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광장에 수확제 시작을 알리는 커다란 호박 모양 탑이 세워졌다.
알록달록한 전구들을 휘감은 호박 탑을 본 아이들은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어른들도 신이 나기는 마찬가지였는지 곳곳에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여기예요, 여기!”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엘런이 상기된 얼굴로 상점 하나를 가리켰다.
샤로니아는 지금 신분을 감춘 채 엘런과 이멜다와 함께 축제 현장을 시찰 중이었다. 황궁을 나온 명분이 시찰일 뿐, 사실은 그저 축제를 일찍 즐기고 싶었던 것이었지만 말이다.
“이 집 호박파이가 제일 맛있대요. 그렇게 천천히 오시면 다 팔려서 못 먹을지도 몰라요.”
샤로니아와 이멜다가 천천히 걸어오자 마음이 급했던 엘런이 발을 동동 굴렀다. 황궁을 나오기 전부터 엘런은 대박 호박파이 가게의 레시피를 꼭 알아낼 거라고 결의를 다졌었다.
“엘런, 그렇게 기대치를 높이는 것은 좋지 않아. 기대한 것보다 맛이 없으면 어쩌려고 그래?”
이멜다가 놀리듯이 말하며 쿡쿡 웃었다. 저렇게 흥분한 엘런을 보는 것이 꽤 재밌는 모양이었다.
엘런이 염려했던 것처럼 호박파이 가게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우와, 장난 아니네.”
이멜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엘런이 염려했던 것이 이제야 실감났기 때문이다.
“그냥 우리, 황후 폐하가 납시었……!”
“쉿! 누가 듣겠어!”
이멜다가 눈치 없이 목소리를 높이자 엘런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이멜다가 여전히 입이 가로막힌 채로 샤로니아에게 간절한 눈빛을 발사했다. 그냥 여기서 크게 ‘황후 폐하, 납시오!’라고 소리 지르면 기다릴 필요도 없고 편하지 않냐는 것이었다.
“그건 오늘의 외출 목적에 맞지 않는 것 같구나. 난 저기서 기다릴 테니 순서를 지켜서 호박파이를 사 오렴.”
샤로니아가 웃으며 이멜다의 콧잔등을 톡, 건드렸다. 그 즉시 간절한 눈빛에서 푸시시 김이 빠졌다.
샤로니아는 근처의 벤치에 앉아서 주변을 감상했다.
가족끼리 외출을 나온 사람들은 서로 손을 잡고 팔짱을 끼고 즐겁게 웃고 있었고,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도 많이 보였다.
한 해 동안 수고하여 소출을 얻은 만큼 사람들의 얼굴에는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역시, 이런 행사는 꼭 있어 줘야 한다니까.’
제국민들이 팍팍한 일상에서 잠시나마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공적인 수확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샤로니아가 그렇게 이곳저곳을 바라보고 있던 때였다.
아장아장, 막 걸음마를 배운 아기가 그녀 앞을 지나가다 철퍼덕, 넘어졌다.
“이런, 괜찮니?”
샤로니아가 넘어진 아기를 일으켜 세웠다. 혹시나 상처라도 생겼을까 봐 아이의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딱히 눈에 띄는 상처는 없었다. 하지만 아파서인지, 놀라서인지 아기가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흐에…… 우에엥!”
당황한 샤로니아는 우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노력했다.
“착하지, 응? 괜찮아.”
그래도 아이는 서러운 눈물을 토해 낼 뿐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로미, 괜찮니?”
아이의 부모가 달려왔다. 아이는 부모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들에게 가려고 두 팔을 벌리고 버둥거렸다. 샤로니아는 아이를 부모에게 곧장 넘겨주었다.
“감사합니다.”
부모가 감사 인사를 했다. 엄마에게 안긴 아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울음을 그치고 엄마 품에 파고들었다.
샤로니아는 멀어지는 가족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한동안 바라보았다.
잠깐이었지만 제 손에 안아 들었던 아기의 말랑한 감촉이 신기했다. 또 엄마 품에 안기자마자 울음을 그친 아기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사랑스러웠다.
“설마, 아이를 갖고 싶습니까?”
그때,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벤치 옆에 털썩 앉았다.
“폐하?”
샤로니아가 예고도 없이 나타난 키언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도 몰래 나온 거라서 그렇게 부르면 안 됩니다.”
