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동이 트자마자 황실 기사단은 마을 어귀에 집합했다.
“꼭 확인을 하셔야겠습니까?”
안내자를 자청한 테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걱정하지 말게. 어제 말했던 것처럼 꼭 그대들을 마물의 손아귀에서 구해 줄 것이니.”
키언이 테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들은 테드가 인도하는 대로 방향을 잡고 이동했다. 버석거리는 흙을 밟으며 한참을 걷자니 침엽수가 빽빽하게 우거진 숲에 이르렀다.
“여기서부터는 기척을 죽여야 합니다.”
테드가 기사단을 향해 주의를 주었다. 조금 더 걸어 들어갔더니 커다란 호수 하나가 나왔다.
이른 아침이라서 물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는 모습이 당장이라도 뭔가가 튀어나올 것처럼 스산했다.
스르릉, 여기저기에서 검을 빼 드는 소리가 들렸다.
노련한 기사들이 본능적으로 위험한 기운을 느끼고 방어하려는 것이었다.
“숲에 사는 동물들도 다 잡아먹힌 것 같습니다.”
테드가 울적한 표정으로 지금 상황을 설명했다.
이곳은 데르반에서 가장 풍족한 자원을 가진 숲이었다. 먹고살기 어려워 찾아온 이는 결코 빈손으로 돌아가는 법이 없을 만큼 숲은 데르반 사람들에게 어머니와도 같은 장소였다.
하지만 마물이 나타난 이후, 숲은 풍요로움을 잃었다.
맑은 호수 안에 노닐던 물고기는 자취를 감추었고 호수의 물도 점점 말라가기 시작했다. 토끼와 노루가 사방으로 뛰어다니던 숲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하기만 했다.
생명력을 잃은 숲은 당장이라도 괴물이 튀어나올 것처럼 음산할 뿐이었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숲에 들어왔던 사람들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테드도 이곳에서 마물에게 공격을 당해 목숨을 잃을 뻔했다.
두둑, 메마른 나뭇가지가 누군가의 발에 밟히는 소리가 조용한 숲에 메아리쳤다.
다들 그 소리의 주인공인 기사단 막내 조셉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였다.
두둑 타닥, 다시 한번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기사단원 모두 눈을 부릅뜨고 조셉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조셉은 이번엔 자신이 아니라며 온몸으로 항변했다.
“나타났습니다.”
그때, 테드가 나직하게 말하며 소리 난 방향을 가리켰다.
대여섯 마리의 마물이 붉은 눈을 빛내며 모인 사람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저게 정말 마물이라고?”
키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일전의 사건을 통해 마물을 본 경험이 있었다. 신전 지하에서 사육되던 마물은 날카로운 이빨과 붉은 눈을 가졌으나 거의 늑대의 형태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 그들 앞에 나타난 마물의 모습은 같은 종이라고는 여길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달라져 있었다.
기이하게 발달된 턱뼈는 강철도 씹을 수 있을 것처럼 단단해 보였고 뻗어 나온 이빨은 흉측함 그 자체였다.
거기에다 몸집은 이전보다 더욱 커졌고 두툼한 앞발엔 날카로운 발톱이 위협적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마물이 두려움을 주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핏빛 눈동자. 마물과 눈을 마주친 사람은 몸이 얼어붙는 느낌이 들 정도로 섬뜩한 느낌을 주는 눈동자였다.
그 붉은빛은 지옥 불을 연상케 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며 다시 살아 돌아갈 수 없으리란 느낌을 강렬하게 주었기에, 두려움에 잠식된 사람들은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다.
“조심하십시오. 꽤 영리한 녀석들입니다.”
테드가 잔뜩 경계심이 서린 목소리로 당부했다.
“다들 잘 들었겠지? 다치지 않길 바란다.”
키언이 기사단을 향해 말하는 순간, 마물이 공격을 시작했다.
“크아아악!”
발작하듯이 전력을 다해 공격하는 마물을 막느라 기사단 전체가 진땀을 흘렸다.
“와, 장난 아니네.”
기사단 중 누군가가 거친 숨과 함께 불쑥 진심을 내뱉었다.
마물은 강인한 체력으로 빈틈을 노려 무차별적으로 공격했기에 기사단은 막는 데 급급했다.
“젠장, 뭐 이런 놈들이 다 있어.”
헤이든이 마물의 이빨에 부딪힌 검을 거둬들이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분명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고 생각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마물들의 몸에 검이 꽂히지 않았다.
