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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망한 구원자 (86)화 (86/123)

86화

과연 인간은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을까.

마물의 개체 수를 인위적으로 늘리고 사육한 것은 오로지 인간의 더러운 욕망 때문이었다.

욕망의 노예가 된 인간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는커녕 점점 더 추악한 짓을 저지르게 된다.

마구스, 그는 신전의 수장인 카티르가 되어 모두를 발아래 둔 뒤, 자신을 신과 동일 선상에 놓기에 이르렀다.

인간의 몸과 영혼이 제 명령 하나에 좌지우지되는 것은 마약처럼 위험하지만, 무척이나 달콤했다. 마치 제가 신이 된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리고 그는 자신의 영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인간이 아닌 것들에게까지 손을 뻗었다.

마물이 괴물이 된 이유. 그것은 인간의 탈을 쓴 괴물에 의해서 사육되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별 하나 뜨지 않은 새카만 하늘에 그믐달 하나만이 빛을 내뿜고 있는 기이한 밤이었다.

“크크큭, 좋아, 좋아.”

사제 미카엘이 쇳소리처럼 갈라지는 목소리를 내며 웃었다. 검은 사제복에 후드를 눌러쓴 그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둠에 완벽히 동화된 모습이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엔 한눈에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마물이 있었다.

마물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빛이 어둠과 뒤섞여 무척이나 소름 끼치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없이 웃고 있었다.

“내가 너희를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키운 걸 알면 카티르께서도 기뻐하실 거다.”

그는 자부심이 가득한 눈으로 마물들을 바라보았다.

마물이 이토록 강인해진 이유는 이들에게 살육을 가르치면서부터였다.

작은 동물을 먹잇감으로 시작한 마물들은 어느덧 자신보다 덩치가 큰 동물을 사냥하더니, 종국에는 인간을 먹이로 삼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인간의 피 맛을 본 마물들은 급격히 지능적으로 변모했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서열을 만들고 무리를 지어서 사냥하기에 이르렀다.

미카엘은 그것이 자랑스러웠다. 이 땅에서 인간을 제외한 생물 중에 가장 위대한 생물을 자신의 손으로 창조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너희는 내 보물이야.”

한때 흉악범이었던 사제는 제가 낼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마물들을 칭찬했다.

카티르가 직접 이곳에 오겠다는 전언을 보냈다. 그렇다는 것은 이곳에서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질 거란 뜻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의 출셋길이 보장된다는 말이 된다.

자기 손으로 키운 이 마물들을 사용해서 황제를 없애 버린다면 카티르의 다음가는 대단한 지위는 제 것이 될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마물들은 당연히 제 보물일 수밖에.

“착하지, 이리 온.”

미카엘이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은 마물들을 키우기 위해 서슴없이 살생을 저지른 손이었다.

그는 다른 이들은 아무도 몰라도 마물들만큼은 자신의 노고를 알기에 제게 복종하는 것이라 믿었다.

마물들이 그의 손짓에 반응하며 천천히 모여들었다.

“옳지, 옳지.”

미카엘은 가장 먼저 다가온 마물의 머리를 여전히 웃는 낯으로 쓰다듬었다.

내 자랑, 내 보물, 내 전부…….

살아가면서 단 한 번도 애정이라는 것을 느껴본 적 없던 그가 처음으로 애정을 품은 존재가 이들이었다.

그가 마물들의 머리를 차례로 쓰다듬어 줄 때였다.

콰드득……!

마물 하나가 그의 손을 물었다.

“으윽, 이, 이게 무슨 짓이야!”

날카로운 이빨에 꿰뚫린 제 손을 바라보며 미카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뼈가 으스러졌는지 팔에 감각이 없었다.

“자, 장난이 너, 너무 심하잖아.”

크르르르, 심상치 않은 소리를 내는 마물들을 바라보며 미카엘은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어서 이 자리를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마물 하나가 제 한쪽 손을 물고 있었던 터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배, 배가 고파서 그래? 내, 내가 지금 당장 먹을 걸……!”

크왕, 다른 마물 하나가 그의 허벅지를 베어 물었다.

“크윽! 도대체 왜 이래? 나야! 내가 너희들 주인이라고!”

