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코앞도 분간할 수 없는 짙은 안개가 사방에 자욱했다.
샤로니아는 시야가 전혀 확보되지 않는 길을 천천히 걸었다. 이곳이 어딘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떻게든 이 길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만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얼마간 희뿌연 안개를 헤치며 걷다 보니 머리카락과 옷이 축축해졌다. 그제야 샤로니아는 제가 잠옷 차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안락한 침대에서 벗어난 기억이 없었다. 어젯밤 분명히 키언의 품에 안겨 아주 포근하게 잠이 들었으니까.
“위험해……. 위험해…….”
어디선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렷한 목소리가 아니라 메아리치듯 울리는 목소리였다. 한 사람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여러 사람이 한목소리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위험하다고?”
그 목소리를 향해 샤로니아가 되물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제게 말을 건네는 것이 바로 안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안개를 구성하고 있는 작은 물 입자들이라는 걸.
그것을 증명하듯 뿌연 안개가 한바탕 잘게 진동했다. 마치 최선을 다해 안개를 걷어 내려고 몸부림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안개가 조금 옅어졌다. 샤로니아는 그제야 자신이 숲의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앙상한 나뭇가지와 썩어 가는 낙엽이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을씨년스러운 풍경이었다.
그녀는 두 눈을 좁게 뜨고 주변을 경계했다. 어쨌든 안개가 자신에게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건 틀림없으니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젖은 낙엽에 쓸린 치맛자락이 어느덧 더러워졌다. 그것을 내려다보던 샤로니아의 눈에 뭔가 들어왔다.
바닥에 자신의 치맛자락처럼 더러워진 종잇조각이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게 뭐지?’
그녀는 종잇조각을 주워 들어 그것을 펼쳤다.
‘데르반’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강한 돌풍이 불어와 안개를 날려 버렸다. 그리고 마주친 새빨간 눈.
샤로니아는 그 핏빛 눈동자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입을 벌려 자신의 몸을 뼈째 와그작 씹어 먹을 것 같은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그르렁거리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물, 안개가 자신에게 경고했던 것은 바로 이 마물이었으리라.
얼마나 시선을 고정한 채 마물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크아아앙, 마물이 잡아먹을 듯이 울부짖으며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헉, 헉, 헉…….”
샤로니아의 입에서 거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느리게 숨을 들이마셨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불안하게 주위를 살폈다.
“꿈을 꾼 건가?”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제 이마를 짚어 보더니 곧 느리게 뺨을 어루만졌다.
그제야 샤로니아는 모든 것이 꿈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도 코끝에 퀴퀴한 낙엽 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지독하게 선명한 꿈 말이다.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주위를 살폈다. 그 어디에도 마물 같은 건 없었다. 부드러운 침구와 고풍스러운 가구가 놓인 자신의 침실일 뿐이었다.
“저런, 식은땀까지 흘릴 정도로 안 좋은 꿈을 꾸었나 보군.”
키언이 그녀의 동그란 이마를 쓰다듬고 차가워진 손을 주물러 주었다.
“나쁜 것들은 이제 없습니다.”
키언이 이마를 거의 맞댄 채 마주 보며 하는 말에 샤로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딱히 악몽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이렇게 달래 주는 것이 싫지 않아서 그냥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어루만져 주는 손길이 기분 좋았다. 입술이 뺨에 닿는 것을 느끼다가 그녀는 다시 잠이 들었다.
* * *
이틀 후, 수확제 준비를 도울 귀족 영애들이 황후가 주최하는 티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황궁으로 모여들었다.
헤르몬 궁은 오랫동안 비워져 있다가 새 주인을 맞이했던 것이기 때문에, 방문한 영애들은 궁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새 주인의 안목을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화려한 샹들리에로 장식된 현관은 자칫 과해 보일 수 있었지만 심플한 벽지와 가구를 사용했기 때문에 오히려 포인트가 되어 돋보였다.
온실에서 키운 노란 프리지아와 리시안셔스가 곳곳에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는데 전체 분위기를 화사하고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
“우와, 어머니께서 말씀해 주신 분위기랑 완전히 다르네.”
초록색 벨벳 드레스를 멋지게 차려입은 알리앤이 감탄하며 말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선대 황후와 꽤 돈독한 관계를 가졌던 탓에 여러 번 헤르몬 궁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흥, 자기가 와 봤던 것도 아니면서 아는 척은.”
