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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망한 구원자 (75)화 (75/123)

75화

테오르는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하면 이 불편한 영애를 떼어 낼 수 있을까.

모든 것을 제힘으로 처리할 순 없는 법이다. 안 될 때는 남의 힘이라도 빌려야지! 다른 곳도 아니고 헤르몬 궁 바로 옆이니 어떻게든 될 것이다. 고민하던 그의 눈에 반짝 빛이 들어왔다.

“이쪽입니다.”

그는 앞장서서 걷던 아르미네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그녀를 헤르몬 궁에 딸린 별채 쪽으로 인도했다.

헤르몬 궁의 왼편에 위치한 별채는 단독 건물이었지만, 회랑이 본궁과 이어져 있는 구조였다. 그래서 헤르몬 궁의 시종들이 빈번하게 오가는 듯했다.

별채로 향하는 길은 정원이 매우 잘 정비되어 있고 본궁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지만, 그런 게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아르미네가 까칠하게 물었다.

“장소가 여기밖에 없어요?”

최대한 황후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던 아르미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팔짱을 단단히 얽어 꼈다.

하지만 아무리 못마땅한 척을 해 봤자 그녀는 부탁을 한 쪽이고, 그 부탁을 들어주는 것은 오로지 상대방의 몫이다.

테오르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영애가 보기에 제가 한가해 보일지 모르겠으나, 이래 봬도 꽤 바쁜 몸입니다.”

테오르는 그래서 멀리 갈 수 없다는 말을 돌려서 했다.

‘보기보다 물렁한 타입은 아니네.’

아르미네는 관찰하듯이 테오르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니 곱슬기가 있는 적갈색 머리칼과 회청색 눈동자가 꽤 샤프한 이미지였다. 황제의 보좌관씩이나 되는 걸 보면 아마 꽤 명망 있는 가문의 자제일 것이다.

일단 아쉬운 사람은 자신이었으니 아르미네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테오르가 안내한 곳으로 들어갔다.

“잠시만 계십시오.”

테오르는 그녀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응접실을 나왔다.

‘이제 어쩐다…….’

그는 문을 등지자마자 머리를 팽팽 굴렸다. 그녀와 한가하게 마주 보고 앉아 노닥거리며 차를 마실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테오르가 무릎을 탁, 치며 빙긋 웃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테오르가 오지 않자 아르미네가 버럭 소리 질렀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아르미네는 화가 났다.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던 테오르가 감감무소식이었기 때문이다.

레이디를 이렇게 홀로 기다리게 하는 것은 신사답지 못한 행동이었고 이제껏 그녀는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오기만 해 봐.’

그녀는 테오르에게 퍼부어 줄 말을 속에 차곡차곡 쌓으며 일단 기다렸다.

그때, 드르르륵, 트레이 끄는 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차를 준비해 오기에 시간이 이렇게 걸린 걸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기대심이 차올랐다.

아르미네는 테오르가 엄청나게 대단한 것을 준비했다면 그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기다리게 만든 것을 용서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그녀가 마주한 장면은 대단하긴 했으나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다시 보니 반갑네. 그런데 길을 잃었나? 정문이 훨씬 찾기 쉬웠을 텐데.”

아르미네는 아주 당당하고 고상한 걸음걸이로 걸어 들어오는 샤로니아를 보고 멍하게 입을 벌렸다.

샤로니아가 코앞까지 당도했을 때야 아르미네는 자신이 인사하는 것도 잊고 앉아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일단 황급하게 예를 갖춰 인사한 그녀는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황후와의 만남을 미루고 싶어서 어떻게든 자리를 피하려고 했던 것인데 오히려 이렇게 빼도 박도 못하게 될 줄은 몰랐다.

‘젠장! 감히 날 속이다니!’

가만두지 않을 테다. 아르미네가 아득 이를 갈았다.

기대가 컸던 만큼 입 안이 썼다. 하지만 테오르를 어떻게 할지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앉지. 안 그래도 수확제 일로 의논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자애로운 미소를 띤 채 하고 싶은 말을 또박또박 다 하는 황후를 상대해야 했으니까.

“아, 네……. 황후 폐하.”

그리고 어쨌든 죽기보다 싫은 말을 해야 했으니까.

* * *

테오르는 난감한 자리를 일단 샤로니아에게 토스하기는 했으나 불안했다.

‘날 가만두지 않겠지?’

괜한 일을 벌인 건 아닐까 후회가 몰려왔다.

‘일단 살길을 만들어야겠어.’

