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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망한 구원자 (74)화 (74/123)

74화

잠에서 깬 키언은 옆자리가 비어 있음을 깨닫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행여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그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에 수백, 수천 번의 나쁜 상상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그를 친친 감았다.

“일어나셨어요?”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맑은 호수처럼 파란 눈을 마주한 키언은 너무나도 안도한 나머지 얼굴을 쓸어 올리며 어깨가 아래로 내려갈 정도로 깊은숨을 내쉬었다.

“어디가 불편하세요?”

샤로니아가 이상해 보이는 키언의 상태를 살피려고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키언은 막 일어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화사해 보이는 샤로니아를 눈에 담았다. 그러고는 당장이라도 없어질 신기루를 본 것처럼 몇 번이나 눈을 깜박였다. 하얗게 질렸던 키언의 안색이 그녀가 환영이나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한 뒤에야 비로소 정상으로 돌아왔다.

와락, 키언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당신이 잘못된 줄 알고…….”

강철처럼 강한 남자가 이렇게 한없이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은 꽤 복잡한 기분이 들게 했다.

자신이 이 남자의 유일한 약점이 되었다는 것과 덩치 큰 남자가 어린아이 같아 보일 수도 있다는 것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폐하, 저는 이제 예전의 제가 아니에요. 그러니 그런 걱정은 그만하셔도 돼요.”

샤로니아는 정말로 아이를 달래듯이 그의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었다.

“샤론, 그대가 여신이라고 해도 난 여전히 걱정할 거야. 당신을 결코 잃고 싶지 않으니까.”

그의 머리를 쓰다듬던 샤로니아의 손끝이 잠시 움찔거렸다.

이 남자를 무슨 수로 말리겠어.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뒤 장난스럽게 그의 뺨에 촉, 입을 맞췄다.

“아무 일도 없다는 걸 아셨으니까 인제 그만 일어나세요. 보여 드릴 게 있어요.”

보여 줄 게 있다는 말에 키언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왠지 조금 신나 보이는 얼굴로 샤로니아가 손짓을 했다.

“폐하께서 이번에 산 마도구를 보고 착안하게 된 거예요.”

그녀가 가리키는 곳엔 원통 모양의 유리그릇이 놓여 있었다. 특이한 점은 유리그릇에 담긴 물의 색깔이 묘하게 밝다는 것이었다. 언뜻 보기에 빛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대화 내용을 엿들을 수 있는 마도구와 유리그릇에 담긴 물이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던 키언이 설명을 요구하듯 샤로니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게 있는 능력으로 물을 생물처럼 다룰 수 있다면 말이에요. 얘도 남의 말을 듣고 전해 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녀가 가리킨 ‘얘’가 물이라는 건 심심치 않게 있었던 일이라 곧바로 이해했다. 하지만 물에게 도청을 시키겠다고?

키언이 눈썹을 꿈틀거리자 샤로니아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물은 어디나 갈 수 있지요.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고요.”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눈이 마치 악동 같았다.

결국 키언은 헛웃음을 뱉어 내며 그녀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와는 달리 신전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겠군요.”

“네, 바로 그거예요.”

환하게 웃는 샤로니아의 얼굴이 눈부셨다.

키언은 이제 대놓고 피식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부인은 사람을 놀래는 재주를 가지셨습니다.”

장난처럼 정중하게 속살거리는 말에 샤로니아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제 장점이죠.”

* * *

허튼 데 돈 쓰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릴리안 백작이 유일하게 한도를 두지 않은 것이 아르미네에게 들어가는 돈이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그녀에게 천정부지로 돈이 들어갔지만. 릴리안 백작은 그걸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에게 투자한 만큼 돌려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백작의 비틀린 계산속과 백작 부인의 맹목적인 사랑 속에서 아르미네는 고집이 세고 물정을 모르는,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귀족 영애로 자라났다.

“……그렇게 됐어요.”

곱게 자란 만큼 뻔뻔한 구석이 많았던 아르미네는 황궁에서 있었던 일을 별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백작 부인에게 말했다.

“뭐? 그래서 돈을 얼마나 충당해야 하는데?”

백작 부인은 생각지도 못한 일을 저지르고 온 딸을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그건 일을 진척시켜 봐야 알겠죠. 더러운 골목을 깔끔하게 바꾸려면 아무래도 꽤 들지 않겠어요?”

맙소사! 백작 부인이 한쪽 머리를 짚으며 끙, 앓는 소리를 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 위해 그녀는 꽤 공을 들였다. 하지만 그것이 이토록 제 발목을 붙들 줄은 몰랐다.

“왜 그러세요? 좋은 기회잖아요. 이때야말로 릴리안 백작가의 위세를 보여 줄 좋은 기회라고요.”

