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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망한 구원자 (82)화 (82/123)

82화

쿠그그긍, 잠시 땅이 흔들렸다. 샤로니아가 커다란 이동 마법진을 그리고 있던 탓에 생긴 진동이었다.

키언은 팔짱을 단단히 끼고 그것을 아주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서 이 많은 인원이 그녀 한 명의 수고로움에 의존해야 하는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데르반은 황궁에서 일주일 정도 말을 타고 가야 도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마법이 귀했던 루하르 제국에서는 원래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키언은 이번 일정 또한 평상시대로 잡아놓았다.

문제 될 것이 전혀 없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아무 문제도 없는 일정에 태클을 건 것은 샤로니아였다.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순 없어요.’

어떤 위험이 도사릴지 모르는 곳이었기에 데르반 원정대는 줄이고 줄여도 스무 명은 되었다. 그런데 샤로니아는 그 인원 전체를 마법으로 이동시키겠단다.

‘아무리 당신 마법 실력이 뛰어나다 해도 이렇게 많은 인원을 한꺼번에 이동시키기 위해선 엄청난 에너지가 소비될 거요.’

‘절 과소평가 하시는군요.’

자신만만한 그녀의 표정에 다시 한번 반할 것 같았지만 키언은 결코 넘어가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과소평가할 리가 없지 않소. 그냥 당신이 힘쓰는 게 싫을 뿐이요.’

그와 동시에 키언이 기사단을 노려보았기에 기사단원들은 마치 자신들이 죽을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저는 그저 시간을 아끼고 싶을 뿐이에요.’

몇 번의 실랑이 끝에 결국 샤로니아가 이겼다. 뭐, 항상 그녀가 이겼기에 당연한 결과였지만 말이다.

땅이 진동하고 마법진에서 눈부신 빛이 뻗어 나오는 것을 본 기사단원들은 경외심이 가득한 얼굴로 샤로니아를 우러러보았다.

그것이 못마땅했던 키언이 얼른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라고 그들에게 턱짓했다.

기사단원들이 마법진 안에 자리를 잡을 때였다.

“이런 일에 절 빼고 가시면 섭섭하죠.”

벌컥, 문이 열리고 헤이든이 들이닥쳤다.

키언이 이마를 짚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데르반 원정은 그냥 의심스러운 정황에 대한 동태를 살피러 가는 것뿐이다. 전쟁을 치르려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인원을 꾸릴 때 의도적으로 헤이든을 뺐던 것이었는데…….

“믿음직한 아군이 동행해 주신다니 든든하네요.”

샤로니아가 싱긋 웃으며 말하자 헤이든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성큼성큼 걸어서 마법진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고, 머리야. 키언이 오만상을 찌푸렸지만 헤이든은 당당하게 그와 눈을 맞추며 보란 듯이 아주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키언의 썩은 표정이 몹시 재밌다는 듯이 쿡쿡 웃고 난 샤로니아가 손가락을 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그와 동시에 이동 마법진이 새하얀 빛에 휩싸이며 발동했다.

* * *

“우욱…….”

기사단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조셉이 이동 마법의 후유증으로 잠시 구토 증상을 보이자 다른 이들이 쯧쯧, 혀를 찼다.

하지만 이동 마법을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이들이 태반이라 다들 울렁거리는 속을 다스리기 위해 미간을 찌푸려야 했다.

순식간에 데르반 지역으로 이동한 것은 겪어 보고도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신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뛰어난 황실 기사단답게 재빨리 놀란 마음을 추스른 뒤, 빠른 속도로 대형을 만들고 주변을 경계했다.

데르반은 얼마 전 내린 눈이 녹지 않아서 거의 백색으로 뒤덮인 상태였다.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바람이 그들을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와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정적에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데르반은 원래 많은 사람이 거주하는 대도시가 아니었기에 조용한 것이 지극히 정상이었지만, 그렇게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기사들에겐 예민한 촉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예민한 촉이 뭔가 위험하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뭐가 나타나거나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말이다.

