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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망한 구원자 (73)화 (73/123)

73화

그 시각, 국정회의 중 가신의 보고를 듣고 있던 키언이 갑자기 컥, 사레 걸린 소리를 뱉어 내더니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가신들이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키언을 바라보았다.

‘하아, 이 요망한 여자 같으니라고.’

키언은 간신히 기침을 멈춘 뒤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아무것도 아니네. 보고하던 내용에 대해서는 좀 더 숙고해볼 터이니 다음 회의에서 구체적인 사안을 논의하면 좋겠네.”

급하게 회의를 마무리 짓는 키언을 보고 모두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딱히 반론할 부분이 없어서 가신들은 어정쩡한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하, 몸이 안 좋으신 겁니까?”

이렇게 급하게 회의를 마무리 짓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기에 테오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

“아니, 갈 데가 생겼어.”

키언의 입가에 곤란하면서도 즐거운 듯한 미소가 떠오른 것을 보고 테오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 * *

샤로니아가 키언에게 대놓고 신호를 보낸 지 얼마 후 헤르몬 궁에 황제가 방문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그래? 그럼 어서 모셔야지.”

샤로니아는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영애들도 갑작스러운 황제의 방문 소식을 놀라워하며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섰다.

급하게 온 듯 키언의 은발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감탄을 자아내게 할 만한 잘생긴 외모였다. 황제를 가까이에서 본 영애들은 차마 소리는 내지 못하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쩐 일이십니까, 폐하.”

샤로니아가 곱게 눈이 휘도록 웃으며 키언을 맞이했다.

“어쩐 일이긴요, 내가 매시간 그대를 그리워하는 걸 알면서.”

샤로니아가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한 뒤 내미는 손에 키언이 진득하게 입을 맞추었다.

그저 예법에 따라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뿐이었지만 키언의 시선과 몸짓이 꽤 선정적이라 미혼의 영애들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모로 돌렸다.

둘은 복잡한 속사정은 일절 내색하지 않은 채 마주 보며 싱긋 웃었다.

키언은 샤로니아의 요망함을 사랑했고, 샤로니아는 제 부름에 곧바로 달려와 준 키언의 애정에 만족했으니까.

“때마침 이렇게 오셨으니 트윌라 자작 영애가 가져온 선물을 직접 드릴 수 있겠군요.”

“어머…….”

로잘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가렸다. 황후를 만나는 것만 해도 가슴이 뛰어 전날 잠을 설쳤는데 이렇게 황제를 눈앞에서 독대하게 될 줄이야.

“마, 만나 뵙게 되어 여, 영광입니다. 폐하.”

로잘린이 목소리를 떨며 선물 상자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오, 산드레이아 대륙에서 나는 무쇠 단검이로군.”

키언이 단숨에 단검을 꺼내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는 것을 본 영애들은 그제야 저 못생긴 물건이 꽤 값진 것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트윌라 자작에게 고맙다고 전해 주게.”

“기쁘게 받아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로잘린이 뺨에 홍조를 떠올린 채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의 일을 부모님께 말씀드리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하는 마음에 가슴이 부풀었던 탓이었다.

“폐하, 그리고 이쪽의 릴리안 백작 영애가 이번 수확제에 좋은 안건을 냈습니다. 백작가에서 부족한 예산을 충당하겠다고 할 정도로 이번 일에 열정적이더군요.”

이미 그들의 대화를 다 들어서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았던 키언은 웃음을 꾹 눌러 참으며 아르미네를 바라보았다.

“성공적인 수확제를 기대하겠네.”

아르미네는 미소 짓는 키언의 얼굴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은발과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그가 잔인한 전쟁귀라는 수식어와는 완전히 거리가 먼 귀공자로 보이게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생각을 다잡았다.

‘그러면 뭐 해. 난 두 번째는 죽어도 싫은걸.’

아르미네는 자신을 끔찍이 사랑했다. 외모도 가문도 그 어느 것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자신이 후궁 같은 게 되어서 눈치를 보면서 살고 싶지 않았다.

후궁이 될 바에는 차라리 백작가나 공작가의 마님이 되어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훨씬 낫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네, 감사합니다. 기대에 부응하는 수확제를 만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르미네는 도도하고 품위 있게 속눈썹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구두쇠에다 깐깐하기로 유명한 릴리안 백작이 이 소식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키언은 잠시 궁금해졌다.

