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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망한 구원자 (93)화 (93/123)

93화

“벤자크! 벤자크!”

루카스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정신없이 그의 심복의 이름을 불러댔다.

이토록 애타게 제 이름을 부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벤자크는 뭔가 불길하다고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

“예, 저하. 벤자크 여기 있습니다.”

마물이 들끓는 오지에 가서 거의 일주일 만에 돌아온 제 주군은 몰골도 형편없었지만, 정신 상태는 더 형편없어 보였다.

“반지! 반지는?”

“네?”

지금 뭐라고 물으신 거지? 내 귀가 잘못되었나? 벤자크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확인차 되물었다.

“내가 부탁한 반지 말이야! 설마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 아니겠지?”

루카스가 책상을 두 손으로 쾅, 내려치니 그의 머리 위에 쌓여 있던 먼지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저하, 제발 고정하십시오. 제가 보기엔 반지가 먼저가 아니라 저하의 신변을 돌보는 게 우선일 것 같습니다만…….”

“제기랄, 내가 아무리 월급을 적게 주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불성실하게 놀고먹는 건 아니지.”

루카스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벤자크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월급을 적게 주는 걸 알긴 아시니 다행입니다.”

마즈다크 왕실에 대한 신의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때려치웠을 겁니다. 벤자크가 구시렁거리며 서랍에서 무언가 꺼내 책상 위에 탁, 소리가 나게 올려놓았다.

“이거 말씀이십니까?”

그가 내민 것은 한눈에 보기에도 딱 반지 케이스였다.

“오, 벤자크! 너는 나의 충성스러운 심복이야!”

바로 말을 바꾸는 루카스 때문에 벤자크의 이마에 힘줄이 툭, 불거져 나왔다.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벤자크의 표정이 어떻든, 그의 입이 댓 발은 튀어나왔든 상관없이 루카스의 시선은 반지 케이스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주문한 반지를 실물로 영접하는 것뿐이건만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루카스는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반지 케이스를 열었다.

커다란 백색 다이아몬드를 중심으로 해서 희귀한 레드 다이아몬드를 주변에 촘촘히 박아 넣은 반지가 영롱한 빛을 발했다.

“오오, 벤자크. 수고했어.”

반지에 대해서 잘 모르는 그가 보아도 엄청나게 귀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백색 다이아몬드와 환상적으로 어울리는 백금의 정교한 세공에 절로 감탄이 튀어나왔다.

루카스가 반지를 정신없이 이리저리 불빛에 비춰 보며 미소 지을 때였다.

“그런데 어떻게 청혼할 생각이십니까?”

벤자크가 불쑥 물은 질문에 루카스가 일순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응? 어떻게, 라니?”

“설마 그냥 반지만 전해 주면 다 끝난다고 생각하신 건 아니겠죠?”

“글쎄, 아직 반지밖에 생각을 안 해 봐서…….”

뭘 더 해야 하나? 루카스의 중얼거림을 들은 벤자크가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두드렸다.

“어휴, 이럴 줄 알았습니다!”

청혼도 문제지만 상대방은 델라크 백작, 한 가문의 가주이다. 귀족의 복잡한 결혼 절차를 떠올린 벤자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쥐꼬리만 한 월급에 때려치우고 싶을 정도로 과도하게 일하고 있는데 이런 일까지 떠맡아야 한다니.

‘아흑, 내 팔자야.’

왕비 전하께 받은 은혜만 없었어도 진즉에 뛰쳐나갔을 텐데. 벤자크는 심호흡을 해서 마음을 가라앉힌 뒤 냉정하게 물었다.

“청혼서는 쓰셨습니까?”

“아니.”

“지참금으로 줄 만한 건요?”

“이거…….”

“반지 말고요.”

마음을 가라앉힌 지 1분 만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 벤자크가 결국 반지 케이스를 탁, 닫고 비장하게 말했다.

“저하, 마음을 단단히 먹으세요. 결혼은 결코 쉬운 게 아닙니다.”

벤자크가 하도 결연하게 말했던 터라 루카스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아, 망한 왕국의 왕자는 결혼도 가시밭길인 거야? 젠장!

