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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망한 구원자 (79)화 (79/123)

79화

키언이 도망을 가리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황궁 기사단이 우왕좌왕했다. 축제 거리 한가운데에 황궁 기사단이 출몰하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길게 목을 늘였다.

“저쪽이다! 저쪽으로 가셨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누군가가 키언과 샤로니아가 사라진 방향을 가리키자 때아닌 추격전이 벌어졌다.

“이게 도대체 뭔 일이랍니까?”

“이 좋은 축제 날에 흉악범이 돌아다니는가 보네.”

이 장면을 본 시민들이 수런거렸다. 졸지에 흉악범으로 전락해 버린 줄도 모르고 키언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계속해서 웃고 있었다.

“폐하, 이제 한계예요.”

숨이 턱까지 차오른 샤로니아가 더는 못 뛰겠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키언과 체력 차이가 너무 심했다.

숨소리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키언에 비해 샤로니아는 거칠어진 숨을 내뱉느라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할 수 없지.”

키언이 예리한 눈으로 골목을 훑었다. 사람을 피해 요리조리 골목을 누비던 그는 샤로니아를 좁은 골목으로 훅 끌어당겼다.

축제를 즐기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좁은 골목에 몸을 숨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우르르르, 황실 기사단이 다른 방향으로 지나가는 것을 본 키언의 입가에 악랄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것도 못 찾다니, 아무래도 훈련 강도를 더 높여야겠어.”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샤로니아는 기가 막혀서 피식 웃었다.

“너무한 거 아니에요?”

그가 몰래 사라지는 바람에 하루 종일 찾아다니는 것도 힘든데 눈앞에서 놓쳤다고 심한 훈련까지 받으면 정말 억울할 것 같다.

“글쎄, 딱히…….”

말을 하다 말고 키언이 갑자기 자세를 휙, 바꾸었다.

그를 찾지 못한 황실 기사단이 흩어져서 골목을 이 잡듯 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밀회를 나누는 연인처럼 온몸을 밀착한 야릇한 자세가 되고 말았다.

두 사람은 신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후드 달린 겉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키언이 빙긋 웃으며 샤로니아의 후드를 끌어내려 얼굴이 보이지 않게 매만졌다.

“이런 취향이 있는 줄 몰랐는데, 꽤 흥분되는군요.”

입술이 맞닿을 것처럼 가깝게 다가온 그가 쿡쿡, 낮은 웃음을 토해 내었다.

샤로니아가 곱게 눈을 흘기며 그가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후드를 제대로 씌워 주며 대답했다.

“인제 그만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어요?”

다가왔던 기사 하나가 차마 애정을 나누는 연인을 떼어 내어 얼굴을 확인하지 못한 채 크흠, 헛기침만 늘어놓고 멀어져 갔다.

“아이스크림은 먹고, 돌아갈 겁니다.”

그가 유혹의 기운이 다분한 얼굴로 속살거리듯 말하며 그녀의 입술을 한차례 물었다 놓았다.

“뭐, 아이스크림보다 당신이 더 맛있는 것 같지만 말입니다.”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샤로니아를 보고 키언이 그녀의 입술을 엄지로 쓸며 말했다.

“정말 짓궂으세요.”

샤로니아가 키언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한 대 툭, 쳤다. 그 손목을 그러잡은 키언이 마치 도장을 찍듯이 그녀의 손목 안쪽에 입술을 꾹 눌렀다.

불처럼 뜨거운 입술이 피부에 닿는 느낌에 샤로니아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부드럽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과는 달리 그의 눈빛은 정염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게 싫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제 행동에 동의를 구하듯 진득한 시선이 숨 막히게 따라붙었다. 이럴 때만큼은 그를 이길 수가 없다.

“폐하의 그런 면을…… 사랑하죠.”

샤로니아의 솔직한 고백에 만족스럽다는 듯이 그의 눈매가 예쁘게 휘어졌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곧장 그녀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깊고 진한 키스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터덜터덜, 축제가 한창인 골목을 누비는 테오르의 걸음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에잇! 내가 조금만 더 성격이 못됐으면 황제 욕이라도 실컷 할 텐데. 그는 차마 황제를 향해 욕설을 늘어놓지는 못하고 기운이 쭉 빠져서 거리를 걸었다.

전쟁에서 쌓은 기술과 실력을 이런 데다 쓰는 황제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담! 그는 누가 쳐다보든 말든 씩씩거리며 발을 쿵쿵 굴렀다.