엘런이 키언 뿐만 아니라 나머지 영애들의 차도 따뜻한 것으로 다시 바꿔 주었다. 이번에는 시나몬을 조금 넣은 향긋한 애플 티였다.

황제까지 참석한 자리인 만큼 제국의 문화와 국제 정세 같은 이야기가 몇 차례 오갔다. 그러다가 영애들은 이만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황제는 소문보다 잘생겨서 보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였지만, 이렇게 대놓고 팔불출일 줄은 몰랐으니까! 

시종일관 샤로니아를 바라보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그것을 아예 감출 생각도 없어 보여서 옆에 있는 사람들을 아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영애들의 생각을 알아차린 샤로니아가 매끄럽게 자리를 파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어차피 식사까지 약속된 것이 아닌, 티 모임이었기에 이쯤에서 호스트가 일어나는 것이 맞았다.

“아쉽지만 오늘은 이만 헤어지기로 하고, 다음에 다시 초대하겠네.”

“네, 황후 폐하. 너무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에도 부디 초대해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재잘재잘 인사가 오가고 영애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원을 나서던 아르미네가 근처에 서서 대기하고 있던 테오르를 보고 멈칫했다.

“당신은……?”

아르미네를 본 테오르도 단박에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첫인상이 꽤 좋지 않았던 터라 저절로 기억이 났다.

“아, 릴리안 백작 영애시군요.”

그걸 본 아르미네는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펴기 시작했다. 자신을 이토록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 남자가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라면서.

“수확제 때문에 앞으로 꽤 자주 보게 될 것 같네요. 좋으시겠어요.”

응? 그게 왜 좋은 거지? 테오르는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껌벅였다. 까탈스러운 귀족 영애에게 그게 무슨 말이냐고 캐물었다간 더 피곤해질 것 같아서 일부러 말을 아꼈다.

그런데 그걸 또다시 오해한 아르미네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참, 말도 못 하게 좋은 거야?’

그의 관심이 싫지 않았다. 하지만 아르미네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은 채 새침하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한 뒤 걸음을 내디뎠다.

등 뒤로 그의 시선이 계속 느껴졌다. 훗, 이놈의 인기란. 뭐, 그가 하는 걸 봐서 한 번쯤 차나 같이 마셔줄 의향은 있었다.


테오르는 하도 기가 막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헛숨을 뱉어 냈다.

이건 도대체 무슨 시추에이션이지? 지구가 넓은 만큼 이 땅에는 정말로 각양각색의 사람이 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걸 이런 식으로 깨닫고 싶지는 않았는데.

자주 만날 것 같다고? 아무래도 피해 다니는 것이 상책일 것 같다.

테오르는 팔뚝에 돋아난 소름을 손으로 슥슥 문질렀다.

* * *

키언이 티 파티 때문에 미뤄두었던 정무를 다 처리하고 돌아왔을 땐 이미 해가 저문 뒤였다.

헤르몬 궁으로 귀가한 키언이 침실에 들어서자 막 목욕을 마친 샤로니아가 화장대에 앉아 피부를 정돈하고 있었다.

“오셨어요, 폐하.”

맑게 웃으며 반기는 샤로니아의 피부가 유난히 반들반들 매끄러워 보였다.

키언은 흘끔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아주 깨끗하고 성스러워 보이는 반면, 자신은 황궁의 먼지란 먼지는 다 뒤집어쓴 것처럼 불결하게 느껴졌다.

“일단 씻고 오는 게 좋겠군.”

키언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자 옆에서 시중을 들던 마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황제 폐하의 체력이 남다른 건 알지만 황후 폐하의 입장도 생각해 주셔야죠.”

욕실 쪽으로 향하던 키언의 걸음이 삐끗했다. 마샤의 말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뉘앙스가 곱씹을수록 선명해졌으니까.

“아무래도 마샤 자네는 날 황제가 아니라 짐승 한 마리쯤으로 여기는 게 틀림없어.”

키언이 한쪽 눈썹을 쓱 들어 올리며 삐딱하게 말하는데도 마샤는 곧 죽어도 바른말을 해야 하는 사람처럼 당당하게 말했다.

“뭐, 알고 계시니 다행입니다.”

키언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황실 살림을 도맡아 하는 유능한 시녀장은 유능한 만큼 꼬장꼬장하고 절대로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다.

“난 괜찮으니 걱정할 것 없네.”

샤로니아가 미소 지으며 마샤를 만류하자 그녀가 딱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황후 폐하는 심성이 너무 고우셔서 탈입니다. 몸이 안 좋을 때나 내키지 않으실 때는 분명히 말씀을 하셔야 합니다.”