“다들 경계를 게을리하지 마라.”

키언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그가 이처럼 서늘한 눈빛을 보이는 것은 샤로니아를 만나고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요?”

샤로니아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또다시 불어 닥친 바람에 묻혔다.

바싹 마른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며 웅웅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황량한 언덕을 지나자 곧 마을이 나타났다.

얼어붙은 땅을 내디딜 때마다 버석한 발소리만 들릴 뿐, 마을은 너무도 고요했다.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해.”

키언의 말에 기사단이 기민하게 움직여 마을을 수색했다.

“이상해, 이상해도 너무 이상해…….”

헤이든마저 심각한 표정으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폐하, 아무도 없습니다.”

“이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색에 나섰던 기사단원들이 마을에 사람이 없다는 보고를 하자 모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럴 리가……. 사람들이 증발한 것도 아니고 어떻게 마을에 한 사람도 없을 수가 있지?”

키언이 미간을 찌푸리며 턱을 문지를 때였다.

“여기, 사람이 있습니다!”

기사단원 하나가 손짓하는 방향을 바라본 키언의 미간에 골이 더욱 깊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기사가 발견한 사람은 어린아이 두 명이었으니까.

잔뜩 긴장한 아이들을 기사가 키언 앞으로 데려왔다. 키언은 최대한 표정을 누그러트린 채 몸을 숙이고 말했다.

“우린 너희를 해치려고 온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 안심해도 좋아.”

키언이 최대한 부드럽게 이야기했지만, 아이들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덜덜 떨었다.

보다 못한 샤로니아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어 말했다.

“어른들은 안 계시고 너희들밖에 없니?”

남매로 보이는 아이들은 서로를 의지하듯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샤로니아의 얼굴을 홀린 듯이 쳐다보던 아이들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걸 본 키언이 옆에서 끙, 신음을 내뱉었다. 예상했던 바였지만 자신과 샤로니아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온도 차가 극심했다. 아이들이 겁먹지 않도록 최대한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건만 별 효과가 없는 듯했다. 키언은 무안한 마음에 괜스레 턱을 문질렀다.

“……여신님이세요?”

동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조그만 소리로 샤로니아에게 물었다.

아이의 맑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샤로니아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난 여신이 아니란다. 하지만 너흴 도와줄 수 있을 거야.”

여자아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오빠를 바라보았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눈빛을 가진 남자아이가 샤로니아의 말을 판단하듯 일행을 천천히 둘러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여자아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불쑥 말했다.

“어른들은 먹을 걸 구하러 가셨어요.”

“그렇구나. 그럼, 우리가 기다렸다가 어른들을 만나 봐도 좋을까?”

샤로니아가 상냥하게 묻는 말에 남자아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세요, 모두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면요.”

남자아이의 말을 듣는 순간, 모두 직감했다. 이곳에서 뭔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챙겨온 비상식량을 아이들에게 나눠 주자 그들의 경계심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저는 줄리안이에요. 오빠는 카이텔이고요.”

원래 명랑한 성격이었는지 자신을 줄리안이라고 소개한 여자아이가 우유를 홀짝이며 말했다. 입가에 하얀 수염처럼 우유 자국이 남은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이봐, 카이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네가 속 시원히 얘기 좀 해 봐.”

헤이든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빵을 조금씩 뜯어 먹고 있는 카이텔의 맞은편에 의자를 끌어다가 털썩 앉았다.

카이텔은 붉은 머리칼의 기사를 흘끔 본 뒤,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이 마을에 괴물이……나타났어요.”

“괴물?”

예상치 못한 아이의 말에 헤이든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괴물이라는 게 마물을 가리키는 것이냐?”

내내 듣고만 있던 키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이는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마물이, 아니에요.”

“마물이 아니라면 도대체…….”

키언이 말을 하는 도중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여인이 불안한 눈동자로 연신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급박하게 뛰어든 여인을 말리지 못한 기사단이 난처한 표정으로 그 뒤를 따랐다.

“카이텔! 줄리안!”