기쁨이 넘치는 축제 거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테오르의 행동을 사람들이 흘끔거리며 쳐다보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숨바꼭질이면 ‘못 찾겠다, 꾀꼬리’라도 외칠 수나 있지. 이건 뭐, 기약 없는 술래잡기 같다.

벌써 기사단 일부는 철수하고 황궁으로 복귀한 상태였다. 저도 인제 그만 황제 따윈 잊고 돌아가서 쉬어야겠다.

테오르가 그런 마음을 먹고 걸음을 내디뎠을 때였다.

“흐흠, 이런 곳에서 만나니 반갑군.”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가 저를 향해 말을 걸었다.

하? 말도 안 돼…….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는 현실을 부정하며 뻣뻣해진 목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종일 찾아 헤맸던 그 황제가 모습을 감출 생각도 없었는지 뻔뻔한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다.

“미안하게 됐네.”

그의 옆에 앉아있던 샤로니아가 도리어 민망한 얼굴로 사과했다.

테오르는 저도 모르게 울컥해서 따졌다.

“아니, 지금, 아이스크림이 목에 넘어가십니까?”

황제와 황후가 버젓이 축제 거리의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걸 보니 하루 동안 고생한 것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저렇게 군중에 섞여 있으니 후드를 눌러쓰지 않아도 별로 표시도 나지 않은 것이다. 아니면 지친 기사단이 아예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던가.

키언이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테오르에게 말했다.

“아이스크림 사 줄까?”

“됐습니다.”

테오르가 뚱한 얼굴로 대답했다.

흠, 아이스크림으로는 씨알도 안 먹히는군. 느리게 턱을 쓰다듬은 키언이 곧바로 다른 메뉴를 읊었다.

“그럼, 호박파이 사 줄까?”

테오르를 대하는 키언의 태도가 마치 아이를 어르는 것 같았다.

호박파이는 무슨! 테오르는 차마 빽 소리치진 못하고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삭였다.

“그냥 곧장 황궁으로 가시지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중얼거리는 말에 키언이 허허, 웃었다.

아아, 젠장. 남들은 제국이 생긴 이래, 가장 풍요롭고 행복한 수확제라며 침이 마르도록 칭송을 하는데.

축제는 개뿔. 즐기는 건 바라지도 않으니 고생이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흠, 아이스크림도 호박파이도 싫다면…… 내일 하루 휴가는 어때?”

휴가? 테오르의 귀가 일순 쫑긋해졌다. 하지만 이내 어깨가 축 처졌다.

3일 동안 열리는 수확제는 마지막 날 자선 파티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그 자선 파티 때 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어떻게 휴가를 간단 말인가.

“망할 황제…….”

“뭐라고?”

키언이 반문하자 테오르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설마 내가 마음속의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은 건가?

“하하하, 저는 이만 황궁에 가 볼 테니 실컷 노시고 알아서 오십시오.”

테오르는 곧바로 몸을 휙 돌린 뒤, 앞만 보고 걸었다. 뒤통수가 좀 따가운 것 같았지만, 뭐, 그래서 어쩔 건데!

‘에휴, 내 팔자야.’

하지만 몇 걸음 내딛지 못하고 바로 현실을 자각한 테오르였다.

* * *

수확제에 열리는 자선 파티 후원금은 모두 빈곤층의 구제를 위해 사용된다.

평상시에 평민들이 어떻게 되든 별로 상관하지 않던 귀족들도 이때만큼은 세간의 이목을 신경 쓰며 후원금을 내곤 했다.

올해는 광장에 세워진 대형 호박 탑을 중심으로 파티가 열렸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던 축제의 장소에서 귀족들이 모이는 파티가 열리다 보니 차별성을 갖기 위해 주변을 꽃으로 꾸몄다.

하지만 겨울로 접어드는 시점이었기에 꽃은 평상시보다 몇 배나 비쌌다. 어차피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모인 자선 파티인데, 이런 비용까지 아껴서 후원금으로 사용하면 얼마나 좋을까.

샤로니아는 남들에게 드러내길 좋아하는 귀족들의 생태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내색은 하지 않았다. 단지 내년에는 이런 비용을 모조리 후원금에 추가할 거라고 마음속으로 단단히 결심할 뿐이었다.

“요즘 승마를 배우신다지요?”