그가 엄청난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샤로니아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예? 몰래 나오다니요?”
샤로니아가 아까보다 더 기함하며 묻자 그가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쯤 황궁에서 난리가 났겠지만 내 알 바는 아니라는 뜻 같기도 했고, 그런 건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뜻 같기도 했다.
“오늘은 키언이라고 부르세요.”
그 말을 하는데 어째서 그의 눈에 기대심이 뚝뚝 흐르는 걸까. 샤로니아는 피식 웃고 난 뒤 일단 그의 말에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좋아요, 키언…….”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를 보니 더 이상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름 한 번 불렀을 뿐인데, 저렇게 좋아할 게 뭐람.
크흠, 샤로니아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이어 말했다.
“어서 황궁으로 돌아가세요.”
즐거워하던 키언의 얼굴이 와락 굳었다.
“몰래 나오시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샤로니아가 꽤 단호하게 말했기 때문에 키언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내가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오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샤로니아가 복병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건, 곤란합니다.”
키언이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면 오늘 하루쯤은 그녀가 눈감아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래도 안 돼요. 지금쯤 황궁이 난리가 났을 거예요. 다른 사람을 고생시키는 건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에요.”
구구절절 맞는 말만 하니 반박할 말이 없었다.
“황후가 되더니 그대는 너무 팍팍해졌어.”
키언이 시무룩하게 중얼거리는 것을 본 샤로니아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맑은 웃음은 전염성이 강했다. 어느덧 그녀를 따라 미소 짓게 된 키언이 단념한 듯 손가락을 모아 쥐고 삐익,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하늘 저편에서 나타난 독수리 한 마리가 빙글빙글 선회하더니 그의 팔 위에 푸드덕, 날개를 접고 안착했다.
이 독수리는 호라산에 올랐을 때도 그의 지시에 따라 황궁까지 소식을 전해주던 전서조였다.
“켈럽, 빨리 갈 필요 없어. 최대한 천천히 가도록 해.”
키언이 독수리의 목에 맨 작은 통에 쪽지를 넣으며 당부했다. 그의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독수리가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독수리를 날려 보내고 난 뒤 키언이 그녀를 향해 불퉁하게 말했다.
“자, 이제 황궁에서 날 찾으러 오기 전에 어서 데이트를 하시지요.”
“저와 데이트하려고 몰래 나오신 거예요?”
샤로니아의 눈이 둥글게 휘어져 있는 걸 보니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 놀리려고 묻는 것 같다.
“그럼 내가 뭐 하러……!”
“어머나!”
때마침 호박파이를 사 들고 오다가 키언을 보고 놀란 엘런과 이멜다 때문에 대화가 끊어졌다.
“화, 황제 폐…… 읍!”
이멜다가 눈치 없이 큰소리를 내려 하자 엘런이 급하게 입을 막았다. 하마터면 당황해서 호박파이를 든 손을 사용할 뻔했지만, 다행히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좋은 시간을 방해했나 봅니다.”
키언이 못마땅한 얼굴로 팔짱을 단단히 얽어 꼈다.
영문을 모르는 엘런과 이멜다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눈만 깜박였다.
“그럴 리가 있겠어요?”
샤로니아가 웃으며 키언의 입에 호박파이 한 조각을 쑥 밀어 넣었다.
얼떨결에 호박파이를 입에 문 키언의 눈썹이 꿈틀꿈틀 춤을 추었다.
차마 뱉을 순 없어서 우물우물 씹고 있자니 그의 생애 맛본 호박파이 중에서 가장 맛있는 게 아닌가!
“이걸 사려고 줄 서서 기다린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일단 먹고 데이트하러 가요.”
샤로니아가 키언의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떼어 내며 그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살짝 훑은 뒤 싱긋 웃었다.
그 요염한 동작에 심장이 쿵 내려앉은 키언이 크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당신은 정말, 요망해.”
제국의 황제인 자신을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문제는 그런 그녀가 싫기는커녕 그녀의 손안에서 더욱 놀아나고 싶다는 것이다.
“칭찬으로 알겠어요.”
쿡쿡, 웃고 난 그녀가 호박파이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음, 정말 맛있는데?”
그때까지 얼음 동상처럼 굳어 있던 엘런과 이멜다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렇죠? 정말 맛있죠?”
“줄 서서 사 먹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니까요!”