가진 모든 재산을 반지에 쏟아부었던 루카스의 눈동자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 * *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하세요?”

차를 마시는 내내 샤로니아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자 엘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렇게 답한 샤로니아가 다시 생각에 잠기자 엘런은 그녀를 혼자 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물러나려고 했다.

“엘런도 고아원 출신이야?”

갑작스러운 샤로니아의 질문에 뒷걸음질 치던 엘런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아, 네. 저는 고아원에 버려진 아이예요.”

엘런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얼굴도 모르는 부모를 떠올리는 건 이미 무감각해져서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자신이 믿고 따르는 샤로니아 앞에서 말하려니 입가에 쓴웃음이 올라왔다.

“미안, 아픈 생각을 떠올리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무, 무슨 말씀을요. 황후 폐하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닌걸요.”

루하르 제국에는 타락하고 부도덕한 종교 풍습으로 인해 버려지는 아이들이 많았다. 많은 아이가 부모의 얼굴도 모른 채 고아원에 버려졌다.

그리고 그중 다수의 아이들은 신전에 들어가 신녀나 사제가 되어 평생을 힘겹게 살아간다. 신전으로 인해 무한 반복되던 악몽 같은 굴레였다.

“신전을 어떻게 할까 고민 중이야.”

낮게 가라앉은 샤로니아의 음성에 엘런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이제야 그녀가 한 질문의 의도를 알 것 같았으니까.

“어쨌든 난 성녀이기도 하니까,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엘런은 고개를 마구 주억거렸다. 언제나 제 생각보다 훨씬 더 지혜롭고 속 깊은 그녀의 생각은 잔잔한 호수에 던진 돌처럼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괜히 울컥하는 속내를 감추기 위해 그녀는 한동안 계속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땅에 버림받아 마땅한 아이는 아무도 없어.”

마치 엘런의 생각을 꿰뚫어 본 것처럼 샤로니아가 싱긋 웃으며 뒷말을 보탰다.

부모를 잃은 고아나 버려진 아이들에게 허울 좋은 신의 이름으로 추악한 짓을 벌이던 신전은 이제 더 이상 없다.

대신 그 아이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시켜 자립할 수 있는 힘을 길러 줄 것이다. 그것은 그 아이들뿐만 아니라 제국에도 득이 될 것이다.

“뭐든 말씀만 하시면 힘껏 도울게요!”

엘런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마치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을 찾은 것처럼 그녀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샤로니아는 그런 엘런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신전은 이제 고아원과 학교로 탈바꿈하여 제국 내에 큰 영향력을 미칠 인재를 양성할 것이다. 그 미래를 그리는 샤로니아의 눈빛이 마치 새로운 사업을 구상할 때처럼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아, 맞아. 잊고 있었네. 이 시간쯤 오빠에게 들러달라고 한 것 같은데.”

“어머, 그러셨어요?”

둘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밖에서 시종 하나가 루카스의 방문을 알려왔다.

“오, 드래곤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샤로니아가 쿡,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차를 다시 내올게요.”

엘런이 물러나자마자 루카스가 격하게 반가운 기색을 하며 성큼성큼 방을 가로질러 왔다.

“샤로온.”

자신을 안으려고 양팔을 벌리고 다가오는 루카스의 얼굴을 샤로니아가 손바닥으로 꾹꾹 밀어내며 차단했다.

“너무해.”

루카스의 입술이 부루퉁하게 나왔다. 마음이 울적해서 오랜만에 그녀에게 위로 받으려 했더니 매정한 동생 같으니라고.

“너무할 일도 많네.”

샤로니아가 한마디로 상황을 일축했다.

어린 시절에는 아주 잠깐 그와의 포옹을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포옹이 그냥 포옹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제게 뺨을 비비다가 결국은 볼살을 쭉쭉 늘이고 나서야만 물러난다는 걸 깨달은 뒤로 샤로니아는 절대 루카스를 근접하지 못하게 했다.

“쓸데없는 데 힘 빼지 말고 앉아.”

샤로니아가 제 맞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루카스는 귀염성이 전혀 없게 자란 동생에게 불퉁한 심정을 알리려는 듯이 털썩, 소리 나게 자리에 앉았다.