언제 소문이 퍼졌는지 파티에서 귀부인들의 주된 관심사는 샤로니아의 승마에 관한 것이었다.

“어찌나 즐거운지 말을 타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를 정도라네.”

샤로니아의 말을 들은 귀부인들 사이에서 어머, 하고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예전 같았으면 예법에 어긋난다느니, 천박하다느니, 그런 말을 뒤에서 수군거렸을 테지만 이국의 공주가 황후가 된 이후로 바뀐 점이 있다면 그녀가 제국의 유행을 선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황후 폐하께서 입으셨던 승마복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아까의 무리에서 벗어나 다른 무리의 귀부인들을 만났건만,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한번 선뵈겠네.”

샤로니아가 사교적인 미소를 해사하게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아마도 오늘 이 자리에 모인 귀부인 대부분은 집에 돌아가자마자 남편을 닦달해서 혈통 좋은 말을 사들일 것이다. 또 집집마다 마구간을 증축한다고 난리를 부릴 테지.

‘승마를 배운답시고 섣불리 나서서 뼈가 부러지는 귀부인은 없어야 할 텐데…….’

샤로니아는 안 해도 될 걱정을 하면서 미소 띤 얼굴로 파티장을 누볐다.

사실 그녀가 승마를 시작한 이유는 키언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순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앞으로 귀족들이 사들이게 될 혈통 좋은 말의 대부분은 샤로니아의 소유일 테니까.

키언에게 비밀을 만들려던 것은 아니었다. 개인적인 사업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일일 뿐, 그 안에 별다른 뜻은 없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마샤의 도움을 조금 받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키언이 얼마나 자신을 싸고돌았으면 마샤가 먼저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섰겠는가.

이 모든 것이 다 키언이 그녀를 깨지기 쉬운 유리 도자기 다루듯 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니 사업 좀 확장한다고 해서 그가 뭐라 할 일은 아니다. 자신이 직접 움직여야 하는 일도 아니니.

조금만 양보하면 서로에게 큰 이득이 될 수 있다. 키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

“아, 폐하.”

여러 귀족에게 인사를 하다가 마주친 키언을 보고 샤로니아가 싱긋 웃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이 짙어진 키언이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의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말했다.

“첫 춤은 무조건 짐과 춰야 합니다.”

그의 발을 수도 없이 밟았던 첫 번째 무도회가 생각나 샤로니아가 쿡, 웃음을 터트렸다.

“발이 남아나지 않으실 텐데요.”

“그때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나아졌을 거요.”

그의 표정이 흔들리는 것이 웃겨서 샤로니아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그때 이후로 연습을 한 번도 안 했는데도요?”

어딘지 모르게 억눌린 그녀의 목소리에 키언의 한쪽 눈썹이 쓱, 올라갔다.

“이런, 부인과 할 일이 하나 더 늘었군요.”

키언이 그녀의 얼굴을 살피듯이 주시하며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폐하와 함께 하는 일이라면 저는 언제나 환영이죠.”

샤로니아가 키언이 내민 손 위에 제 손을 겹치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황제 부부는 날마다 뭐가 저리 좋을까, 라며 질투 어린 시선을 보냈다.

키언이 악단에게 가볍게 고갯짓을 하자 무도회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음악이 시작되었다. 춤을 배울 때 제일 먼저 익히는 교본과도 같은 곡이었다.

그 음악을 들은 샤로니아가 눈을 크게 뜨며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말했다.

“오, 현명하세요. 이 곡이라면 발을 밟지 않고 출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웬걸. 연주 중반부를 지나는 시점에서 키언의 발은 이미 열 번이나 밟힌 후였다.

“죄송해요.”

그의 발을 열한 번째로 밟으며 샤로니아가 사과했다.

그녀에게 밟혀 봤자 별로 타격은 없었다. 오히려 키언은 그녀와 춤을 춘 사람들이 다시는 그녀에게 춤을 신청하지 않으리란 걸 떠올리고 기분이 좋아졌다.

다른 놈들에게는 한 곡도 다 추지 못할 정도로 발을 콱콱 밟아주면 좋으련만.

“아무래도 발을 더 세게 밟는 연습을 해야겠습니다.”

“네?”

키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샤로니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녀의 집중력이 잠시 흐트러지면서 키언의 발이 다시 밟혔다.

“윽…….”

그가 침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내 발 말고 다른 놈들 발만 밟히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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