그는 황제의 보좌관으로 일해 오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보았다. 그래서 사람의 유형을 파악하는 데 도가 튼 편이었다.

아르미네는 이기적이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전형적인 귀족 영애였다. 그런 부류일수록 뒤끝이 어마어마하게 길기 때문에 나중에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

절대, 더 이상은 얽히고 싶지 않아. 테오르는 불안하게 중얼거렸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동자에 호감의 빛이 떠올랐던 것이 잊히지 않았다.

‘방법을 강구해야 해. 방법을…….’

고민하던 테오르의 눈에 헤르몬 궁으로 향하는 헤이든이 들어왔다. 마침 그녀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백작님! 델라크 백작님!”

그는 생명의 은인을 만난 것처럼 애타게 그녀를 불러 세웠다.

헤이든이 의아한 표정으로 테오르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을 이토록 반가워할 일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행여나 헤이든이 그냥 갈까 봐 전력으로 뛰어온 테오르가 숨을 헐떡이며 다짜고짜 말했다.

“도와주세요! 아니, 살려 주세요.” 

“난 살리는 것보단 죽이는 쪽 전문인데?”

흐익, 테오르는 본능적으로 제 목이 잘 붙어 있는지 더듬거리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응? 나더러 뭘 하라고?”

그의 어이없는 부탁을 들은 헤이든이 팔짱을 낀 채 기막힌 얼굴로 테오르를 바라보았다.

“불쌍한 목숨 하나 살린다고 생각하시고 좀 도와주시면 안 됩니까?”

테오르는 마지막 구원의 동아줄을 잡은 것처럼 간절하게 헤이든을 바라보았다.

“내가 아까도 말했지. 난 죽이는 쪽……!”

“그런 살벌한 소리 좀 하지 마시고요!”

헤이든이 난감한 표정으로 얼굴을 긁적였다. 얼마나 절박하면 자신에게 이런 부탁을 할까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뜻 하겠다는 대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나참, 아무리 그래도 애인 행세라니……?”

내가 그게 가능하겠어? 헤이든은 별 해괴한 말을 다 듣겠다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테오르의 상황이 딱하긴 했으나 평소에 나긋나긋한 레이디의 모습과는 담을 쌓고 살아온 그녀로서는 그의 말이 허무맹랑하게만 들렸다.

“그간의 정을 봐서 도와주십시오.”

여기서 테오르가 말하는 ‘정’이란 그동안 그녀가 키언에게 격 없이 막 대한 것을 뒷수습해 주고, 그녀가 저지른 각종 사고의 뒤처리를 도맡아 했던 것에 대한 보상을 의미했다.

그의 말을 용케 알아들은 헤이든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소소한 것에서부터 대형 사고까지 저지른 일이 원체 다이내믹하다 보니 양심이 콕콕 찔린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

에라이, 나도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헤이든이 그의 청을 받아들였다.

* * *

헤르몬 궁을 나온 아르미네가 후우, 긴 한숨을 뱉어냈다.

‘형편이 그렇게 어려웠다면 진즉에 말하지 그랬나.’

남에게 동정받은 적이 처음이라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비용은 내가 어떻게든 충당해 볼 터이니 걱정하지 말게.’

결국은 황후에게 빚진 기분으로 감사 인사를 거듭해야 했다.

만일 그녀의 가문이 부유했다면 수확제를 성황리에 마친 뒤 그 공로를 릴리안 백작가가 독차지했을 터였다.

하지만 일이 완전히 틀어졌다. 제 가문의 치부가 황실에 다 까발려졌을 뿐만 아니라 황실의 은덕을 입은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멸문된 디센베르 후작가나 바르칼라 공작가 대신 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이 되고 싶었다. 황실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세력을 키워 누구든 제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황실로부터 받은 은혜 때문에 무조건 황실 편에 서서 황실을 지지해 줘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화살은 애꿎은 테오르에게 향했다.

“만나기만 해 봐……!”

그녀는 씩씩거리다가 반대쪽에서 걸어오는 남녀 한 쌍을 보고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황후에게 넘기고 사라진 그가 델라크 백작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그것도 팔짱을 끼고서.

분위기가 참 묘했다. 자신을 바라볼 때는 짓지 않았던 다정한 표정 하며 헤이든이 다치기라도 할까 봐 발밑을 살피는 세심함이 왠지 기분을 팍 상하게 만들었다.

제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여기사. 그것이 헤이든 델라크에게 항상 따라붙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발밑을 살펴 주다니!

