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요망한 구원자 (94)화 (94/123)

94화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가장 성결하고 깨끗해야 할 신전은 온갖 더럽고 추악한 민낯이 완전히 까발려져 유지할 명분을 잃었다.

그리고 샤로니아가 원한 대로 학교와 고아원을 세우기 위한 대대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뚝딱뚝딱, 쉼 없이 반복되는 공사 소음이 시끄럽지도 않은지 샤로니아는 매일 신전 부지를 방문했다.

“황후 폐하, 오셨습니까?”

공사 현장의 감독을 맡은 바먼트가 샤로니아를 향해 깍듯이 예를 갖춰 인사했다.

“하루 사이에 공사가 많이 진척되어 보이네.”

샤로니아가 학교로 개조 중인 신전 내부 천장과 벽을 둘러보며 말했다.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황후 폐하께서 이렇게 매일 감독을 나오시는데 손을 놀릴 수가 없습죠.”

바먼트의 유쾌한 목소리에 샤로니아가 피식 웃었다.

“그 말은 듣기에 따라서 내가 악덕 고용주 같기도 하지만……. 뭐, 칭찬으로 듣겠네.”

“악덕 고용주라니요? 세상에 천벌 받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진짜 악덕 고용주를 못 만나 보셔서 그런 말이 나오시는 겁니다. 악덕 고용주라면 황후 폐하보다는…… 크흠, 하하하하!”

잠깐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린 게 분명한 바먼트가 어물거리며 뒷말을 웃음으로 무마시켰다.

그가 말하려던 이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차린 샤로니아는 굳이 그것을 지적하지 않은 채 그를 격려했다.

“그래, 고생스럽더라도 꼼꼼하게 잘 마무리해 주게.”

“예, 그럼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믿음직한 바먼트를 뒤로한 채 샤로니아가 신전 건물을 나올 때였다.

“황후 폐하, 저것 좀 보세요.”

그녀와 동행했던 엘런이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그것은 일전에 키언이 신전 앞에 세우겠다고 말했던 물의 여신상이었다.

“제 느낌이 잘못된 거…… 아니죠?”

엘런이 조심스럽게 말하며 물의 여신상과 샤로니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게. 잘못된 건 아닌 거 같아.”

샤로니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냐하면 완공을 거의 앞두고 있는 물의 여신상은 공교롭게도 샤로니아와 완전히 판박이였으니까.

여신상을 세우겠다고 말할 때의 키언의 표정을 떠올린 샤로니아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가 웬일로 여신상 세우는 일에 적극적인가 했더니 이런 꿍꿍이가 있었을 줄이야.

더군다나 아까 바먼트가 지칭한 악덕 고용주는 키언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제는 이게 잘못되었다, 오늘은 저게 잘못되었다, 깐깐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신전 공사를 관리 감독하고 있었으니까.

그가 공사 내용에 대한 보고서를 날마다 작성하여 올리라고 명한 까닭에 바먼트는 매일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의중으로 이러시는지……. 폐하를 만나 봐야겠다.”

물의 여신상을 흘끔 올려다본 샤로니아가 결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 *

“안 그래도 보고 싶었는데 잘 왔습니다.”

본궁의 집무실에 들린 샤로니아를 키언이 웃으며 맞이했다.

거대한 물의 여신상을 자신의 얼굴로 제작하도록 지시한 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여상한 태도에 샤로니아는 한쪽 눈썹을 쓱, 들어 올렸다.

“차를 내오거라.”

시종에게 손짓을 한 키언이 매끄러운 동작으로 샤로니아의 의자를 빼 주었다.

일단 그가 빼 준 의자에 앉은 샤로니아는 관찰하듯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이쿠, 우리 황후께서 한낮에 이렇게 뜨거운 유혹의 눈길을 보내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녀의 눈길을 멋대로 해석한 키언이 능글능글 웃으며 말했다.

“제가 뭐 때문에 왔는지 아시면서 농담이 잘도 나오시는군요.”

샤로니아가 삐딱하게 대답하자 키언이 꾹 누르던 웃음을 참지 못하고 쿡, 웃음을 터트렸다.

“글쎄? 난 황후께서도 내가 보고 싶어서 온 줄로 알았는데?”

황금색 눈동자가 장난기를 가득 머금고 휘어지는 것을 본 샤로니아는 그의 표정이 몹시도 보기 좋다는,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곤 미간을 찌푸렸다.

“물의 여신상을 보았습니다.”

