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샤로니아가 무사히 환궁하자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암울하고 적막했던 헤르몬 궁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몸은 괜찮으세요? 다치신 곳은요?”
“에구, 몰골이 이게 뭐랍니까?”
엘런과 마샤가 샤로니아의 몸을 지나치게 샅샅이 살폈다. 눈곱만 한 상처까지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눈에 힘을 주는 이들을 보고 샤로니아는 피식 웃었다.
“난 괜찮네. 그나저나 정성껏 만든 웨딩드레스가 이렇게 되어서 어떡하지?”
그녀가 이멜다를 향해 진심으로 안타까운 듯 말했다.
“옷은 또 만들면 되니까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그나저나 어떤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망할 놈이 우리 황후 폐하를 납치했답니까?”
엄청 화가 났는지 이멜다의 말투가 곱지 않았다.
“이제 알아봐야겠지.”
샤로니아가 발견된 곳 근처에서 쓰러져 있는 용병단의 대장을 체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와 연루된 짐작 가는 인물이 더 있긴 했지만 일단 그녀는 말을 아낀 채 그렇게만 대답했다.
“어서 따뜻한 물에 몸을 씻으시고 푹 쉬세요.”
엘런이 눈시울을 붉히며 하는 말에 샤로니아는 생각했다.
따뜻한 내 집에 돌아올 수 있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 * *
긴장이 풀려서인지 샤로니아는 목욕을 끝내고 누웠다가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샤로니아는 잠에서 깨어 주변을 살폈다. 작은 수면 등만 켜진 실내는 이미 한밤중이 되었음을 알 수 있게 했다.
“샤론…….”
그때, 나지막이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뜨거운 입술이 이마를 눌렀다.
“폐하, 언제 오셨어요?”
샤로니아는 아직도 정복 차림을 한 채 침대 옆에 앉아 있는 키언을 보고 놀라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일어나지 마시오.”
키언이 그녀의 어깨를 살짝 누르며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샤로니아는 할 수 없이 누운 채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용병단 잔당들을 싹 다 잡아들이고 디센베르 후작을 감옥에 집어넣느라 바쁜 하루를 보냈다.
신혼 첫날부터 이게 무슨 고생인지는 모르겠지만, 키언은 평생 겪을 불운을 오늘 하루 동안 겪은 걸로 치기로 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신의 멱살이라도 잡을 생각이었다.
“얼굴이 좋지 않으세요.”
샤로니아는 거칠어진 키언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짐의 걱정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짧게 한숨을 내쉰 샤로니아가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면 폐하도 제 걱정은 하실 필요가 없겠네요.”
자신을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샤로니아를 보면서 키언은 설핏 웃었다.
아직도 그녀를 잃을 뻔했다는 것을 떠올리면 가슴 한편이 서늘해졌다. 그녀가 앞에 있는데도 신기루처럼 언제 사라질지 몰라 마음껏 웃을 수가 없었다.
그도 샤로니아의 뺨에 손을 올렸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살결을 느끼며 그는 어깨를 떨었다. 이렇게 소중한 존재를 잃고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어떤 경우에도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적의 칼날에 맞아 피를 쏟아 낼지언정 후퇴한 적도 없었다. 그랬던 그가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는 겁쟁이가 되어 버렸다.
‘못났군. 최악이야.’
그는 자조하며 샤로니아의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리 오세요.”
샤로니아가 팔을 벌렸다. 키언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품에 안겼다.
언제나 그를 미치게 하는 그녀의 체취가 물씬 풍겨왔다. 그래서 그는 깨달았다. 그녀가 제 삶에 유일한 가치가 되었다는 걸.
아무리 다른 이가 마법으로 모습을 바꾸고 그녀를 흉내 내려고 했어도 소용이 없었던 이유. 그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것은 자신이 샤로니아의 외모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내면과 그녀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랑해……. 샤론.”
키언이 귓가에 낮게 속살거리는 소리를 들은 샤로니아는 피식 웃었다.
어째 이 남자는 오늘따라 짝을 잃은 고독한 늑대 같다. 축 처진 귀와 복슬복슬한 털을 가진 늑대 말이다.
“저도요. 저도 폐하를 사랑해요.”
샤로니아는 제 품에 안긴 남자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은빛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를 사라락 빠져나가는 감각이 참 좋았다.
머리칼을 하염없이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은 키언이 그녀의 손가락 마디마다 하나씩 정성스럽게 키스했다.
그리고 이마와 눈꺼풀, 콧잔등, 뺨으로 옮겨가며 천천히 입을 맞췄다.
마치 그래야만 그녀가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절박하고 애처로운 몸짓이었다.
“그대가 없으면 난 죽고 말 거야.”
찬란한 금빛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그녀가 없다는 가정만으로도 세상이 멸망하고 우주가 뒤집힌 것처럼 금빛 눈동자가 산산이 부서졌다.
“오, 폐하. 그건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샤로니아가 그의 목에 두 팔을 감고 깊게 키스했다.
가슴이 아릴 정도로 서로에 대한 마음이 차올랐던 탓에 그들은 절박하게 서로에게 매달렸다.
숨소리 하나까지 놓칠세라 파고드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맞닿은 입술이 너무도 부드럽고 따뜻해서 우습게도 눈물이 핑 돌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서로에게 없어선 안 될 사람, 목숨보다 귀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함께한 시간이 쌓이고 쌓여, 서로에게 뿌리를 박은 채 얽히고설켜 자라났다. 이제는 어느 한쪽이 다치거나 망가지면 둘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 공동체가 되었다.