“엄마!”

줄리안이 단숨에 달려가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안겼다.

아이를 안은 여인의 어깨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엄마, 울어?”

줄리안이 제 엄마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품 안에서 버둥거렸다.

“아버지! 다치셨어요?”

그때까지 얌전히 앉아 있던 카이텔이 뒤따라 들어오는 일행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마을 사람들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이 건장한 남성을 부축해서 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옷은 찢어져 넝마 같았고 보는 이가 두려울 정도로 온몸에 피 칠갑이 된 상태였다. 어깨와 다리를 심하게 다쳐서 한참 전에 정신을 잃었어야 했지만 강인한 정신력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듯했다.

“난…… 괜, 찮아.”

아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억지로 쥐어 짜낸 목소리가 무척 애처로웠다.

“어떻게 된 건가?”

키언의 질문에 마을 사람 중 한 명이 대답했다.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갔다가 마물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마물이 나타날 것을 알면서 나갔다는 말인가?”

“안 그러면 어쩝니까? 다 굶어 죽게 생겼는데.”

모두 절망적인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데르반은 지형이 험하고 사람들의 왕래가 뜸한 곳이었지만 살기 힘든 곳은 아니었다. 농사를 지으면 먹고 살 만큼 소출을 얻을 수 있었고, 마을 사람들끼리 우애도 좋았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이 지역에 재앙이 닥쳤다.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실종이라고 생각하고 수색에 나섰지만, 수색에 나섰던 사람들마저 실종되기 시작하자 마을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얼마 후 그들은 보게 되었다. 그 재앙의 실체를.

“그냥 마물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말 그대로 괴물이에요. 사람을 뼈째 씹어 삼킬 수 있을 정도로 흉측한 턱과 날카로운 이빨을 가졌지요. 또 몸은 어찌나 단단한지…… 칼도 튕겨 낼 정도입니다.”

아까 카이텔이 마물을 가리켜 ‘괴물’이라고 지칭할 때, 아이의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흔들렸던 것처럼 마을 주민들의 눈동자가 하나같이 떨리고 있었다.

“흐억, 쿨럭!”

그때, 남매의 아버지인 테드가 울컥 피를 토해 냈다.

“엄마아, 아빠 죽어?”

그것을 본 줄리안이 엄마 로지의 치맛자락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또다시 한 사람을 잃게 될 위기에 처하자 마을 사람들의 분위기가 한없이 가라앉았다.

“자, 내가 그를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르니, 내게 환자를 좀 보여 주겠나?”

샤로니아가 사람들 앞에 나서자 그들의 눈빛에 호기심이 서렸다.

“치료사이십니까?”

“아마도?”

누군가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해 보인 샤로니아가 테드에게 다가가서 그의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날카로운 짐승의 이빨이 사정없이 살점을 꿰뚫은 흔적은 보는 것만으로도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급소를 비켜 가지 않았더라면 곧바로 즉사했을 정도로 상처가 깊었다.

“괜찮겠소?”

대규모 이동 마법을 사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터라 키언이 걱정이 그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

샤로니아가 둥근 미소를 지은 뒤 손바닥에 치유력을 모았다.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밝은 빛이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놀랍게도 테드의 상처가 천천히 아물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오, 신이시여, 정말 감사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놀라며 탄식을 뱉어 냈다. 그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치유사를 두 눈으로 목격하고 살짝 흥분한 상태였다.

“오빠, 오빠, 여신님이 맞았어.”

어느새 눈물을 그친 줄리안이 카이텔에게 아주 커다란 비밀을 말하듯 속삭였다.

카이텔은 여신이나 요정처럼 동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는 믿지 않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줄리안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테드의 상처가 매우 깊었던 까닭에 치유하는 샤로니아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키언이 안절부절못하며 그녀의 주위를 맴돌 때였다.

쿠그긍, 잠시 땅이 진동했다.

헉, 놀란 사람들이 동시에 숨을 들이마셨다.

“뭐지? 마물들이 습격이라도 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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