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루하르 제국에서 가장 세력이 강대했던 디센베르 후작가와 바르칼라 공작가가 거의 멸문당하다시피 하자 모두들 황실의 눈치를 보느라 숨을 죽였다.
예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제국에서 가장 입김이 강했던 것은 언제나 신전이었으니까.
원하든, 원치 않든 상관없이 정치 판도가 달라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수익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마구스가 이번 달 신전의 수익금에 관한 보고서를 받고 미간을 찡그렸다.
“죄, 죄송합니다, 카티르. 하지만 예전보다 제사를 드리는 인원이 줄어든 탓에…….”
사제 하나가 말끝을 흐리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마구스의 눈빛이 어찌나 살벌한지 입이 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어째서 제사를 드리러 오지 않는 거지?”
“그, 그야…….”
신전의 평판이 땅에 떨어졌으니까요. 사람들도 신의 뜻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거죠. 차마 그렇게 답하지 못한 사제는 핑곗거리를 대며 얼버무렸다.
“최근 디센베르 후작가와 바르칼라 공작가가 몰락했으니 다들 황실의 눈치를 보느라 그렇겠지요.”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은 아니었다. 그것도 엄연히 사실이었으니까.
“꽤 번거롭게 됐군.”
마구스가 음침한 눈빛을 번들거리며 손가락으로 의자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그는 제 살길을 도모하고자 디센베르 후작가를 버렸다. 나름 유용하게 써먹던 클리오라도 버렸다.
어차피 제 목숨 외의 다른 것들은 어찌 되든 알 바가 아니었으나, 그 일이 신전의 수입에 영향을 끼치다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마구스가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겨 있자 보고서를 올린 사제가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다가 간신히 목소리를 짜내어 말했다.
“카, 카티르, 그, 그럼 저는 이만…….”
지옥같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음산한 눈동자가 제게 고정되자 사제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래, 그만 가 봐.”
그러자 사제가 식은땀을 닦으며 서둘러 방을 나갔다.
‘쯧, 쓸모없는 놈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마구스의 눈빛이 한겨울 눈 폭풍보다 차갑게 가라앉았다.
쓸모없는 놈들은 이 세상에서 다 쓸어 버리고 싶었지만 그러면 신전에 남아 있을 놈이 없을 테니 그냥 두는 것뿐이다. 다 쓸어버리자니 귀찮기도 하고.
“크큭, 많이 컸네, 많이 컸어.”
키언을 떠올린 마구스가 큭큭 웃기 시작했다. 죽일 듯 형형한 눈빛으로 입술만 웃고 있는 모습이 퍽 기괴했다.
“하데스…….”
마구스가 손짓하자 그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마물이 느릿하게 걸어 나왔다.
흉측한 이빨과 붉은 눈을 한 마물은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마구스는 그런 마물을 애완견 다루듯이 하며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요즘 특식이 뜸했지? 이제껏 맛본 것들 중에 가장 맛있는 특식을 준비해 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렴.”
황제의 피는 아무래도 다른 하등한 인간의 것보단 맛있겠지. 그의 눈빛이 하데스보다 더 소름 끼치게 붉은빛을 발했다.
신전이 이대로 주도권을 뺏기게 둘 수는 없었다. 황제가 저런 식으로 나온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주저앉힐 수밖에.
‘어떻게 이룩한 자리인데,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지.’
신처럼 군림하던 자신의 왕국이 무너지는 꼴은 도저히 볼 수가 없다.
그러니 방해가 되는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없애 버려야지. 이제껏 그래왔듯이.
황제여, 부디 목 단속을 잘하시길.
마구스의 속내를 다 안다는 듯이 하데스가 그르렁거렸다.
* * *
계절이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기 직전, 루하르 제국엔 성대한 수확제가 열린다.
그것을 준비하는 것은 원래 제국의 안주인 몫이었다. 그간 안주인 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에 키언과 보좌진들이 그 준비를 해 왔지만, 올해는 달랐다.
이제는 제국에도 어엿한 안주인이 생겼기 때문이다.
샤로니아가 탁자 위에 서류를 수북하게 늘어놓은 채로 인상을 찌푸렸다.
납치 사건이 일단락 지어진 후, 그녀는 본격적으로 황후의 업무를 시작했다. 하지만 뭐가 이렇게 할 일이 많은지 복수는커녕 키언의 얼굴조차 마음 놓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개선책이 시급해.”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자니 트레이를 끌고 들어온 엘런이 불쑥 말했다.