그가 알아서 설명해 주지 않으니 자신이 먼저 설명을 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이쯤에서 시종이 차를 내왔기에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샤로니아는 키언이 제 말뜻을 알아듣고 뭔가 설명을 해 줄 것이라 여기며 향긋한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걸 봤소? 안 그래도 거의 완공이 다 되었다는 소식을 들어서 나도 이제 막 가 보려던 참이었는데.”

키언이 물의 여신상을 보지 못한 아쉬움에 대해 말하자 샤로니아는 헛숨을 내뱉으며 황당함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오, 샤론. 그대 표정을 보니 여신상이 뭔가 미흡한 게 틀림없어.”

키언이 당장이라도 현장에 뛰어나갈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이며 말했다.

“폐하, 그거 아니거든요.”

샤로니아가 인내심을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일단 그를 말렸다.

거의 3미터에 육박하는 거대한 신상은 물의 여신답게 분수대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분수대도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최고급 대리석에 화려한 조각을 새겨 넣어 제국 내에서 단연코 최고라고 칭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런 엄청난 조형물이 미흡하다니? 만일 이 발언을 다른 이들 앞에서 했다간 최고의 장인들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시위하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물의 여신상이 어째서 제 얼굴과 똑같은지 설명을 해 주셔야겠어요.” 

샤로니아는 결국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말았다.

“응? 어째서라니?”

하지만 그녀가 생각한 것과 정반대의 반응이 돌아왔다.

키언은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일 물의 여신을 형상화한다면 당신을 닮을 수밖에 없지 않겠소?”

그는 도리어 질문해서 샤로니아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런가? 물의 여신은 날 닮았나? 이런 고민을 아주 진지하게 할 정도로.

“제국민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할 것 같은데?”

도대체 그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에 찬 생각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 모르겠다.

샤로니아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완공이 거의 다 되어가는 마당에 더 이상 뭘 어떻게 할까 싶기도 했다.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완벽히 동의할 순 없지만, 뭐, 지금 와서 여신상을 뜯어고칠 수도 없으니…… 알겠어요.”

그녀가 체념하듯 수긍하자 키언의 입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샤론, 난 그대의 아름다움을 누구든 알았으면 좋겠어.”

그가 샤로니아의 손을 끌어다가 손가락 마디마다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제가 아니라, 물의 여신입니다만……?”

그 와중에 샤로니아가 잘못된 말을 정정해 주자 키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럼, 그럼, 당연히 물의 여신이지.”

크흠, 고개를 살짝 돌리며 턱을 쓰다듬는 키언을 보고 샤로니아는 결국 소리 내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를 누가 말리겠어.

* * *

시간이 흘러 신전 공사의 마감일이 다가왔다.

신전의 몰락에 집중되었던 세간의 이목은 이제 신전의 리모델링과 그 쓰임으로 옮겨가 있었다.

“성대한 파티를 준비해야겠소.”

일을 끝내고 샤로니아의 침실에 들어오던 키언이 말했다.

그가 말한 파티가 신전 공사와 관련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샤로니아가 미소 지었다.

“안 그래도 폐하께 상의드릴 참이었어요.”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에 꽃과 리본 등 다양한 장식품 도안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것을 본 키언이 이심전심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황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사는 파티로 시작해서 파티로 끝나는 것이 정석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까칠하고 예민하던 황제가 언제 이렇게 다정하고 온순한 사람이 되었을까. 잠시 생각하던 샤로니아가 키언에게 다가가 그의 정복 단추 푸는 것을 도왔다.

“응? 오자마자 곧바로……?”

키언이 조금 놀란 듯이 하는 말에 샤로니아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도대체 폐하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어있으신 거예요?”

“잘 알면서.”

그가 샤로니아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깊게 키스했다.

짜르르 울리는 쾌감이 한차례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뭐, 자신도 그와 별반 다르진 않은 것 같으니까.

크흠, 샤로니아가 살짝 뺨을 붉히며 그의 겉옷을 벗겨 냈다.

“아직은 너무 이르잖아요. 그리고 우리는 할 일이 있어요.”

“응? 내가 모르는 할 일이 있었소?”

그가 아쉬움이 묻어나는 얼굴로 샤로니아를 놓아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파티를 열기 전에 춤 연습을 좀 해 둬야겠어요.”

“당신에게 밟히는 게 더 짜릿한…….”

샤로니아가 눈을 흘기자 키언이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좋습니다. 내가 오늘 밤 제대로 가르쳐드리지.”

키언이 자신만 믿으라며 가슴을 두드렸다.

