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무슨 일인지 확인해 보아라.”
키언의 명령에 기사단이 바깥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빠르게 흩어졌다.
데르반 시민들이 불안하게 웅성거리고 있는데 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기사단이 의뭉스러운 얼굴로 보고했다.
“폐하, 주변에 별다른 움직임이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마물이 떼를 지어 습격한 것이 아닐까 불안해하던 사람들이 그럴 리가 없다며 더욱 혼란스러워했다.
‘쿠그긍!’
강하고 확실한 진동이 다시 한번 일어났다.
“꺄악! 마물이 틀림없어.”
“엄마, 무서워요.”
두려움이 가득한 목소리가 방 안에 가득 메아리쳤다.
그와 동시에 공중에 마법진이 나타났다. 환한 빛이 방 안을 가득 메우자 다들 눈이 부셔서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다.
“맞게 잘 찾아왔군.”
빛이 수그러든 자리엔 루카스가 서 있었다.
“오빠? 오빠가 왜……?”
샤로니아가 멍하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루카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런 중요한 일에 나만 쏙 빼놓고 가면 안 되지. 안 그래?”
아마 그 웃음을 정면으로 마주한 미혼의 영애가 있었다면 녹아 없어졌을 정도로 해사한 미소였다. 하지만 샤로니아는 아무런 감흥이 없는 얼굴로 시큰둥하게 물었다.
“설마, 아직도 나한테 추적 마법을 걸어놓은 거야?”
“그럴 리가. 이제 넌 내 힘을 능가하게 된 지 오래인데. 내가 추적 마법을 걸어놓은 쪽은…….”
루카스의 시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샤로니아의 시선도 함께 움직였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헤이든이 있었다.
“오……!”
샤로니아가 뭔지 알겠다는 듯이 묘한 감탄을 뱉어냈다.
“나, 나요?”
헤이든이 움찔거리며 되묻자 루카스가 섭섭하다는 투로 말했다.
“아무 말도 없이 어떻게 이렇게 먼 곳까지 올 수 있단 말입니까?”
아, 미리 연락을 했어야 했나? 헤이든이 눈을 도르르 굴렸다. 그 모습을 본 루카스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뭐, 상관은 없습니다. 어딜 가든 찾아내면 그만이니까.”
루카스의 눈빛에서 수컷의 느낌이 물씬 풍겼기에 헤이든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연애하려고 온 거면 당장 돌아가.”
그 모습을 보다 못한 키언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럴 리가요. 안 그래도 데르반 지역에 관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가 있으면 전력에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루카스가 이를 꽉 깨물어 억눌린 목소리에 웃는 낯을 한 기묘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우리 샤론에게 회복 마법이나 걸어 줘. 중상자를 치료한다고 마력을 많이 소모했어.”
우리 샤로온? 루카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제 동생을 저렇게 부르는 건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폐하, 그 정도는 아닙니다.”
샤로니아가 창피해하며 살며시 키언의 팔에 손을 올렸다.
그때,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데르반 사람 중 한 사람이 말했다.
“저어,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황실에서 나오셨습니까?”
“그렇다네.”
샤로니아가 부드럽게 답하자 사람들의 표정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미천한 저희를 구해 주시려고 황제 폐하께서 직접 오신 것입니까?”
“뭐, 그렇게 거창하게 말할 건 아닌데…….”
키언이 난감한 얼굴로 턱을 문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데르반 사람들은 모처럼 공포에서 벗어나 안도하며 이제 살았다고 기뻐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키언의 눈빛이 짙어졌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막중한 책임감이 어지럽게 얽혀드는 모습을 보며 샤로니아가 키언의 손을 꼭 잡았다.
제 손에 전해지는 온기에 비로소 키언의 입가에 미소가 되살아났다.
전쟁귀 황제의 피 묻은 손을 아무렇지 않게 잡아 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뿐이다.
그녀가 손을 잡아 줄 때마다 더러운 오물이 씻겨나가는 기분이 드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키언은 샤로니아의 맑디맑은 푸른 눈동자를 잠잠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폭군도, 패륜아도 아닌, 그저 키언 아르다시스일 뿐이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그녀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기분을 느낀다는 것은.