“그런 거 아니래도!”

듣다 못한 키언이 빽 소리 질렀다.

원래는 본궁에 소속된 시녀장이었으면서 날 때부터 샤로니아를 주인으로 모신 것처럼 구는 마샤를 보니 기가 막혔다.

짧은 기간 동안 꼬장꼬장한 시녀장까지 완벽한 제 사람으로 만든 샤로니아의 탁월한 인맥 관리도 놀라울 따름이다.

쳇, 키언이 불퉁한 얼굴로 머리칼을 쓸어 올리자 샤로니아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씻고 오세요. 아니면 제가 목욕 시중을 들까요?”

그 말이 뭐라고 단박에 얼굴이 풀어진다.

아, 그녀 곁에 있으면 모두가 다 그녀의 매력에 빠져들어 정상이 아니게 되는 게 틀림없다.

“크흠, 그럴 것까진 없습니다.”

키언이 욕실 통로로 사라지는 것을 본 마샤가 표정을 누그러트리며 말했다.

“남자들은 머리가 하얗게 세도 철이 없는 면모가 있지요.”

“폐하를 많이 아끼는군.”

“지켜보는 내내 불안해서 저도 모르게 그런 마음이 들었나 봅니다. 그래도 이렇게 주제넘게 참견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마샤가 마치 엄마처럼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폐하께서 전에는 그렇게 위태로워 보이셨는가?”

샤로니아는 키언의 예전 모습이 상상이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말도 마세요. 예전에는 인상이 항상 이러셨죠.”

마샤가 손가락으로 양쪽 눈꼬리를 위로 쭉 들어 올렸다. 그것을 본 샤로니아가 참지 못하고 풋, 소리를 내어 웃었다.

“황후 폐하를 만나고는 뭔가 나사가 하나 빠지신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사람 같으시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둘은 마주 보고 서로 미소 지었다.

키언이 욕실에서 나왔을 땐 샤로니아 혼자였다.

“조용하니 좋군.”

그가 샤로니아의 머리카락을 뒤로 걷어 내며 목덜미에 깊숙이 입을 맞췄다. 그 간지러운 느낌에 샤로니아가 소리 내어 웃었다.

“아까는 제게 손도 안 댈 것처럼 말씀하시더니요?”

“아까는 딱히 그럴 생각이 없었다는 겁니다.”

“이제는 그럴 생각이 생겼다는 말씀으로 들리는데요.”

곱게 눈을 휘며 웃는 그녀의 얼굴이 키언의 눈동자에 한가득 담겼다. 이토록 사랑스러운데 두고 보기만 할 남자가 어디 있을까.

“뭐, 그렇다고 해 둡시다.”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고. 짤막하게 중얼거리며 키언이 그녀의 눈꼬리에 욕심껏 입을 맞췄다.

“일단은 젖은 머리부터 말리시고요.”

샤로니아가 물기를 머금은 은빛 머리칼에 손가락을 넣어 살살 흔들며 말했다.

“그냥 두면 금방 마를 것 같소만.”

“안 돼요.”

샤로니아가 꽤 단호한 어조로 못 박았다. 하지만 딱딱한 말투와는 달리 눈빛은 다정하게 휘어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는 남자가 몇이나 될까.

난 못해. 아니, 안 해. 키언이 그녀를 번쩍 안아 들며 말했다.

“그게 정 불편하면 그대가 말려 주면 되지 않습니까?”

“저는 그 정도로 급하지 않……!”

샤로니아의 뒷말이 키언의 입술에 먹혔다. 침대를 향해 걸어가며 혼이 쏙 빠질 정도로 진한 키스를 한 키언이 멈춰 서서 씩 웃으며 물었다.

“이래도 안 됩니까?”

정염을 담은 금빛 눈동자는 평상시와는 달리 더욱 샛노랗고 녹진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어둑해진 금빛 눈동자는 샤로니아의 몇 안 되는 약점이기도 했다.

“못 당하겠네요, 정말.”

샤로니아가 포기한 듯 긴 숨을 내쉬며 그의 머리칼 위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밝은 빛과 함께 물기가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폐하는 이럴 때 보면 꼭 악당 같아요.” 

샤로니아가 곱게 눈을 흘기며 하는 말에 키언이 쿡쿡 낮은 웃음을 토해 내며 속삭였다.

“그 말,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리고 곧장 입술이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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