아르미네가 독기 어린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아, 릴리안 백작 영애. 아까는 제가 실례했습니다. 암만 생각해도 차를 마시면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아서요.”

테오르가 먼저 알은척하며 아까 일에 대해 사과했지만 아르미네는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테오르의 팔에 꼭 붙어있는 헤이든이 미칠 듯이 신경 쓰일 뿐이었다.

“굉장히 중요한 약속, 이었나 보군요.”

아르미네가 여전히 그들의 팔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억지로 목소리를 짜내어 말했다.

“그럼요, 1초도 늦어선 안 되는 중요한 약속이었지요.”

테오르가 빙긋 웃으며 보란 듯이 헤이든의 손등을 도닥였다.

그의 손길에 헤이든이 잠시 움찔거렸지만, 평정심이 깨지기 시작한 아르미네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 군요.”

아르미네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녀의 눈동자가 잘게 진동했다.

‘자, 이때예요!’

이때야말로 쐐기를 박을 한마디가 필요한 절호의 타이밍이었다.

테오르가 헤이든을 향해 눈을 깜박였다.

‘무슨 말이라도 해 봐요. 아까 연습한 거 있잖아요.’

‘알았다고, 이 자식아.’

헤이든은 테오르를 무섭게 째려본 뒤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도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조금도 납득이 되지 않아서 심호흡을 한 번 더 했다.

“헤이든은 기다리는고 잘 못 해서 시저요.”

그녀는 혀 짧은 소리로 한껏 귀여운 목소리를 내고 다시 죽일 듯이 테오르를 노려보았다.

‘한 번 더 시키면 죽여 버린다.’

그녀의 생각이 그대로 읽혔던 탓에 테오르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하하, 그럼요. 우리 사랑스러운 백작님은 절대 기다리면 안 되시죠.”

테오르는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제 혀를 콱 깨물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두 분은…….”

얼굴빛이 창백해진 아르미네가 중얼거리듯 꺼낸 말에 헤이든과 테오르는 보란 듯이 서로 착 달라붙어 섰다.

자, 어때? 엄청 잘 어울리는 한 쌍이지? 그렇다고 말해 줘. 네가 비집고 들어올 공간 같은 건 없다는 걸 어서 인정하라고. 둘은 아르미네가 빨리 단념하고 돌아가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역시 그렇군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가 제게 호감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아르미네가 잠시 휘청거렸다.

하루 동안 자신감이 꺾일 일밖에 겪지 않은 그녀는 예전처럼 성질을 낼 기운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들이대 봤자 자신의 꼴만 우스워질 뿐이다.

“오늘 일은 약속이 있는 걸 모르고 제 마음대로 요청한 부분도 있으니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어요.”

흥, 이 세상에 잘난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다시 도도한 표정으로 돌아온 아르미네가 큰 선심을 쓰듯이 말했다.

“이해해 주신다니 감사드립니다.”

아르미네의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을 읽은 테오르가 기뻐하며 인사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네, 살펴 가세요.”

새침한 걸음걸이로 사라지는 아르미네를 보고 테오르가 긴 숨을 몰아 내쉬었다.

아르미네가 사라질 때까지 팔짱을 풀지 못하고 기다리던 헤이든이 복화술처럼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낮게 으르렁거렸다.

“나 이제부터 내키는 대로 막살 거니까, 각오 단단히 해 둬.”

“그,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냥 살아도 엄청나게 손이 가는데, 막사는 헤이든은 정말이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뒤치다꺼리를 할 생각에 눈앞이 깜깜해진 테오르는 절박하게 헤이든의 손을 덥석 잡았다.

“살려 주세요.”

“그래서 내가, 살려 줬잖아!”

평생 해 본 적 없는 코맹맹이 소리를 내면서!

결국은 폭발한 헤이든이 테오르에게 헤드록을 걸려고 시도했을 때였다.

“두 사람 여기서…… 뭐 합니까?”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루카스가 벙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 저하……!”

헤이든이 아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를 내는 걸 보고 테오르가 경악하며 몸을 떨었다. 뭐야, 코맹맹이 소리 잘도 내면서!

하지만 헤드록을 걸려다 멈추는 바람에 모양새가 꽤 이상해졌다. 헤이든이 테오르의 목에 손을 감고 안기는 것 같은 모습이 되었으니까.

“설마, 오해 같은 건 안 하…….”

“내가 눈치 없이 좋은 시간을 방해했나 봅니다.”

헉, 오해를 잘도…… 하잖아!

테오르의 눈동자가 지진을 일으키며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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