무엇이든 다 이겨내고, 무엇이든 못할 것이 없는, 그런 끝 모를 자신감이 샘솟는 기분. 그것은 매번 느끼면서도 매번 놀라운 사실이었다.
“늦어서 미안하네. 하지만 반드시 이 지역을 마물의 손아귀에서 구할 것이네.”
키언의 진중한 목소리에 데르반 사람들은 감격했다.
“저희에게 사과를 하시다니요. 이렇게 와 주신 것만 해도 정말 감사한 것을요.”
상처를 치료받은 테드를 비롯한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날이 저물면 더 위험해집니다. 일단 서둘러 유숙할 곳을 정하셔야 합니다.”
창밖을 흘끔 내다본 데르반 사람 하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어느덧 해가 기울며 석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 인원을 다 수용할 수 있는 곳이 있겠는가?”
샤로니아의 물음에 데르반 사람들이 서로 상의했다.
“전부 다 수용할 장소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인원을 나누어서 지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키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테드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누추하지만 저희 집에서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모셔도 될는지요?”
키언과 샤로니아의 정체가 황제와 황후였다는 것을 알고 난 뒤, 이전보다 더욱 눈망울이 초롱초롱해진 카이텔과 줄리안이 잔뜩 기대 어린 눈빛으로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그 눈빛을 보고 차마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었던 키언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우와, 신난다!”
남매가 신이 나서 팔짝팔짝 뛰는 것을 모두들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이런 모습만 본다면 아주 평화롭고 지극히 평범한 일상 중 한 날 같았다.
마물 같은 건 꾸며 낸 환상일지도 모른다고 착각할 정도로 말이다.
* * *
“이래도 되는 걸까요?”
샤로니아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테드와 로지는 자신들이 가진 것 중에서 좋은 물건들을 다 꺼내 부부 침실을 꾸몄다.
그러고도 누추한 곳에 모셔서 죄송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샤로니아는 비누 향기가 나는 깨끗한 침구를 쓰다듬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 안의 물건들이 허름해서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가난한 평민의 집엔 손님방까지 따로 둘 여유가 없었기에 테드와 로지는 자신들의 침실을 기꺼이 내주었다.
그녀는 남의 침실을 차지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우리가 거실에서 자면 아마 이 집 식구들은 한숨도 못 잘 거요.”
키언은 아무렇지 않게 겉옷을 의자에 걸쳐놓고 셔츠 단추를 툭, 툭, 풀었다.
“하? 적응력 하난 정말 끝내주시네요.”
샤로니아가 기막힌 듯 헛숨을 뱉어 냈다.
“그럼, 그걸 이제 알았습니까?”
키언은 그녀의 표정이 재밌다는 듯이 쿡쿡 웃었다.
전쟁터를 전전하며 무수히 많은 날을 야숙으로 보냈다. 하늘을 이불 삼고 내리는 이슬을 그대로 흠뻑 맞으며, 태양이 떠오를 때마다 목숨이 붙어있다는 것을 확인하던 나날이었다.
그런 날에 비하면 이런 방은 호화로울 지경이었다.
“그 적응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진 않습니까?”
키언이 빙긋 웃으며 샤로니아의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놓았다.
“폐, 폐하!”
당황한 샤로니아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남의 집 침실에서 이렇게 애정 행각을 벌일 줄은 전혀 몰랐으니까.
샤로니아가 동요하자 키언의 눈빛이 더욱 짙어졌다.
“바로 옆방에 애들이 있다고요.”
그녀가 행여나 옆방에 들릴세라 소리 죽여 항변하는 것을 들은 키언은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꾹 눌러 참았다.
“새 나라의 어린이들은 벌써 잠들었을 겁니다.”
키언이 매끄럽게 되받아치는 말에 샤로니아는 더욱 당황해서 허둥거렸다.
“그, 그래서, 여, 기서…… 하, 시겠다고요?”
평상시에 그녀가 이렇게 당황하는 일은 거의 드물었기에 키언은 짓궂은 장난을 멈출 수가 없었다.
“못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키언이 그녀에게 몸을 기울이자 샤로니아가 미간을 찡그리며 뒤로 몸을 물렸다.
그가 다가오는 것을 멈추지 않았기에 샤로니아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침대 위로 풀썩 누워 버리고 말았다.
