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육각별에서 뻗어 나온 금색 빛이 하데스의 온몸을 친친 감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순순히 당하고 있을 마물이 아니었다.
“크아아악!”
제 몸을 속박한 마법을 떨쳐 내려는 듯 하데스가 강하게 저항했다.
마법으로 그의 몸을 묶고 있었지만 날뛰기 시작하니 접근이 쉽지 않았다.
“하아, 이런…….”
샤로니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정석의 기운을 빌렸다고는 하나 마법은 시전자의 힘을 바탕으로 한다.
그렇기에 샤로니아가 버티지 못하고 마력을 놓아 버리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 터였다.
“폐하, 서둘러 주세요.”
샤로니아는 오랜 시간 버틸 수 없으리라 예상하며 키언이 속히 마물을 없애 주길 바랐다.
두 개의 강대한 세력이 부딪치는 자리엔 어마어마한 에너지의 충돌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뿌리가 약한 나무는 뽑혀 나갈 정도로 강한 바람이 하데스 주변에 몰아쳤다.
웬만한 인간은 근처에 가지도 못하고 실신할 정도로 강력한 기운이었다.
“폐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키언이 마물에게 다가가려 하자 부관이 그를 막아서며 말했다.
“비키거라. 다시없을 기회다.”
“하지만 폐하, 너무 위험합니다.”
충직한 부관을 한번 노려본 키언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녀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어 준 기회를 날릴 순 없었다.
“쇠사슬이든 밧줄이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마물을 결박하거라.”
그렇게 지시를 내린 키언이 건너편의 샤로니아를 살폈다.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는 것이 멀리서도 보일 정도다.
이런 젠장할. 그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검을 고쳐 잡았다.
그가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는 사이, 수하들이 마물의 목에 밧줄을 던져 걸었다.
“크아아악!”
마물이 몸을 비틀 때마다 줄을 잡은 건장한 성인 서넛이 끌려가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버텨야 했다.
저벅저벅, 마물의 정면에 선 키언은 그의 붉은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제, 끝을 내자.”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때가 왔다. 그는 전장에서 여러 번 제 목숨을 구해 주었던 검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부디, 잘 부탁한다.”
그런 뒤 그는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마물의 미간 중앙에 검을 내리꽂았다.
까강.
마치 금속을 때리는 듯한 파열음과 함께 검이 튕겨져 나갔다.
“뭐야……?”
놀란 키언이 미간을 와락 구겼다. 이러면 죽이는 게 불가능하잖아?
그는 검을 고쳐 잡은 뒤 다시 마물에게 뛰어들었다.
깡, 까앙, 검을 내리꽂을 때마다 파열음과 함께 환영이 보였다 사라졌다.
그 환영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마치 지옥 불 가운데서 내보내 달라고 아우성치는 듯한 소름 끼치는 모습이었다. 그 가운데는 키언이 아는 익숙한 얼굴도 여럿이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키언이 아연실색했다. 그 환영들은 아마도 마물의 배 속에 들어간 사람들의 얼굴일 테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마물 하나에 희생이 되었는지 끔찍함에 저절로 몸이 떨렸다.
인간의 탐욕과 욕망이 만들어낸 괴물.
‘그렇기에 더더욱 널 없애야겠다.’
그는 포기를 모르는 사람처럼 계속해서 마물을 내리치고 또 내려쳤다.
이마에 땀이 흥건할 정도 내려치길 수십 차례, 환영 중에 마구스의 얼굴이 나타났다.
“이 개자식! 네가 뭘 만들어 냈는지 알아?”
인간의 추악한 민낯을 그대로 닮은 괴물, 이 세상에 재앙을 몰고 올 원흉을 만들어놓고 그는 죽었다.
죽어서도 너는 여전히 개자식이로구나.
키언이 이를 아득, 갈며 있는 힘을 다해 검을 내리꽂았다.
구구구궁, 힘의 충돌로 인해 공간이 마구 진동했다.
“폐하, 조금만 더 힘을 내세요!”
샤로니아는 이미 한계치에 다다른 힘을 좀 더 개방했다. 그녀의 손에서 파란빛이 피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마물을 묶고 있는 육각성의 금빛 또한 진해졌다.
이 세상에 공평과 정의의 잣대가 아직 존재한다면…….
만일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내게 힘을 주소서.’
선이 악을 이길 수 있도록.
그래도 살아 볼 만한 가치 있는 인생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샤로니아의 두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맑은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구름 한 점 없이 맑던 하늘이 아무 전조 없이 비를 쏟아 내었다.
쏴아아아, 내리는 빗방울 하나하나에 샤로니아의 마력이 깃들어 미약한 빛을 흩뿌렸다.
“크아아악!”
하데스가 괴로움에 발작하듯 몸부림쳤다. 마력이 깃든 빗방울이 마물의 몸을 사정없이 찌르는 탓이었다.
