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샤로니아가 승마를 배우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기뻐한 사람은 이멜다였다.
“황후 폐하의 승마복을 만들 수 있다니, 저는 정말 행복해요!”
그렇게 기쁜 얼굴로 자기 작업실로 달려간 이멜다가 이틀 만에 완성된 승마복을 들고 왔다.
아마 일주일 후쯤이면 밤낮없이 지어 댄 각종 승마복이 옷장 한편을 가득 메울 것이다.
그리고 승마복이 완성되자마자 어쩔 수 없이 승마를 가르치게 된 키언이 마장에 나타난 샤로니아를 보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황후, 복장이 꽤…….”
“바지가 이렇게 편한 줄 몰랐네요.”
활짝 웃으며 대답하는 그녀 때문에 키언은 급하게 뒷말을 삼켰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복장이 꽤 야한데’였으니까.
몸에 꼭 맞게 달라붙는 승마복은 그녀의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매끈한 실루엣은 자꾸만 시선을 잡아끄는 마력이 있었다.
크흠, 키언은 괜스레 헛기침하며 눈을 부릅떴다. 그 자리의 다른 수컷들에게 경고의 눈빛을 발사한 뒤 그는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섰다.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 그녀를 가리려는 속셈이었다.
“잘, 어울립니다.”
불이 일 듯하는 소유욕을 감춘 채 그는 그렇게만 말했다. 잘 어울리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저 혼자 보고 싶은 것이 문제였으니까.
“감사해요.”
말을 보고 살짝 들뜬 샤로니아가 상기된 얼굴로 밝게 대답했다. 키언은 그 얼굴 또한 독점하고 싶은 욕망을 느끼며 슬쩍 쓴웃음을 토해 냈다.
“제가 탈 말인가요?”
제국에서 가장 우수한 혈통을 가진 말인 ‘로렌스’가 기품 있게 걸어오는 것을 보고 샤로니아의 눈이 반짝거렸다.
로렌스는 검은색 윤기가 흐르는 털에 풍성한 갈색 갈기를 가졌고, 이마 중앙엔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흰색 털이 나 있었다.
“멋진 아이로구나.”
샤로니아가 감탄하며 조심스럽게 로렌스의 털을 쓰다듬었다. 로렌스도 그녀가 마음에 들었는지 거부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때, 마부가 키언이 평상시에 타는 애마인 ‘티그리스’를 데려왔다. 티그리스는 눈처럼 새하얀 백마였다.
“어머, 속눈썹도 하얀색이네.”
샤로니아가 티그리스의 외모에 감탄했다. 그러자 티그리스가 샤로니아의 손길을 원하는 것처럼 그녀에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폐하, 방금 보셨습니까?”
마부가 기함하며 입을 쩍 벌렸다. 왜냐하면 티그리스는 순수 혈통에 아름다운 외모와는 달리 성질이 사납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지정된 마부와 키언 외에 손을 댄 사람은 머리로 들이박거나 발길질을 하는 등 포악한 행동을 하도 많이 해서 아무도 이 백마에게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 티그리스가 마치 온순한 양이라도 된 듯이 샤로니아에게 머리를 들이밀다니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내가 마음에 드니? 나도 네가 마음에 들어.”
샤로니아가 상냥한 목소리를 내며 갈기를 쓰다듬어주자 티그리스가 알아들은 것처럼 작게 투레질을 했다.
그러자 아까부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로렌스가 슬쩍 티그리스를 밀어내고 샤로니아에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서로 경쟁하듯이 샤로니아에게 관심을 요구하던 티그리스와 로렌스가 순식간에 싸울 듯이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오, 맙소사!”
키언이 이마를 짚으며 탄식했다. 짐승들도 어쩌면 이렇게 보는 눈이 똑같은지!
특히 그의 애마인 티그리스는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만큼 그의 생각과 취향을 읽을지도 모르겠다.
“티니.”
키언이 자신의 애마를 엄한 목소리로 불렀다.
제 주인의 목소리에 티그리스가 비로소 키언을 눈에 담고 그에게 다가갔다.
전쟁터에서 몇 번이나 서로의 목숨을 구한 전적이 있기에 티그리스는 키언의 말이라면 거의 즉각적으로 반응을 나타냈다.
“너는 있다가 실컷 달리게 해 줄게.”