그제야 데르반 사람들이 마물을 향해 한 말이 기억났다.
‘괴물.’
마물보다 한 단계 더 진화된 존재. 어쩌면 지옥에서 도망쳐 나온 생물일지도 모르겠다는 정신 나간 생각이 들 정도로 마물들은 강했다.
“조심해!”
기사단원 하나가 마물에게 물어뜯기기 전, 루카스가 돌풍을 일으켜 그 마물을 날려 버렸다.
하지만 뒤로 나가떨어진 마물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듯 다시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헉, 헉, 헉…….”
잠시 대치 상태에 들어간 상황, 기사단원들의 숨소리가 꽤 거칠어진 반면 마물들은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전열을 정비했다.
“제길!”
키언이 이를 아득 갈았다.
“심상치 않네요.”
샤로니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당신은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제가 돌아가면 나머지 사람들은요?”
그녀가 동조하지 않을 거라는 예상을 했지만, 그 예상이 정확하게 적중하자 키언은 쓴 입맛을 다셨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면 될 문제요.”
그는 혹시나 샤로니아가 다칠까 봐 두려웠다. 흉측한 이를 드러내고 그르렁거리는 마물보다 그것이 백배, 천배는 더 두려웠다.
“폐하께서 뭘 걱정하는지 알아요. 하지만……!”
샤로니아가 말을 끝맺기 전, 마물들이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젠장! 다들 조심해!”
키언이 달려드는 마물의 몸체를 검으로 내리찍었다.
콰드득, 마치 돌덩이를 쳐내듯 강한 파열음이 났지만, 마물의 몸엔 상처 하나 생기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이어진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었다. 체력이 먼저 고갈되는 쪽은 아무래도 인간 쪽일 테니까.
“저도 제 몸쯤은 지킬 수 있다고요.”
샤로니아가 손을 내젓자 호수에서 옮겨진 물이 마물들 앞을 벽처럼 막아섰다.
마물들이 물 벽으로 인해 잠시 뒤로 물러났다.
후우, 키언이 긴 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고집불통 같으니라고. 도대체 저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이 이 제국 내에 존재할지가 의문이다.
그는 차라리 이 싸움을 빨리 끝내자는 심정으로 기사단에게 외쳤다.
“그냥 무턱대고 싸우지 말고, 급소를 찾아!”
“네, 폐하!”
기사단 또한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들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키언이 샤로니아에게 눈짓하자 그녀가 마물과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물 벽을 없앴다.
“크르르르…….”
다시 덤벼드는 마물을 향해 기사단은 이전처럼 무모한 싸움을 하지 않았다. 대신 급소를 찾기 위해 허점을 노리기 시작했다.
“여기도 아니고, 여기도 아니고……. 아무래도 몸통 쪽엔 급소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느 기사의 보고에 헤이든은 검을 단단히 고쳐 잡았다.
“몸통이 아니면 얼굴밖에 더 있겠어?”
하지만 날카로운 이빨로 인해 얼굴을 공략하는 것은 꽤 어려웠다.
“하? 날 뭐로 보고!”
그녀가 절묘하게 휘두른 검이 마물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주르륵,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을 본 헤이든이 입꼬리를 들어 올려 씨익, 웃었다.
“찾았다!”
그녀가 간만에 ‘악명 높은 기사’다운 표정을 지었기에 키언은 참지 못하고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제야 아카데미 시절 서슴없이 자신을 두들겨 패던 헤이든이 된 듯했으니까.
솔직히 루카스를 만난 뒤, 그녀는 다른 사람처럼 행동해서 키언을 매번 당혹스럽게 했었다.
“다들 이마 쪽을 공략해!”
기사단에게 그렇게 명령한 키언이 마물의 급소를 정확히 노려 검을 내질렀다.
“흠, 이마가 아니라 미간 쪽이군.”
미간에 검이 박힌 마물이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는 것을 본 키언이 웃으며 턱을 문질렀다.
그것을 본 기사단원들은 그가 왜 전쟁귀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하며 한차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다들 미간을 정확히 노리도록 해.”
마물의 급소를 파악하고 난 뒤,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다. 하지만 미간을 공략당한 마물은 눈에 띄게 기세가 꺾였는데도 불구하고 쉽사리 죽지 않았다.
“뭐야, 이놈들. 설마 불사신은 아니겠지?”