짧게 한숨을 내쉰 샤로니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델라크 백작님께 청혼할 거야?”

루카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현재 그의 머리를 가장 복잡하게 만드는 문제에서 도망쳐서 간만에 동생과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

루카스가 대답은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샤로니아가 다시 질문했다.

“내가 반대해도 이 결혼 추진할 거야?”

“응?”

루카스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헤이든과 서로 좋은 관계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반대를 한다고?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루카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 사랑하는 동생이 반대한다면…….”

샤로니아는 루카스가 뜸을 들이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미안하지만……. 그래도 해야겠어.”

루카스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동생만을, 동생을 위한, 동생의 뜻대로가 가장 최우선이었던 그가 처음으로 내놓은 반대 의견이었다.

“좋아, 남자답네. 합격.”

샤로니아가 심각했던 표정을 풀고 싱긋 웃자, 루카스가 벙한 표정이 되었다.

“하, 합격이라니, 그럼, 너?”

“응, 오빠를 시험했어.”

허어어어, 루카스가 깊은숨을 몰아 내쉬며 마른 얼굴을 쓸어 올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샤로니아가 헤이든을 싫어하는 줄 알고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머릿속에 오만가지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리던 그는 긴장이 탁 풀려 잠시 몸을 휘청거렸다.

“그런 의미에서 잘 들어. 여자들은 오빠처럼 귀찮게 하는 걸 애정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

샤로니아가 폭풍 잔소리를 늘어놓자 루카스는 영혼이 탈탈 털린 기분이 되었다.

사랑스러운 동생과의 기분 좋은 티타임은 이제 우주 저 멀리 날아간 것처럼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에휴, 내 팔자야. 루카스가 진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말 명심해. 알겠지?”

“네, 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루카스가 세상을 초월한 사람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샤로니아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엘런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준비한 걸 가져다줘.”

“네, 황후 폐하.”

이때를 기다리던 엘런이 악동 같은 표정으로 빙긋 웃은 뒤 물러갔다.

그리고 잠시 후. 시종들이 커다란 궤를 줄줄이 들고 들어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묵직해 보이는 궤가 쿵쿵, 소리를 내며 제 앞에 놓이는 것을 본 루카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샤론, 이게 다 뭐야?”

“내 선물. 오빠를 위해 준비했어.”

루카스는 일단 샤로니아가 자신을 위해 뭔가를 준비했다는 것에 감격해서 몸을 떨었다.

저 궤 안에 쓸모없는 돌멩이가 잔뜩 들어 있다고 해도 좋았다. 어린 시절 샤로니아가 선물로 준 꽃이나 인형 따위를 마법으로 영구 보존해 놨듯이 이것도 그렇게 해야지.

루카스가 떨리는 손으로 궤 하나를 열었다.

“헉, 뭐, 뭐, 뭐야?”

궤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루카스가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궤 안에는 금화가 한가득 들어있었으니까.

창문으로 비쳐드는 햇살에 반사된 금화가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반짝 빛났다.

“황실 것에 손댄 게 아니라, 내가 떳떳하게 번 거니까 안심해도 돼.”

아니, 지금 이게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루카스가 입을 벌리고 샤로니아를 쳐다보자 그녀가 해맑게 쿡쿡 웃었다.

“그런 표정 하지 마. 마즈다크 왕국을 재건하는 것은 오빠만 짊어져야 할 과업이 아니니까.”

“샤로온…….”

루카스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고생해서 번 돈을 제게 다 넘겨주겠다는 그녀의 마음이 너무도 벅차게 다가와 꾹 참아보아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나참, 이래서는 내가 오빠를 울리는 나쁜 동생 같잖아.”

그럴 리가 없어. 너처럼 귀엽고, 사랑스럽고, 큐티 러블리한 아이가 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잖아. 이렇게 말하고 나면 울 것 같아서 루카스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샤로니아가 다가와 루카스의 등을 토닥였다.

“오빠처럼 손이 많이 가는 오빠는 아마 없을 거야.”

“그래서? 내가 귀찮아?”

“아니, ……사랑하지.”

둘은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퍽 기묘한 표정으로 서로를 응시하다가 결국 푸흣,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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