키언이 말의 갈기와 뺨을 쓰다듬으며 말하자 마부가 티그리스의 고삐를 잡고 끌고 갔다. 티그리스가 순순히 마부를 따라가는 것을 보고 샤로니아가 짧게 감탄했다.
일단 오늘의 목표는 샤로니아가 말을 탈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자, 말에 오르는 법부터 배워 봅시다.”
키언이 샤로니아를 향해 부드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위에 제 손을 겹친 샤로니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잘 부탁드려요, 폐하.”
아무래도 그녀는 미소 하나로 자신을 조련하는 데 타고난 사람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열정적으로 가르치고 싶은 마음은 들진 않을 테니까.
“여기 이 등자에 발을 넣고 중심을 잘 잡은 뒤, 반동을 이용해서 단번에 안장에 올라앉는 겁니다.”
천천히 설명한 키언이 먼저 시범을 보였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한 동작으로 훌쩍 말 위에 오르자 샤로니아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멋있어요, 폐하.”
그녀의 칭찬에 우쭐한 마음이 불쑥 솟아올라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내가 그런 말을 많이 듣긴 하지.
햇살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은발을 한 차례 쓸어 올린 그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자, 당신 차례요.”
혹시라도 샤로니아가 다칠까 봐 주변에는 황실 기사단과 의원까지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녀가 말에 오를 준비를 하자 마부가 사명감이 흐르다 못해 넘치는 얼굴로 로렌스의 고삐를 단단히 그러쥐었다.
왠지 과도한 걱정과 부담스러운 시선이 제게 향했지만 샤로니아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배우길 좋아했기에 씩씩하게 등자에 발을 끼워 넣었다.
“우와, 생각보다 말이 높네요.”
키언처럼 멋지게 오르지 못하고 그의 힘을 빌려 낑낑거리며 안장 위에 자리를 잡은 샤로니아가 달라진 눈높이를 보고 감탄을 내뱉었다.
“마음에 듭니까?”
“네, 아주 마음에 들어요.”
그녀가 해사하게 웃는 얼굴이 햇살 아래 눈부시게 빛났다.
키언은 그 얼굴을 새기듯 눈에 담은 뒤 직접 고삐를 끌며 산책에 나섰다.
마장 뒤쪽으로 난 평평한 오솔길을 걸어가며 그가 물었다.
“승마에 관한 책은 몇 권이나 읽었습니까?”
“음…….”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는 걸 보니 권수가 꽤 많은가 보다. 제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샤로니아의 착실함에 키언은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삼켰다.
“10권쯤요.”
그 10권을 읽는 동안 헤르몬 궁의 시녀들까지 모두 그녀에게 물이 든 게 틀림없었다. 샤로니아가 말을 타는 역사적인 순간을 보겠다고 여기까지 따라온 시녀들로 주변이 시끄러울 정도였으니까.
그녀는 사람을 이끄는 특이한 매력을 가졌다. 예전에는 그것을 시샘하는 무리들도 있었으나, 황후가 된 지금은 오히려 그런 매력이 강점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헤르몬 궁이 황실에서 가장 시끄러운 곳이 된 것을 보면 확실했다. 그녀가 현재 먹고, 입고, 생각하는 모든 관심사에 궁 전체가 들썩였으니까.
“로렌스는 아주 점잖은 말이지만, 그래도 자극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소리를 지르거나 자극하면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샤로니아가 승마에 대한 이론은 빠삭할 것이 뻔했지만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은 키언이 조곤조곤 주의할 점을 일러주었다.
오솔길을 한 바퀴 돌았을 때였다.
“속도가 너무 느려요.”
안전을 위해 어린이 승마 교실 수준으로 느리게 이어지는 산책이 답답했는지 그녀가 말했다.
내심 그녀가 그렇게 말해 주길 기다리고 있던 키언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습니까?”
그러곤 그가 말 위로 훌쩍 올라탔다.
“어머!”
놀란 샤로니아가 작게 탄식을 내뱉었고 로렌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는지 잠깐 푸르르, 콧김을 내뿜었다.
하지만 튼튼하고 윤기가 흐르는 검정말은 곧 중심을 잡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기품 있는 자세를 유지했다.
덩치가 큰 키언 덕분에 그의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 한 샤로니아가 웃으며 말했다.
“이것도 좋은 방법이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키언이 발로 가볍게 로렌스의 배를 두드리자 말이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꺅! 황후 폐하!”