잠시 후, 아무도 없는 넓은 응접실에 마주 선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자마자 쿡, 웃고 말았다.

정식 파티가 아니라 연습이다 보니 서로의 복장이 너무 방만한 게 우스웠던 탓이었다.

풀어헤친 셔츠 차림의 키언이나 장식이 거의 없는 한 겹짜리 얇은 실내복을 입은 샤로니아의 모습을 봐서는 도무지 화려한 파티를 떠올릴 수 없었다.

“자, 고혹적인 레이디. 제게 손을…….”

키언이 눈매를 부드럽게 휘어 웃으며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오, 섹시한 신사분이 춤을 신청하시니 거절할 수가 없군요.”

꽤 낯간지러운 수식어를 일상 용어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한 두 사람은 춤을 시작하기 전 준비 자세를 하고 섰다.

경쾌한 왈츠가 흘러나오자 키언이 코끝을 찡그렸다.

“다른 곡은 없나?”

“어떤 곡이요?”

샤로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일반적인 파티에서 주로 많이 연주되는 곡은 경쾌한 왈츠였으니까.

하지만 사심이 가득한 그의 눈빛을 보니 아마도 경쾌한 음악보다는 아주 끈적거리고 질척한 음악을 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뭐, 일단은 그대의 배움의 열정을 높이 사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야 하니, 이 곡으로 합시다.”

뭔가 굉장히 많이 양보한 것처럼 턱을 살짝 치켜든 그가 빙긋 웃으며 춤을 시작했다.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에 잠시 홀렸던 샤로니아는 몇 발짝 내딛지 못하고 그의 발을 밟고 말았다.

“아, 죄송해요.”

다른 사람과 출 때는 거의 발을 밟는 일이 없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키언과 춤을 출 때면 자주 그의 발을 밟게 된다.

하지만 그는 아픈 내색도 없이 오히려 즐거운 듯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그녀를 이끌었다.

빙글, 턴을 한 후에 그가 다시 허리를 받치는데 그 느낌이 참으로 묘했다.

손끝에 절묘하게 분배된 힘이 제 허리를 지그시 누르는 느낌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묘했다. 아니, 야릇하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려나.

잠깐 다른 생각에 빠졌던 탓에 또다시 그의 발을 밟고 말았다.

“아……!”

샤로니아가 침음을 흘렸다. 괜스레 자책하는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이토록 몸치인 줄은 몰랐으니까.

그녀의 표정이 무너지는 것을 본 키언이 참지 못하고 큭큭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마세요. 저는 지금 심각하단 말이에요.”

샤로니아가 불퉁하게 말하며 볼을 부풀렸다.

손가락으로 그 볼을 쿡 찔러 바람을 뺀 키언이 춤추는 것을 멈추고 그녀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대는 아무 잘못이 없소.”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키언의 얼굴을 바라보았더니 그가 촉, 입을 맞추었다.

“내가 의도한 대로 반응하는 그대의 몸이 잘못이지.”

그가 매끄럽게 웃으며 그녀의 팔을 들어 올려 한 바퀴 턴을 시켰다.

제 손을 맞잡은 그의 손도, 허리를 감싸는 그의 손도 느낌이 몹시 야릇했다.

“의도, 하셨다고요?”

샤로니아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묻자 키언은 불붙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속살거렸다.

“다르게 말하면 본능이랄까.”

뭐래, 이 남자가! 샤로니아가 그의 가슴팍을 툭, 때렸다.

하지만 이제껏 그와 춤췄던 때를 떠올려보면 묘하게 납득이 갔다. 그래서 자주 평정심을 잃게 되었구나, 그래서 자꾸만 그의 발을 밟게 되었구나, 하고 말이다.

샤로니아가 수긍하는 기색을 보이자 키언은 쿡쿡 웃으며 음악을 바꾸었다.

어느새 그가 원했던 아주 끈적하고 질척한 음악이 재생되었다.

“연습을 많이 한다고 해서 효과를 볼 것 같지 않기에.”

그는 제 행동에 대해 담백하게 설명을 덧붙인 뒤에 그녀의 몸을 욕심껏 제게 밀착시켰다.

피식, 웃고 난 샤로니아가 포기한 듯 키언의 등 뒤로 두 팔을 둘렀다.

그들은 끈적한 음악에 맞추어 서로의 몸에 기댄 채 블루스를 추었다.

야릇함이 도를 넘어섰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샤로니아는 블루스를 추는 동안에는 키언의 발을 한 번도 밟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