키언은 그런 그녀를 양팔로 가둔 채 내려다보았다. 유혹의 기운이 다분한 눈매가 매끄럽게 휘어졌다.
“그거 압니까?”
“뭐, 뭘요?”
샤로니아는 그 눈동자에 홀리지 않으려고 일부러 시선을 다른 데 둔 채 말했다.
“전쟁터에서 생긴 아이가 의외로 많다는 거.”
잠시 그 말뜻을 생각하느라 샤로니아의 당황 어린 눈동자가 도르르 굴러갔다.
“전쟁터에서…… 왜, 아이가…….”
뒤늦게 그의 말뜻을 파악한 샤로니아의 귀 끝이 화악 붉어졌다.
“그러니, 아시겠습니까? 장소 따윈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키언이 꿀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사랑스러운 눈길로 샤로니아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에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크흠, 낮은 기침을 뱉어냈다.
아무래도 이 남자는 유혹하는 데 도가 튼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눈빛만으로 이렇게 마음이 흔들릴 리 없을 테니까.
그때, 키언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살결에 닿는 뜨거운 숨결에 샤로니아는 움찔 몸을 떨었다. 몸을 관통하는 듯한 쾌감에 손등 위로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하지만 그뿐. 더 이상 움직임이 없다?
샤로니아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을 땐, 키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저기요, 폐하?”
샤로니아가 제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웃음을 참고 있는 키언을 툭툭, 건드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뾰족해진 것을 눈치챈 키언이 고개를 들었다.
“아, 미안. 그대가 너무 귀여워서 참을 수가 없어서.”
“그러니까, 이제껏 저를 놀리셨던 거로군요.”
이번에는 그녀의 눈꼬리가 뾰족해졌다.
키언은 웃지 않으려고 입술을 말아 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귀엽지 않게 보일 리가 없었다.
눈을 흘기는 것조차 미칠 듯이 귀여워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샤로니아를 안은 채 몸을 굴렸다. 그러자 두 사람의 위치가 뒤바뀌었다.
어느새 키언의 몸에 올라탄 자세가 되자 샤로니아의 눈이 커졌다.
“난 그대가 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할 겁니다.”
키언은 마치 자신이 무해한 존재라는 것을 알리려는 듯이 두 손을 포개어 머리 뒤에 댔다.
그 바람에 셔츠가 벌어지며 그의 흉근이 선명히 모습을 드러냈다.
샤로니아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탄탄하게 솟아오른 그의 근육 위로 고정되었다.
그녀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확인한 키언의 입매가 흡족하게 휘어졌다.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뭐든 하세요.”
키언이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 줄 것처럼 말하자 샤로니아는 어이가 없어서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그와 처음 만나던 날, 마치 바쳐진 제물처럼 침대에 묶여 있던 자신의 모습이 지금 그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저를 취할 것인지 물으며 그를 도발했었는데…….
“제가 뭘 하고 싶은 줄 알고요?”
샤로니아가 손끝으로 그의 가슴을 살짝 쓸며 물었다.
느른하게 풀어졌던 그의 입매가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그대도 하고 싶길 바라야지.”
조금은 간절해 보이는 그의 표정에 샤로니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 이렇게 내려다보면 표정이 더 잘 보이는구나.’
아까 그가 왜 그렇게 웃었는지 알 것 같다. 점점 더 놀리고 싶어지는 걸 보면 말이다.
“저는 인제 그만 잤으면 하는데요. 그래야 내일 아침 일찍 마물을 찾으러 갈 수 있을 테니까요.”
키언의 눈썹이 꿈틀꿈틀 요동치는 것을 본 샤로니아는 참지 못하고 풋,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제 기분을 아시겠…….”
하지만 뒷말을 다 끝맺진 못했다. 키언이 그녀의 입술을 답삭 삼켜 버렸으니까.
온몸이 흐늘거릴 정도로 깊고 진한 입맞춤을 한 키언이 매혹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아, 내가 깜박했지 뭡니까. 내가 하고 싶은 걸 그대도 하고 싶게 만드는 방법도 있다는 걸.”
샤로니아가 빠르게 눈을 깜박이는 사이, 키언이 등불을 훅 불어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