제 시야에서 사라지는 샤로니아가 못내 아쉬운지 시녀들 사이에서 잠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조금 쌀쌀해진 바람이 뺨을 차갑게 만들었지만 서로의 온기 때문에 춥진 않았다.
둘은 눈부시게 빛나는 찬란한 태양 아래로 울긋불긋 낙엽이 우거진 숲을 내달렸다.
숲의 한가운데, 아무도 없는 공간에 다다른 키언이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특유의 숲이 주는 청량한 공기가 폐 속에 가득 들어차는 느낌이 좋았다.
앉은 자세 그대로 뒤에서 샤로니아를 끌어안은 키언이 그녀의 목덜미에 깊숙이 입을 맞췄다.
짜르르 떨리는 쾌감이 발끝부터 전신을 휩쓸어 그녀는 잠깐 더운 숨을 토해냈다.
그녀의 숨소리를 들은 키언은 한 번으로 입맞춤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곧이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걷어내고 뒷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움찔, 어깨를 떠는 그녀를 보니 어쩐지 멈출 수가 없다.
“승마가 이렇게 즐거운 운동일 줄은 몰랐는데.”
그가 말할 때마다 입술이 뒷덜미에 닿아 간질거렸다.
“저도 몰랐지 뭐예요. 승마 선생님이 이렇게 야할 줄은.”
샤로니아가 쿡, 웃으며 하는 말에 키언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 * *
키언이 한 손으로도 잡을 수 있을 만큼 가는 샤로니아의 허리를 지그시 눌렀다.
“아흑!”
그녀가 움찔거리며 신음을 흘렸다.
키언은 눈치 없이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한 제 몸뚱어리를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냐하면 지금 그녀는 승마로 무리를 한 탓에 근육통을 호소하는 중이었으니까.
“멀리 가자고 했을 때, 말려야 했습니다.”
키언은 너무 오랫동안 말을 탄 것을 후회하며 말했다.
그녀가 즐거워했던 탓에 잊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제 생각보다 얼마나 허약한지에 대해서 말이다.
“재밌었으니까 이쯤은 괜찮…… 흣!”
키언의 손이 닿을 때마다 아픈지 그녀가 신음을 뱉어 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신음이 야릇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환자야.’
키언은 마음속으로 수십 번 그 말을 중얼거렸다.
어쩌면 푹신한 침구와 잠옷 한 겹만 입은 그녀의 몸이 문제인지도 몰랐다. 손끝에 닿는 낭창한 허리와 보드라운 피부의 감촉에 반응을 나타내지 않을 남자가 몇이나 될까.
그는 제 육체에 나타난 반응을 애써 모른 척하며 다시 한번 신중하게 허리 마사지를 시작했다.
“이렇게 허리에 무리가 가는 일일 줄은 몰랐…… 흐응…….”
하아, 미치겠네. 키언이 움찔, 손을 멈춘 뒤 한 차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까 숲에서 맛본 그녀의 입술로는 전혀 양이 차지 않은 몸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고생할 건데 승마는 이쯤에서 그만두는 편이…….”
“싫어요.”
샤로니아가 고개를 돌려 고집스러운 얼굴로 키언을 바라보았다.
몸은 좀 아프지만 바람이 머리칼을 날리고 풍경이 제 뒤로 스쳐 지나가는 그 쾌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아마 몇 번만 이렇게 고생하다 보면 곧 몸은 적응할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말을 타고도 그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비교 대상이 최고 수준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샤로니아는 키언을 설득하기 위해 엎드린 상태에서 아까보다 크게 몸을 돌렸다.
그 덕분에 품이 넓은 네글리제가 흘러내리며 한쪽 어깨가 훤히 드러났다.
키언의 눈동자가 한차례 흔들리는 것을 본 샤로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제 승마 선생님은 승마는 안중에 없는 듯이 엄청나게 불량하고 야한 눈빛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대가 아픈 것을 감수하고 배우겠다면 말리진 않겠습니다. 다만…….”
“다만?”
그녀는 홀린 듯이 그의 말을 따라 했다. 왠지 모르게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나는 그리 좋은 선생은 못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 끝나기도 전에 키언이 그녀의 입술을 답삭 삼켰다. 온몸이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진한 키스를 퍼부은 그가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살거렸다.
“나는 아주 야하고 문란한 선생이 될 예정이라서. 그래도 좋다면야 얼마든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아아, 승마가 이런 쪽으로 힘든 운동일 줄은 전혀 몰랐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