“무슨 책이요? 그렇게 급하시면 제가 찾아다 드릴게요.”
샤로니아의 혼잣말을 정확하게 듣지 못한 게 틀림없었다.
달칵, 찻잔이 놓이자 향긋한 홍차 향이 물씬 풍겼다.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한 샤로니아가 엘런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정말 내가 원하는 책을 찾아다 줄 거야?”
“네, 그럼요. 당연하죠.”
엘런이 세상 반대쪽에 가서라도 그녀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구해 올 것처럼 결의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들고 오기 엄청 민망한 책이더라도?”
“네?”
샤로니아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엘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엘런을 보니 어쩐지 점점 더 놀리고 싶어진다.
“내가 필요한 책은 말이야…….”
샤로니아가 엘런의 귓가에 아주 노골적이고 음란한 책 제목을 속삭였다.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엘런이 차마 당장 도서관에 다녀오겠다고 말하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아, 미안해, 엘런. 네 그런 표정을 보고 싶어서 그랬어…….”
샤로니아가 쿡쿡거리며 웃자 이제야 사태를 파악한 엘런이 뚱하게 중얼거렸다.
“황후 폐하, 너무하세요.”
빵빵하게 부푼 그녀의 볼을 손가락으로 콕 찌르며 일어선 샤로니아가 마샤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황후 폐하.”
“수확제 준비를 좀 더 체계적으로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네. 수도의 귀족들 중심으로 수확제 준비에 참여할 영애들을 모집한다는 전언을 보내 주게. 자원하는 이들은 이틀 뒤에 함께 차나 한잔하기로 하지.”
“생각 참 잘하셨습니다. 황후 폐하 혼자서 그 일을 감당하기엔 고약할 정도로 덩치가 큰 행사이니까요.”
마샤가 수확제와 한판 벌이기라도 할 것처럼 두 팔을 걷어붙이며 하는 말에 샤로니아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
“자, 그럼 이틀 뒤에 어떤 차와 디저트를 먹으면 좋을지 고민해 주겠니? 엘런?”
엘런은 황실에 들어온 뒤부터 꾸준히 차와 디저트 등 귀족의 차 문화에 관한 공부를 해 왔었다. 그것은 그녀가 좋아하고, 또 자부심을 가지는 일이기도 했다. 샤로니아의 놀림에서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엘런이 허둥지둥하며 말했다.
“그럼요, 황후 폐하. 이제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으니까 생강과 레몬을 섞은 차도 좋을 것 같고…… 아, 애플 티도 제철인데…….”
“네 안목을 믿어. 네게 맡길 테니 준비해 줘.”
“네, 맡겨만 주세요.”
엘런의 얼굴에 다시 홍조가 깃들었다. 그것을 본 샤로니아는 이렇게 상기된 엘런도 참 귀엽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숫기 없고 있는 듯 없는 듯하던 모습은 떠오르지 않을 만큼 요즘은 생기가 넘쳤다.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이런 얼굴을 더 자주 보려면 일을 많이 맡겨야 하나?
* * *
하루를 마감하기 전, 차를 마시며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어느덧 부부의 일과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안 그러면 제대로 대화할 시간이 없을 만큼 서로의 업무가 바빴던 탓이었다.
샤로니아가 우아하게 찻잔을 들었다 놓으며 말했다.
“수확제 준비를 귀족 영애들과 함께하려고 해요.”
그녀가 잘 해내리라는 것을 믿었지만 루하르의 귀족 여성들의 성격은 만만치 않았다. 굳이 피곤한 일을 만들어서 할 필요가 있을까.
안 그래도 그 일에 대해 벌써 보고를 받은 키언은 걱정되는 바를 말했다.
“일을 수월하게 덜 수 있지만, 오히려 골치가 아파질 수도 있을 겁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귀족들은 어떻게 다루느냐가 관건이었다. 틈을 보이면 아무리 황후라도 물고 늘어질 것이 뻔했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 ‘잘’ 해야겠죠?”
그렇게 말하고 싱긋 웃는 그녀의 미소가 봄날처럼 싱그러웠다.
키언은 알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단지 일 처리를 쉽게 하기 위해서 수확제에 귀족 영애들을 끌어들이는 게 아니라는 걸.
황실과 신전 측의 균형을 맞춰 주고 있던 큰 가문 두 개가 몰락했다. 동요가 없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영민하게도 수확제를 기점으로 제국의 기반이 될 가문을 다시 세우려 하고 있었다.
“그렇군요. ‘잘’이라……. 그대라면 잘할 줄로 믿습니다.”