미카엘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열심히 소리 질렀다. 하지만 마물들은 마치 먹잇감을 보듯이 그를 향해 군침을 흘리며 점점 거리를 좁혀왔다.

머리털이 쭈뼛 솟아오르고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지만 미카엘은 아직도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 지, 진정해! 날 놓아주면 내가 특식을……! 으아악!”

그가 말을 다 끝맺기도 전, 마물들이 달려들어 그의 살점을 인정사정없이 물어뜯었다.

“끄어억, 제발 날 살려…….”

그는 자신이 마물의 특식이 되었음을 숨이 끊어질 때까지도 인정하지 못했다.

* * *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회의가 끝난 뒤 마을 주변에 보호 마법을 거는 샤로니아를 보고 키언이 불퉁하게 말했다.

“왠지 안심이 안 돼서 그래요.”

그녀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빛무리가 마을을 감쌌다. 달빛을 받은 투명한 결계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감탄을 뱉어 냈지만, 키언만은 더욱 못마땅한 표정이 되었다.

“그대는 좀 더 자신을 아낄 줄 알아야 해.”

“앗, 폐하?”

키언이 말도 없이 그녀를 안아 든 탓에 놀란 샤로니아가 비명을 가까스로 삼키며 그의 목에 매달렸다.

“내일도 힘겨운 하루가 될 테니, 얼른 가서 쉬도록.”

키언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기사단에게 명령을 내렸다.

“옙, 폐하!”

사이좋은 황제 부부의 모습을 보고 눈이 휘게 웃고 난 기사단원들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창피하게 이러시기예요?”

방으로 들어오자 샤로니아가 볼을 부풀리며 항변했다.

“정말 창피한 건 하지 않았습니다만.”

촉, 키언이 기습적으로 입을 맞췄다. 마치 사람들 앞에서 입 맞추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노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샤로니아의 뺨에 옅은 홍조가 떠올랐다.

그에 키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안은 채 침대에 걸터앉았다.

“샤론, 그대는 오늘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썼어.”

“한숨 푹 자고 나면 금방 말짱해질 거예요.”

샤로니아가 웃으며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단단하고 잘 짜인 몸이 제 몸을 감싸는 느낌이 좋았다. 어떤 위험과 절망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보호해줄 것처럼 안전하고 든든했으니까.

그녀가 제 몸에 착 붙어 있는 것을 내려다보던 키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런, 당신이 짐의 몸을 침대로 삼을 줄은 몰랐는데.”

그의 품 안에서 샤로니아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키언이 그녀의 칠흑 같은 흑발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헤집고 돌아다니던 손가락이 곧 머리칼을 돌돌 말았다 풀었다 하며 장난스럽게 움직였다.

“음, 침대치고는 꽤 불순하지만요.”

머리카락으로 장난을 치던 키언이 이번엔 피식 웃었다.

“가끔 불순한 침대에서 자는 것도 좋지 않습니까?”

“뭐, 심하게 불순하지만 않다면요.”

어느덧 제 등 뒤의 단추를 톡, 톡 풀어 내고 있는 키언을 올려다보면서 샤로니아가 진지하게 말했다.

움찔, 몸을 떤 키언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 나도 모르게 그만.”

조심해야겠다고 거듭 다짐했는데도 몸이 맞닿자 저절로 손이 움직였다.

“그게 뭐예요.”

샤로니아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쿡쿡 웃었다. 맑고 푸른 눈동자가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반짝 빛났다.

“미치겠네.”

그 모습에 자극을 받은 키언은 괴로운 표정으로 샤로니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지금은 그녀가 쉬도록 해야 한다. 그럴 목적으로 그녀를 안고 온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몸이 맞닿자 자꾸 그 목적을 잊게 된다.

‘최악이군.’

그는 자조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숨결에 샤로니아가 움찔 몸을 떨었다.

“폐하는 정말 한결같으시네요.”

그녀가 웃으며 키언의 은빛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그는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연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암, 나는 평생 한결같을 거야.”

언제나 한결같이 그녀를 원하고 사랑할 거다. 하지만 그것도 다 때가 있는 법. 확실한 것은 지금은 그녀를 안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키스해 주세요.”