계속해서 덤벼드는 마물을 본 기사단이 끔찍하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체력 소모가 컸던 탓에 기사단에게도 쉽지 않은 싸움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급소를 공략당하고도 쉽사리 숨이 끊어지지 않는 마물을 바라보던 샤로니아가 루카스에게 손짓했다.
“오빠, 나 좀 도와줘.”
“응? 뭘 하려고?”
루카스의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샤로니아가 물보라를 일으켜 하늘로 솟구치게 했다.
“이 위쪽으로 구름을 모아 줘.”
“너, 설마…….”
그녀의 의도를 읽은 루카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그녀가 하려는 마법은 체력 소모가 꽤 컸다. 안 그래도 큰 마법을 연달아 썼기 때문에 샤로니아가 제대로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루카스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데도 샤로니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잔소리는 나중에 들을래.”
샤로니아가 루카스의 할 말을 원천 봉쇄하자 그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가 하려는 마법은 지금 이 상황을 타개시킬 방법이었기에 무턱대고 말릴 수도 없었다.
루카스가 바람을 일으키며 그녀에게 부탁했다.
“기회가 여러 번 있지는 않을 거야. 단번에 끝내야 해.”
샤로니아가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르르릉, 하늘 위로 새카만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곧 태풍처럼 변한 먹구름은 데르반의 숲 하나쯤은 통째로 삼킬 수 있을 정도로 덩치를 불렸다.
루카스가 힘을 더하자 먹구름이 토네이도처럼 휘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샤로니아가 손짓하자 토네이도에 전류가 맴돌았다. 파직파직,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휘도는 먹구름을 모두 기함하며 바라보았다.
“뒤로 물러나요.”
샤로니아의 말에 다들 마물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그러자 아까와 마찬가지로 물 벽이 마물의 움직임을 차단하듯 주위를 에워쌌다.
“크르르, 크아악!”
본능적으로 위기를 직감한 마물들이 거칠게 울부짖었다. 그 소리가 너무 흉측해서 몇몇 기사들은 귀를 막았다.
쿠구구궁, 땅이 진동하고 거대한 번개가 번쩍거리며 사방을 밝혔다.
“샤론, 지금이야!”
루카스의 외침에 샤로니아는 마법 주문을 외치며 모든 에너지를 마물들을 향해 쏟아부었다.
“썬더 스피어!”
콰르르릉, 번쩍! 새하얀 빛이 세상의 모든 것을 섬멸할 것처럼 사위를 집어삼켰다.
“으윽…….”
기사단은 강한 바람에 뒤로 밀려나지 않으려고 검을 땅에 단단히 박아 넣고 버텼다. 바람이 어찌나 강했던지 버티지 못한 일부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우웅, 손바닥을 펼쳐 강한 바람을 뒤로 밀어내며 루카스가 헤이든 앞에 섰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마치 마법 방패가 그의 손에 쥐여진 것 같았다.
헤이든은 저를 연약한 레이디처럼 보호해 주는 루카스가 얼떨떨해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의 표정을 본 루카스가 픽 웃으며 눈을 찡긋했다.
헤이든은 붉어진 제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괜히 크흠, 낮은 기침을 뱉어 냈다.
푸쉬쉬쉬.
번개가 내리꽂힌 자리가 검게 그을린 채 허연 연기가 솟구쳤다.
“마물은……?”
샤로니아가 숨을 헐떡이며 연기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모두 죽었습니다!”
기사단원 하나가 마물들의 사체를 살피며 큰소리로 보고했다.
후유, 긴장이 풀린 샤로니아가 긴 숨을 내뱉었다.
“괜찮습니까?”
키언이 재빨리 다가와 그런 그녀를 부축했다.
급소인 미간에 상처를 입어 비틀거리면서도 공격을 멈추지 않던 마물은 결국 강력한 번개를 맞고서야 죽었다.
예상보다 긴 싸움이었다. 마물이 이토록 강한 줄 모르고 방심했기에 잘못하면 큰 위험에 빠질 뻔했다. 누구도 다치지 않고 놈들을 처치한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다들 안도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불에 그을린 마물의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으니까.
“허허, 그놈들 완전히 통구이가 됐네.”
기사단원 하나가 농담조로 말하며 코를 틀어막았다.
“그러게 말이야. 마물 구이는 별미 중의 별미지.”
다른 누군가가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하지만 그 또한 역한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코를 막은 상태였다.
다들 그 말뜻을 눈치채고 와하하, 웃는데 막내 조셉만 핏기 없는 얼굴로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설마, 저게 오늘 저녁은 아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