아르미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하는 말에 백작 부인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저 철없는 것을 어쩌면 좋지. 릴리안 백작가가 재력이 넘친다면 당연히 아르미네의 말처럼 이번 일이 기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백작가의 재정 상태는 현재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얼마 전 백작령의 주요 수입원이던 광산이 무너지면서 인부 몇 명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당연히 광산도 폐쇄되었다.

괜한 걱정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아서 아르미네에게는 비밀로 했던 일인데 지금은 여러모로 후회가 됐다.

“황실에 잘 보여서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셨던 건 어머니셨어요.”

아르미네가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 섞인 말투로 백작 부인을 탓했다.

“잘 보이는 게 돈을 이렇게 쏟아붓는 방법만 있는 건 아니잖니?”

언짢아진 백작 부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을 때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릴리안 백작이 모녀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의 손에는 황실 인장이 찍힌 편지가 들려 있었다.

“황제가 수확제에 투자해 주어 감사하다는 편지를 보냈구나.”

릴리안 백작이 화를 억누르며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 짜내는 것을 본 아르미네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직도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다만 백작에게 대들었다간 좋을 일이 없었기에 할 말을 참고 있는 것뿐이었다.

“얘가 아직 어려서 뭘 몰라서 그런 거예요.”

백작 부인이 아르미네를 감싸고돌자 릴리안 백작의 표정이 더 딱딱하게 굳었다.

“부인이 그렇게 만든 게 아니라요?”

“어떻게 그런 말씀을……. 너무하세요.”

“두 분 다 그만 하세요.”

아르미네가 자칫 싸움으로 번질 뻔한 대화를 제지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상황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 집에 돈이 없어요?”

“…….”

혹시나 싶어서 한 질문인데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르미네는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저 홧김에 던져 본 말이었는데 정말 그게 사실이라고?

“하? 언제부터요? 설마 처음부터 그랬는데 안 그런 척하고 살았던 거예요?”

“아르미네.”

백작이 서늘하게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그녀는 겨우 흥분을 가라앉히고 입을 다물었다. 백작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 얼굴을 쓸어 올린 뒤 감정을 추스르고 말했다.

“편지 말미에 혹여 금액이 부담스럽다면 언제든 편하게 말하라고 적혀 있더구나.”

아르미네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 말인즉슨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내뱉은 당사자, 즉 자신이 약속을 번복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이제껏 남에게 비굴하게 고개를 숙여 본 적이 없었다. 아쉬운 소리를 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아량이 넓으시군요.”

사람 속도 모르고 백작 부인이 다행이라며 도리어 황제를 칭찬했다. 백작도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지금 같은 상황에서 무조건 약속을 이행하라고 엄포를 놓았더라면 어찌 되었을지 생각하니 그저 다행이란 말밖엔 나오지 않았다.

릴리안 백작은 혹여나 제멋대로인 아르미네가 다른 말을 할까 싶어서 엄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내일 당장 황궁에 다녀오너라.”

백작마저 그녀의 속내를 알아주기는커녕 등을 떠민다.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르미네의 편에 서 주던 백작 부인도 지금은 제 편이 아니었다.

하아, 젠장. 일이 왜 이렇게 돌아간담.

아르미네는 신경질적으로 치맛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 * *

루하르 제국의 수확제는 귀족과 평민이 다 함께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축제였다.

그래서 이 시기는 제국 전체가 들썩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안 그래도 한산하던 신전이 수확제로 인해 더욱 텅텅 비었다.

“신녀들 교육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마구스가 서늘하게 묻는 말에 새로운 신녀장 페릴이 고저 없이 답했다.

“현 상황의 문제점을 신녀들에게서 찾고자 하십니까?”

마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입 안의 혀처럼 굴던 리비어와는 달리 페릴은 고분고분한 맛이 없었다. 그녀는 리비어와 같은 시기에 신전에 들어온 신심이 깊은 신녀였다. 리비어와 완전히 반대되는 성향을 가졌기에 신녀들은 그 둘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양분화되었다.

리비어가 죽고 난 지금 상황에서는 페릴을 신녀장으로 삼는 것이 가장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고분고분하지 않으니 여간 짜증 나는 것이 아니다.

마구스는 창백할 정도로 하얀 얼굴에 남색 머리와 회색 눈동자를 한 여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원인이 뭐가 되었든 현 상황을 타개할 방안을 찾아야 할 것 아닌가.”

그의 눈빛이 살기를 띠고 흉흉한 빛을 발했지만 페릴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답했다.

“신녀 측은 제가 문제없이 교육시키겠습니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페릴은 신을 간절히 찾는 자는 결국 모든 어려움을 이긴다는 믿음을 가지고 일을 해결하려고 했으니까.