샤로니아가 눈이 접히도록 해사하게 웃으며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윽, 지금 유혹하는 건가?”

키언이 두 눈을 좁게 뜬 채 몸을 뒤로 물렸다.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키스쯤은 괜찮지 않아요?”

아니, 안 괜찮아. 참을 자신이 없거든.

키언은 차마 그렇게 답하지 못하고 끙, 앓는 소리를 냈다.

힘든 하루를 보냈건만 그녀를 안고 있으니 오늘 있었던 일이 까마득하게 멀게만 느껴졌다.

자신을 미치게 만드는 그녀의 체취와 보드라운 육체의 감각만이 또렷할 뿐이다.

“아무래도 불순한 침대는 쓰면 안 될 것 같은데.”

키언이 그녀를 번쩍 들어서 진짜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이불에 푹 파묻힌 그녀가 참지 못하고 키득거렸다.

“왜요? 저는 폐하 무릎에서 잠드는 것도 좋을 것 같았는데.”

그녀가 놀리는 기색이 다분했기에 키언의 한쪽 눈썹이 쓱 올라갔다.

“자꾸 그러면 후회할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네? 그게 무슨……?”

샤로니아가 말을 다 끝맺기도 전, 키언이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잔뜩 목마른 사람처럼 깊이 파고드는 그로 인해 샤로니아는 숨도 쉴 수 없었다.

“하앗…….”

밭은 숨이 터져 나올 즈음이 되어서야 키언이 서서히 강도를 줄였다.

하지만 그가 애간장을 태우기 시작하자 다시 숨을 쉴 수 없었다.

짜르르 떨리는 쾌감이 등줄기를 따라 흐르며 온몸에 소름이 돋게 했다.

“한 번 더 놀리면 키스로 끝나지 않을 거요.”

그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샤로니아의 입술을 손끝으로 한차례 쓸었다.

안타깝게도 뭐라고 항변할 수가 없었다. 그가 이 한 번의 키스로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게 해 주었으니까.

샤로니아는 그를 도발하는 걸 포기하고 얌전히 누웠다. 어쨌든 지금은 조금이라도 체력을 아끼는 것이 옳았다.

“그럼, 이건 괜찮죠?”

샤로니아가 자신의 팔을 당겨 베고 눕자 키언이 피식 웃었다.

“뭘 하든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 건 변함없을 테니 상관없소.”

그가 다정하게 제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기에 샤로니아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창가에 비쳐드는 희미한 달빛만이 유일한 빛이었다. 둘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잠을 청했다.

하지만 내일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안위와 마물의 행방,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들이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켜 잠드는 것을 방해했다.

“자장가라도 불러 줘야 잠이 들려나?”

키언이 어둠 속에서 떨리는 샤로니아의 속눈썹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폐하께서 부르시는 자장가라니, 궁금해서 더 잠이 안 오겠는데요?”

샤로니아의 입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 잠들 때마다 노래를 불러 주시곤 했소.”

그가 어머니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잠시 샤로니아의 눈이 커졌다.

“못 봬서 무척 아쉬워요. 아마도 폐하와 많이 닮으셨겠죠?”

“어머니의 은발을 물려받았지. 황금색 눈동자도.”

어둠 속이라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그리움이 가득한 얼굴로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노래를 잘 부르셨지만, 난 그 재능은 못 물려받았어. 그러니 욕하지는 마.”

그가 당부하는 말을 들으며 샤로니아는 쿡쿡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절대, 욕하지 않을게요.”

그녀가 맹세하듯 말하는 것을 들은 키언이 충동적으로 그녀의 뺨과 콧잔등과 눈 위에 자잘한 입맞춤을 남겼다.

그리고 곧 속삭이는 듯한 낮은 저음의 자장가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이야, 어둠은 무섭지 않아. 다시 새 힘을 얻는 시간, 빛나는 꿈을 꾸는 시간이니까. 눈을 뜨면 보게 될 거야. 반짝이는 이슬을, 아름다운 세상을.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는 날을…….”

감미로운 저음의 노랫소리에 거짓말처럼 잠이 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 동안 잠이 들었을까.

쿠궁, 마을 전체를 울리는 진동에 샤로니아가 헉, 숨을 들이켜며 눈을 번쩍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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