기묘한 빗방울의 영향인지 키언의 검과 마물 사이의 공간에 거짓말처럼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쩌저적, 그들 사이를 갈라놓은 막에 금이 가기 시작하자 키언은 더욱 세게 밀어붙였다.
“이제 그만 끝을 맺자!”
콰지직, 푸욱, 깨진 막을 뚫고 들어간 검이 하데스의 미간에 정확히 박혔다. 하지만 거대한 기운에 휩싸인 키언은 검을 회수하지 못한 채 마물에게서 튕겨져 나갔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혀 중상을 입었을 테지만, 그는 유연하게 몸을 틀어 넘어지지 않고 착지했다.
어찌나 검을 세게 박아 넣었는지 손에 지잉, 하는 통증이 몰려왔다. 그래도 그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거친 숨을 내뱉으며 마물의 상태를 주시했다.
“끄아아아악!”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돼…….”
검이 마물의 미간에 박히며 낸 상처 사이로 빗물이 마구 흘러 들어가는 것을 보며 키언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하데스의 몸이 흘러 들어간 빗물로 인해 점점 팽창하고 있었다. 저렇게 부풀다간 곧 폭발하고 말 텐데? 마물의 기묘한 모습에 키언이 눈살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들 조심……!”
그와 동시에 팽창하던 마물이 퍼엉, 하고 폭발했다. 강철 같은 몸체와 내장까지 비위가 상한 정도로 흉측한 모습의 잔여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으악!”
“우웩!”
마물의 목에 밧줄을 걸고 버티고 있던 기사단이 오물을 뒤집어쓰고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드디어, 끝났다!
기사단은 곧 환호성을 지르며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목숨을 구해 준 동료와 감격을 나누고 겨우 앉아서 한숨을 돌리며 기사단은 빠르게 활기를 되찾았다.
키언은 마물의 잔해 속에서 제 검을 찾아들고 인상을 찌푸렸다. 수많은 전장을 함께 해 온 검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모습이 어쩐지 안쓰러웠다. 그나마 비가 내려 오물이 씻기고 있는 게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이토록 절묘한 순간에 비가 내리다니.’
잦아드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키언은 샤로니아 쪽을 응시했다.
“하아…….”
그 시각, 긴장이 풀린 샤로니아는 깊은 숨을 몰아 내쉬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길고 길었던 복수의 여정에 드디어 종지부를 찍는 날이 왔다.
그녀가 흐릿해진 초점을 바로잡으려 고개를 들고 눈을 깜박이자 언제 그랬냐는 듯 비가 그쳤다.
비가 내려 사방이 푸릇해진 호라산은 어쩐지 더 이상 저주의 산처럼 보이지 않았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까와는 달리 산의 기운 또한 맑게 정화된 느낌이었다.
이제 이곳도 생명이 약동하는 축복의 산이 되었으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등 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세요?”
헤이든이었다. 그녀는 샤로니아가 마법진을 펼칠 동안 내내 그녀를 지켜주었다.
헤이든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샤로니아는 잊었던 무언가가 떠올랐다.
“아, 오빠는, 오빠는요?”
헤이든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다들 상황이 종료되어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패잔병보다 더욱 침울했다.
“역시 그렇다면…….”
샤로니아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헤이든 또한 샤로니아의 곁에 서서 끝도 없는 아래를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역시 균열이 일어날 때, 갈라진 땅의 틈으로 떨어진 걸까. 그것이 아니고서야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질 리가 없으니 말이다.
* * *
루카스는 운이 없는 편에 속했다. 아니, 본인이 생각하기엔 지지리도 운이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 발밑의 땅만 푹 꺼질 리가 있겠나.
아비규환 속에서 저 혼자만 심연으로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마법을 쓸 겨를도 없었다.
젠장, 마법은 왜 시동어가 필요한 걸까. 추락하는 그 짧은 찰나에 마법 시동어보다 헤이든이 준 단검이 먼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런 극적인 상황에서 살기 위한 인간의 본능은 참으로 대단했다. 평상시에는 발휘되지 못하던 잠재 능력을 모조리 끌어낼 수 있었으니.
쿠콰과과곽!
더 이상 아래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단검을 깎아지른 절벽에 박아 넣는 데 성공했지만, 가속도 때문에 쉽게 멈춰 서지 않았다.
엄청난 기세로 절벽을 가르며 아래로 떨어진 루카스는 한참 만에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헉, 헉…….”
뿌연 먼지를 뒤집어쓴 채 그는 가쁜 숨을 내뱉었다.
살았다! 여전히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기적적으로 산 것에 감사해야 할 처지였다.
고개를 젖혀 위를 올려다보자 아주 까마득히 먼 곳에 파란 하늘 같은 것이 보였다.
“도대체 얼마나 추락한 거야?”
여기가 지옥이라고 해도 믿겠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투덜거렸다.