알리앤의 말을 들은 레티가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그녀와 친한 로잘린이 입조심을 하라는 뜻으로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촌스럽기는.”
모든 영애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튀는 복장을 한 아르미네가 그녀들을 제치고 성큼성큼 앞장서서 걸었다.
그녀는 노리던 황후의 자리가 좌절되자 황실 측에라도 잘 보여서 릴리안 백작가가 제국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도록 만들라는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이 자리에 나온 참이었다.
디센베르 후작가와 바르칼라 공작가가 몰락했으니 이제는 릴리안 백작가에 기회가 왔다는 것이 야심 가득한 백작 부인의 지론이었다.
“어서들 오게. 만나서 반갑네.”
화려하면서도 고상하고 품위 있는 황갈색 새틴 드레스를 차려입은 샤로니아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영애들을 맞이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애들이 예를 갖춰 인사하며 샤로니아를 힐끗 살폈다. 소문이 무성한 황후를 실물로 보게 되니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던 탓이었다.
헤르몬 궁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샤로니아의 복장을 본 영애들이 저도 모르게 감탄을 뱉어 냈다.
샤로니아가 입은 드레스는 고상하고 세련된 옷감에 하늘하늘한 레이스를 덧대어 자칫 딱딱해 보일 수 있는 디자인을 풍성하고 사랑스럽게 보이도록 했다.
거기에 매치한 붉은색 루비 목걸이와 귀걸이는 그녀의 흰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면서 세련되고 생동감이 넘치는 이미지를 연출했다. 그 모습이 헤르몬 궁과 한 쌍의 세트처럼 어우러져 마치 그녀만이 이 궁의 유일한 주인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직 볕이 따뜻하기에 정원에 자리를 마련했네.”
샤로니아가 입을 열자 영애들이 얼굴을 붉혔다.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아 민망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샤로니아가 별 내색 없이 자리를 옮겼기에 그녀들도 그 뒤를 따라 정원으로 향했다.
진한 노란색을 테마로 꾸며진 티 테이블은 울긋불긋 물든 낙엽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수확제에 자주 등장하는 커다란 호박이 정원 곳곳에 장식되어 있었다.
마치 동화의 나라에 온 듯한 기분에 영애들은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분위기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향초가 은은한 향기를 풍기자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드리웠다.
“이렇게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어 정말 기쁘다네.”
가을 하늘을 닮은 파란 눈동자가 자신들에게 향하는 것을 보고 영애들은 이제껏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뒤에서 황후에 대한 험담을 한 것을 후회했다.
“귀한 손님들을 맞아 특별히 레몬 진저 티를 준비했습니다.”
엘런을 필두로 해서 시종들이 차와 디저트를 열심히 날랐다.
블루베리를 듬뿍 넣은 타르트와 초콜릿을 아낌없이 넣은 스콘, 입에 넣자마자 살살 녹아 없어지는 치즈 케이크와 각종 핑거 푸드들이 테이블 위에 빼곡히 들어찼다.
“어서들 들게.”
샤로니아의 손짓에 영애들이 차와 디저트 맛을 보고 감탄하며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가문의 명예와 개인의 위신 때문에 항상 뾰족한 가시로 제 몸을 감싸고 있던 이들도 이렇게 보니 영락없는 소녀들이었다.
요즘 수도에서 한창 유행하는 패션이나 장신구 등에 대한 이야기와 개인이 선호하는 디저트 종류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오가고 난 뒤였다.
“자, 그럼 이제 수확제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볼까?”
샤로니아가 운을 띄우자 마치 아카데미 연구 과제 발표를 하듯 각자 준비해 온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
“광장에 커다란 호박 탑을 세우면 어떨까요? 멀리서도 아주 잘 보일 만큼 크게요. 주변에 전등을 달아도 예쁠 것 같아요.”
“수확제니까 사람들에게 시나몬을 듬뿍 넣은 호두파이를 나눠주면 좋을 것 같아요. 음, 만약 호박 탑을 세운다면 호박파이도 괜찮을 것 같네요.”
레티와 로잘린이 살짝 들뜬 목소리로 말하곤 서로 눈이 마주치자 쿡, 웃음을 터트렸다. 축제 전날 흥분해서 잠을 설치는 아이들처럼 장난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에 반해 알리앤과 아르미네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상해 보이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차만 홀짝거리고 있었다.