어떻게 보면 대사제장인 자신보다 신심이 더 뛰어난 것 같다. 마구스는 한숨을 내쉬며 그만 가 보라고 손을 내저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신전 내에서 더 이상 잡음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신전의 상황이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지고 있었다.

“미카엘.”

“예, 카티르.”

마구스가 갈라진 목소리로 제 심복을 불렀다. 새카만 후드를 뒤집어쓰고 어두운 그림자 속에 서 있던 미카엘이 조용히 걸어 나왔다.

“지시한 일은 잘되어 가고 있겠지?”

“그럼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후드 아래로 드러난 미카엘의 입매가 씨익, 기묘하게 뒤틀렸다.

“얼마나 더 걸릴 것 같은가?”

“한두 달만 있으면 카티르께서 원하시는 수준에 이를 것 같습니다.”

미카엘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마구스가 일순 흠칫 어깨를 떨었다.

“왜 그러십니까?”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우는 마구스를 보고 미카엘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에 우리 외에 누가 있는 건 아니겠지?”

그 말을 들은 미카엘이 별소릴 다 듣겠다며 피식 웃었다.

“허락받은 자가 아니고선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미카엘이 괜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니었다. 지금 그들이 만나는 방은 사제들이 입구를 지킬 뿐만 아니라 특별한 결계에 의해서 보호되기 때문에 마법도 통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왜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지?”

기분 탓인가? 마구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방 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아무리 사방을 살펴보아도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제 옆에 물 잔이 하나 놓여 있을 뿐.

그런 마구스의 모습을 본 미카엘은 속으로 킬킬거리며 웃었다. 드디어 그도 망령이 들기 시작했나보다, 라면서.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차마 인간이 저질러서는 안 될 끔찍한 일을 자행하면서 미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니 말이다.

“저는 그럼 확실히 준비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꽤 재밌는 장면을 목격한 것에 만족하며 미카엘이 다시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 * *

다음 날, 아르미네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그녀는 귀족 영애가 해서는 안 될 말을 101가지쯤 읊조리며 황궁에 도착했다.

땅에 발을 딛기도 전에 이미 자존심이 갈기갈기 찢긴 느낌이었다.

‘제기랄…….’

입술을 곱씹으며 그녀는 최대한 걸음을 천천히 늦추었다. 헤르몬 궁의 화사한 외관이 눈앞에 다가올수록 기분이 저조해졌다.

황제와 황후 앞에서 그토록 큰소리를 쳤는데 인제 와서 못하겠다고 어떻게 말을 한단 말인가!

뒤에서 자신을 비웃을 다른 영애들을 생각하니 지금이라도 당장 되돌아가고 싶었다.

아르미네가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고 주먹을 꾹 말아 쥐고 독기 어린 눈으로 헤르몬 궁을 노려보고 있는데 저편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와, 또 만나네.’

그녀는 바쁘게 걷고 있는 테오르를 보고 문득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얼마나 자신을 마음속 깊이 연모하면 제가 황궁에 도착할 것까지 미리 알고 마중을 나왔단 말인가.

그의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잠깐 시간을 내어 만나주어야겠다. 뭐, 황제의 보좌관이니 잘 보여서 나쁠 것도 없었다. 자신이 하기 어려운 말을 황제에게 대신 전해 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아르미네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가 지나갈 길목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고 그를 기다렸다.

“여기서 또 뵙네요.”

아르미네의 목소리를 들은 테오르가 흠칫 놀라며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이게 진짜일 리 없어. 테오르는 현실을 부정하며 고개를 흔들어 보았지만 아르미네의 따가운 눈총만 더 쏟아질 뿐이었다.

“안 그래도 시간이 좀 남아서 곤란했는데 잘됐네요. 차 한 잔 줄 수 있죠?”

그녀의 뻔뻔함에 테오르가 기겁하며 대답했다.

“차, 차요? 아뇨, 제가 지금 좀 바쁜데요.”

숫기가 이렇게 없어서는. 아르미네는 쯧, 혀를 차며 자기 마음대로 상황을 해석했다. 막상 마주 보니 너무 긴장되고 부끄러워서 피하는 걸 거라고.

“지금 레이디의 청을 거절하시는 거예요?”

“아뇨, 그, 그게 아니라…….”

그래, 당연히 그게 아니겠지. 내가 먼저 차를 마시자는데 얼마나 황송하겠어. 아르미네는 테오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더 강하게 말했다.

“그럼 가요. 어디로 가면 되죠? 이쪽요?”

돌아선 아르미네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황후를 만나는 게 죽기보다 싫었는데 잘 되었다. 이렇게라도 만남을 미룰 수 있어서.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는 아르미네를 보고 테오르가 경악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오, 신이시여. 제 인생에 이상한 것이 들러붙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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