흙먼지가 가라앉자 겨우 주위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볕이 들지 않아 캄캄한 절벽은 무저갱으로 연결된 것처럼 끝도 없이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겨우 발을 디딜 만한 자리를 발견한 그는 반동을 이용해 간신히 두 발로 설 수 있게 되었다.
“자, 이제 저 위로 올라갈 궁리를 해 보자.”
그는 팔짱을 단단히 낀 채 고민했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으왓!”
지반이 약했던 터라 비가 내리자 그가 딛고 섰던 자리가 우르르, 무너졌다.
아아, 젠장! 그는 아까와 마찬가지의 방법을 사용해 재빨리 단검을 벽에 박아 넣어 추락을 막아보려 했지만 크게 소용이 없었다.
그가가가각!
그렇게 한참을 아래로 떨어진 뒤에야 다시 멈췄다. 이참에 아예 땅속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는 게 낫지 않을까. 멍하게 그런 생각을 하던 루카스는 곧 정신을 되찾고 고개를 흔들었다.
위를 올려다보자 하늘이 점처럼 작게 보였다. 후드득, 빗물이 눈과 코 속으로 사정없이 밀려들어 왔다.
“젠장! 왜 나만 갖고 그래?”
그가 울컥하는 속내를 다스리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가파른 통로가 진동하며 몇 군데에서 흙이 부스스 떨어져 내렸다.
헉, 그는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다시 추락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자, 루카스, 생각이란 걸 하란 말이야. 머리는 장식이 아니니 할 수 있겠지?’
그는 자신을 향해 신랄하게 욕을 퍼부은 뒤 위로 올라갈 생각을 짜내었다.
정말 말 그대로 온갖 마법을 다 쥐어 짜냈다. 그에게 특화된 바람과 관련된 마법은 비가 오기도 했지만, 절벽을 무너트릴 위험이 있어서 굉장히 조심해야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는 정말 말 그대로 만신창이가 되어 낑낑거리며 원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가 땅을 딛고 서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뭐, 그래, 하늘도 내 수고를 알아주는군. 괜스레 코끝이 시큰해진 그가 콧날을 슥, 문지르며 주위를 살폈다.
땅이 갈라진 건너편에서 기사단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마물은 어떻게 됐지?”
고개를 갸웃거린 루카스는 지금 상황을 제게 설명해 줄 사람을 찾아 나섰다.
때마침 샤로니아와 헤이든이 절벽 밑을 내려다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어요. 저는 인정 못 해요. 어떻게 이렇게 허망하게…….”
헤이든의 목소리에 물기가 잔뜩 배어 있었다.
“저도 믿지 못하겠어요.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 봐요.”
샤로니아가 헤이든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루카스는 그녀들이 왜 절벽 밑을 내려다보며 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저 밑에 뭐가 있나?’
루카스는 대화 내용을 짐작하기 위해 그녀들의 뒤에 서서 목을 길게 빼고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자신이 이미 경험한 바 있듯이 절벽은 끔찍할 정도로 깊었고 어두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만일, 만에 하나라도…… 잘못된 거라면 제가 용서 안 할 거예요.”
파르르 떨리는 샤로니아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그래서 루카스는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
“뭐가 잘못돼? 또 뭘 용서 안 하고?”
그러자 그녀들의 어깨가 동시에 움찔, 떨렸다.
루카스는 두 여자의 얼굴이 기묘할 정도로 동일하게 삐걱거리며 제게 향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오빠?”
“저하?”
동시에 터져 나온 말에 놀란 루카스가 눈을 껌벅였다. 그러다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들이 말하던 대상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것을.
“설마…… 내 얘길 하고 있었던 거야?”
그러자 환희와 감격을 오가던 여자들의 표정이 와락 굳어졌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죽을 만큼 걱정한 제가 바보 같아요.”
싸늘한 표정과 함께 돌아온 말이 무시무시했다. 매서운 눈빛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움찔, 몸이 떨렸다.
뭐지? 나 잘못한 건가? 어째서……?
루카스가 아직도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하고 눈을 도르르 굴렸다.
“지금 우리가 걱정하고 있는 걸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그냥, 뭘 보고 있는지 궁금해서.
“정말 너무해요!”
어째서? 죽다 살아 돌아온 건 난데?
아직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지 못한 루카스가 멍하게 있자 샤로니아와 헤이든이 씩씩거리며 가 버렸다.
왜? 내가 뭘 잘못했는데? 아직도 그런 생각의 언저리를 헤매고 있는데 키언이 다가왔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려 줄까?”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지만, 상황이 절박하다 보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네 잘못은…….”
키언은 그의 잘못은 눈치가 없는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샤로니아가 마음고생을 한 걸 생각하니 비뚜름한 심보가 샘솟았다.
“네 존재 자체가 잘못이야.”
훗, 그걸 아직도 모르다니. 자기 할 말만 하고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멀어지는 키언을 보고 루카스가 발을 쿵쿵 굴렀다.
“내가 왜? 내가 어디가 어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