자작가의 영애인 레티와 로잘린의 말에 그다지 동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 즐거운 축제가 될 것 같군.”
샤로니아는 장난기 넘치는 레티와 로잘린에게 미소 지으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차만 마시고 있던 알리앤과 아르미네를 향해 말했다.
“그대들, 의견도 듣고 싶네만.”
샤로니아의 시선이 제게 향하자 알리앤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녀는 모든 시선이 제게 집중되자 긴장한 것처럼 보였지만 곧 표정을 다잡았다.
“부산스럽고 조잡한 분위기 말고, 신전의 도움을 받아 신성하고 경건한 분위기의 수확제를 보내는 건 어떨까요?”
알리앤의 가문은 신전 쪽에 발을 딛고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고심해서 생각해 온 말을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앞서 레티와 로잘린이 낸 의견을 돌려서 비꼰 것과 진배없었다.
졸지에 ‘부산스럽고 조잡한’ 수확제를 기획하게 된 레티와 로잘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알리앤은 자신이 무슨 말을 잘못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다들 스케일이 이렇게 작아서야…….”
가만히 듣고 있던 아르미네가 쯧쯧, 혀를 찼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그녀가 도대체 어떤 의견을 말할까 궁금해하며 샤로니아가 눈을 빛냈다.
“오, 릴리안 백작 영애에게 좋은 생각이 있는가 보네.”
샤로니아가 웃음기 서린 음성으로 말하자 아르미네가 목에 힘을 주며 대답했다.
“각 골목마다 특색 있는 거리를 만들어 축제를 즐기게 하면 어떨까 합니다. 예를 들자면 먹거리 골목, 기예 골목, 공연 골목 이런 식으로요.”
“흠, 좋은 생각이네만 골목마다 상가를 꾸미려면 예산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 필요할 것 같은데?”
“본래 무슨 행사든지 돈을 얼마나 들이느냐에 따라서 승패가 갈리는 법이지요.”
오만하고 도도한 아르미네의 표정을 본 샤로니아는 웃음을 꾹 참았다. 그녀는 아직도 제 꾀에 제가 당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얼굴이었으니까.
“그럼, 릴리안 백작가에서 모자란 예산의 일정 부분을 감당한다면 이 안을 추진해 보겠네.”
“네?”
아르미네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수확제를 사비로 충당했다는 소리는 그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하지만 이제껏 떠벌려 놓은 것이 있는지라 안 되겠다는 말은 죽어도 못하겠다. 곧 죽어도 자존심으로 사는 귀족 중의 귀족답게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고 있다가 결국 대답했다.
“그, 그러죠. 릴리안 백작가에서도 이 일을 매우 기쁘게 여길 겁니다.”
다른 영애들이 황망하게 입을 벌리고 그녀를 쳐다봤지만 아르미네는 끝까지 품위 있는 자세로 차를 마셨다.
“내 직접 서신을 보내 릴리안 백작가의 노고를 치하하도록 하지.”
뭔가 말려든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아르미네는 애써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서 몰아내며 억지로 목소리를 짜내어 대답했다.
“감사, 합니다, 황후 폐하.”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샤로니아는 알맞게 식은 레몬 진저 티를 음미했다.
맛있는 것을 먹을 때나, 좋은 것을 볼 때면 항상 키언이 생각났다. 그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그는 자신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다 듣고 알고 있을 텐데, 자신만 그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니 괜히 심술이 났다.
때마침 로잘린이 키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께서 산드레이아 대륙에서 온 상인에게 어렵게 구한 물건인데, 황제 폐하께 드리면 좋겠다고 하셔서 가져왔습니다.”
상자를 열자 무쇠로 만든 단검이 보였다. 대단한 선물을 기대했던 다른 영애들은 투박스러운 외형의 단검을 보자 곧 표정이 시들해졌다.
하지만 샤로니아는 그 단검의 값어치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산드레이아 대륙에는 철강 산업이 고도로 발달해 있었다.
보기에는 투박해 보이지만 그 어떤 금속도 단검을 부수지 못하리라.
“고맙네. 그런데 내가 이 귀한 선물을 대신 받아도 될지 모르겠네.”
샤로니아가 지칭한 ‘귀한 선물’에 동의할 수 없었던 영애들이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 그와 동시에 평온하던 샤로니아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황제 폐하께서 이 자리에 오시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황제 폐하와 함께 차를 마시면 딱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