃었다.
“자, 인정할 건 인정합시다. 짐만큼 멋있는 사람은 찾기 힘들걸?”
인정하지 않으면 또다시 키스를 퍼부을 기세였기에 샤로니아는 항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인정.”
폐하만큼 얼굴 두꺼운 사람도 없을 거라는 것도 인정!
그녀가 뒷말은 소리 내어 말하지 않고 그저 웃고만 있었기에 키언은 예쁘게 휘어지는 푸른 눈동자에 홀린 듯이 다가와 곧 깊고 진한 입맞춤을 시작했다.
코끝을 얼리는 차가운 날씨도 둘만의 시간을 방해하진 못했다.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그런 밤이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