키언도 그녀를 마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녀라면 제 생각 이상으로 모든 것을 잘해 주리란 확신이 있었다.
“믿어 줘서 고마워요.”
말간 그녀의 미소를 바라본 키언이 차를 한 모금 들이켠 뒤 탁자 위로 무언가를 스윽, 내밀었다.
“응? 이게 뭐예요?”
커다랗고 두꺼운 책을 살펴보던 샤로니아가 기함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폐하께서 어떻게 이걸……?”
그녀가 이토록 놀라는 까닭은 아까 엘런을 놀릴 때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던 바로 그 야한 책을 키언이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흠, 잘못 들은 게 아니었…….”
중얼거리던 키언이 샤로니아와 눈이 마주치자 크흠, 낮게 헛기침을 뱉어 냈다.
“설마, 엘런이 폐하께 이런 얘기까지 했다고요?”
엘런의 성격상 샤로니아를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을 테지만 키언에게 달려가 이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보고할 정도는 아니었다.
샤로니아의 눈초리가 가늘어진 것을 본 키언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이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키언이 어색하게 웃으며 브로치 하나를 꺼내 보였다.
“이건 아까 제가 하고 있던 브로치였는데?”
샤로니아의 얼굴에 의뭉스러움이 더해졌다. 그가 자신에게 브로치를 꺼내 보이는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그를 물끄러미 응시할수록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처럼 그가 시선을 피한다?
“대화 내용을 전송해 주는 마도구입니다. 오늘만 시험해 보고 성능을 파악한 뒤에 말하려고 했는데…….”
그런데 속삭이는 소리까지 다 알아들을 정도로 이렇게 성능이 뛰어날 줄은 몰랐다. 브로치를 사용하려니 그녀를 속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그녀가 말한 책을 찾아와 내민 것이었다. 사실을 고백도 할 겸해서 말이다.
“폐하, 아직도 불안하신 거예요?”
샤로니아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녀를 잃을 뻔한 뒤로 키언이 몇 번 마도구를 사야겠다느니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마도구의 가격이 어마어마하게 비싸다는 것도.
“그대에게 내가 온종일 붙어 있을 수 없으니, 이게 최선책입니다.”
그가 다시 예전 기억이 떠오른 것처럼 가슴이 미어지는 표정으로 말했다.
“모든 소리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대화만 전송하도록 만들어진 마도구입니다.”
그렇게라도 그녀가 안전한지 파악해야겠다는 구구절절한 설득이 이어졌다.
“나참, 제가 뭐 어린앤 줄 아세요?”
이제 제국 내에서 마법으로 샤로니아를 능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연약한 애 취급이라니.
하지만 유난스러운 보호가 그의 사랑에서 기인한 것임을 알았기에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샤로니아는 슬쩍 두 눈을 좁게 뜨고 그를 추궁하듯 장난스럽게 물었다.
“누가 폐하 험담을 하면요?”
“못 들은 걸로 하지.”
“그럼, 제가 폐하 험담을 하면요?”
“시정하도록 하지.”
“그럼, 누가 제 험담을 하면요?”
“그건 죽여야……. 크흠, 참아보도록 하지.”
그의 반응이 웃겨서 샤로니아는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좋아요, 방금 말씀하신 약속을 지키신다면 마도구 사용하는 걸 허락할게요.”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은 후에야 키언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자기 전 마시는 따뜻한 차는 온몸을 훈훈하게 만들어 준다. 샤로니아가 뜨거운 차를 호록호록 불어 마시는 것을 잠잠히 바라보던 키언이 불쑥 물었다.
“그런데 샤론,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도대체 이런 책은 어떻게 안 겁니까?”
“!”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샤로니아는 하마터면 마시던 차를 뱉을 뻔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평온하고 자신감 가득한 표정을 유지하던 그녀의 얼굴이 눈에 띄게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는 키언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다 읽었습니까?”
“…….”
붉어지는 얼굴을 보니 어쩐지 대답을 알 것만 같다. 대답을 회피하는 샤로니아의 얼굴이 점점 더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또 무슨 책을 읽었습니까?”
집요하게 눈을 마주치는 키언의 시선을 피하며 샤로니아가 작게 말했다.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키언이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창피하게 만들어놓고 도대체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샤로니아가 불만에 차서 그를 휙 노려보다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정염을 물씬 담은 예쁜 금빛 눈동자가 위험할 정도로 곱게 휘어져 있었으니까.
“부인,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은근하고 농밀한 속삭임에 샤로니아는 저도 모르게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