금세 재잘재잘 목소리가 높아지는 엘런과 이멜다를 보면서 키언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녀는 자기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 요망한 것이 틀림없다고.
호박파이를 사이좋게 나눠 먹고 난 다음 키언과 샤로니아는 축제 거리를 함께 걸었다. 엘런과 이멜다에게도 자유 시간을 주었으니 아마 어디선가 축제를 만끽하고 있을 것이다.
걷다 보니 서로의 손이 스쳤다. 키언이 그녀의 손을 슬쩍 잡은 뒤 단단히 깍지를 꼈다.
“그러고 보니 이런 데이트는 한 적이 없네.”
키언이 후회스럽다는 듯이 턱을 문질렀다.
“앞으로 많이 하면 되죠.”
샤로니아가 진지한 그의 얼굴이 웃긴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그들 곁으로 아이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우다다다 지나갔다. 그녀가 부딪치지 않게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긴 키언이 일순 짙어진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물었다.
“아이를, 갖고 싶습니까?”
아까도 그렇고 아이를 볼 때마다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진다는 것을 키언은 눈치챘다.
그녀가 원한다면 힘껏 노력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반쯤은 농담 삼아 던진 질문이었는데 샤로니아의 표정이 실타래가 얽힌 것처럼 복잡했다.
“아직은요.”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은, 이라……. 키언은 그녀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아이를 원하는 건 틀림없는데, 뭐가 그녀의 심경을 흔들어 놓는 걸까.
“복수 때문입니까?”
“…….”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그게 정답이었다.
키언은 목 안에 이물질이 걸린 것처럼 답답해졌다. 만일 제가 단숨에 신전을 누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황권을 가졌더라면 그녀가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가 깍지 낀 손을 잡아당겨 그녀를 품에 와락 그러안았다.
“폐, 폐하? 사람들이 봅니다.”
샤로니아가 당황해서 낮게 속삭이며 바르작거렸다.
거리 한복판에서 애정 행각을 벌이는 두 사람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볼 테면 보라지.”
그는 오히려 뻔뻔하게 얼굴을 들어 올리고 흘끔거리는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 표정이 얼마나 당당했던지 쳐다보던 사람들이 놀라서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샤로니아는 어이가 없어서 그의 품에 안긴 채 픽, 웃었다.
뜨거운 숨이 가슴팍을 간질이자 키언은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복수 같은 건 당신이 신경 쓰지 않도록 짐이 다 알아서 할 겁니다.”
그 말은 걱정하지 말고 아이를 갖자는 걸까. 샤로니아는 그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넘치는 소유욕과 애정을 넘어서 정염이 반짝거리는 금빛 눈동자는 도저히 거부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마구스, 그 개자식이 살아 있는 한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지 않은가. 아이만큼은 안전하고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렇게 위태로운 상황에서 약점을 늘리는 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었다.
“안 돼요. 나도 도울 거예요. 수확제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일을 추진해야겠어요.”
주먹을 불끈 쥐고 결의를 다지는 그녀를 보고 키언은 쓰게 웃었다.
그녀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선 마구스를 옭아맬 준비가 착착 진행 중이었다.
결국 마구스를 처리해야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인데. 키언은 복잡한 심경이었지만 품 안의 아내는 그것과는 별개로 너무 사랑스러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샤로니아가 고개를 젖혀 자신을 말끄러미 올려다볼 때면 말캉한 입술을 삼키고 싶은 충동을 견딜 수 없었는데,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맑고 푸른 눈동자에 오롯이 자신만 담겨 있는 이때가 좋았다.
키언이 손가락으로 살며시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자 샤로니아가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이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난 뒤에는 항상 진한 입맞춤이 뒤따랐었다. 하지만 여기는 축제가 한창인 거리 한복판,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샤로니아가 어떻게든 키언을 말려야겠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저기다! 저기 계신다!”
없어진 황제를 찾아 헤매던 황궁 기사단이 키언을 발견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필이면……!”
키언은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난 기사단을 보고 미간을 찡그렸다. 아직 데이트다운 건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할 수 없군요…….”
그가 덤덤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을 보고 샤로니아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도 황궁 기사단이 이렇게 빨리 그들을 찾아낼 줄은 몰랐으니까.
그래도 그녀는 키언이 이쯤에서 마음을 접고 돌아가리라 생각했다.
“……뛰어요!”
그가 제 손을 이끌고 도망치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