“사랑해요…….”
그러니 너는 나고, 나는 너다.
“앞으로 다시는 그대를 잃지 않을 거야.”
그것이 부부라는 이름으로 두 사람이 하나로 묶이는 것임을 그들은 이제야 알았다.
“그대가 살아서, 나도 살았어.”
눈물겨운 키스가 그 후로 오래도록 이어졌다.
* * *
“아아아악!”
지하 감옥에선 며칠째 처절한 비명이 계속되고 있었다. 마구스에게 버림받은 클리오라가 내지르는 소리였다.
저주가 발현되는 것을 막아 주던 마구스의 신성력이 없어지자 낙인이 제멋대로 폭주하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으아아아악!”
잇새로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싶을 정도로 견디는 것이 힘들었다.
하지만 죽을 수도 없었다. 황실 기사단이 마법 제어 팔찌와 쇠사슬로 그녀를 친친 감아놓았기 때문이었다.
“마구스…… 이 개자식…….”
악에 받친 클리오라는 핏발 선 눈동자로 마구스를 저주했다.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지고 나니 눈에 뵈는 게 없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도 하지 못하고 더러워진 드레스를 입은 채, 황제에게 목 졸린 자국이 시퍼렇게 남은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광인 그 자체였다.
이런 상태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짧으면 몇 주, 길어봤자 몇 달이 고작일 것이다.
“나 혼자만 죽을 줄 알고?”
그녀는 이를 아득 갈았다. 디센베르 후작가를 멸문시키면서까지 제 살길을 도모한 비열한 놈을 두고 혼자 죽을 수는 없었다.
“그냥은…… 절대 못 죽어. 아니, 안 죽어……. 우욱!”
클리오라는 왈칵 피를 토하면서도 무서운 집념으로 똘똘 뭉친 채 독기 어린 눈빛으로 허공을 쏘아보았다.
* * *
‘아무도 모를 거야. 아무도 모를 거라고.’
더랜은 불안하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제 방을 왔다 갔다 했다.
샤로니아를 성공적으로 납치한 더랜은 미리 주문해 놓았던 기억을 지우는 약을 가지러 간 참이었다.
룰루랄라 신나게 돌아왔는데 뭔가 잘못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황제와 함께 꽃길을 걷는 샤로니아를 보는 순간, 얼굴의 핏기가 가시고 심장이 발치에 툭, 떨어진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살고 봐야 한다. 그는 그길로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와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언제 황실 기사단이 들이닥쳐 자신을 잡아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먹지도, 자지도 못했다. 겨우 선잠이라도 들면 악몽을 꾸기 일쑤라서 그는 비쩍 말라가고 있었다.
쿵쿵쿵쿵!
그때, 누군가 문을 험하게 두드렸다.
헉, 더랜이 숨을 들이켰다. 드디어 범행이 들통나 버린 건가?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굳어서 숨소리도 내지 못했다.
“문 열어! 안에 있는 줄 다 알고 왔으니까!”
하지만 제 방문을 두드리는 것은 황실 기사단이 아니라, 제 누이인 에일린이었다.
하아,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 올렸다. 황실 기사단이 아니라 천만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골칫덩이인 에일린을 만나고 싶진 않았다.
그가 잠자코 있으려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더욱 심해졌다.
“이 문 안 열어?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열쇠로 열고 들어가는 수밖…….”
에일린이 말을 끝맺기 전에 더랜이 벌컥 문을 열었다.
제멋대로인 그녀라면 분명히 집사장을 닦달해 열쇠를 들고 올 게 뻔했다. 그러니 차라리 무슨 말을 하려는지 들어준 뒤 보내는 게 훨씬 더 편할 것이다.
더랜의 시선이 곱지 않았지만 에일린은 씨익 웃으며 보란 듯이 그의 방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피곤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더랜이 물었다.
에일린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한번 흘겨보았다. 요즘만큼 제 오빠가 무능력해 보이는 때가 없었다.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뭔지…….
“사람들이 그 얄미운 계집애를 칭송하더라. 뭔가 느끼는 게 없어?”
하? 한다는 소리가 고작 이런 거라니. 더랜이 황당하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제국에서 제일 뛰어난 용병단이라며? 아니, 그것보다 뭔가를 하긴 한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샤로니아 혼자서 용병단을 해치우고 스스로 빠져나왔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는지 에일린이 두 눈을 좁게 뜨고 더랜을 추궁했다.
수면 부족으로 예민할 대로 예민해진 더랜은 귀에 뾰족하게 박히는 그녀의 음성이 듣기 싫었다.
“좋은 말로 할 때, 이만 나가라.”
더랜이 두통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귀찮은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가 자신을 제대로 상대해 주지 않자 심통이 난 에일린이 씩씩거렸다.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그러는 오빠는 얼마나 잘나서 일을 이 모양으로 만들었어?”
안 그래도 간신히 버티던 인내심이 뚝 끊어졌다. 내가 누구 때문에 지금 이 지경이 되었는데!
쫘악!
울컥한 더랜이 에일린의 뺨을 후려쳤다.
“지, 지금 나, 날 때렸어……?”
에일린이 경악하며 부들부들 떨었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더랜은 난감한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에, 에일린, 미안. 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
“두고 봐. 오늘 일을 후회하게 될 테니.”
에일린이 뺨을 감싸 쥔 채 두 눈을 부릅뜨고 더랜을 노려본 뒤 방을 나갔다.
“제기랄! 이런 빌어먹을!”
진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더랜은 욕설을 중얼거리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 * *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이 따뜻했다. 샤로니아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고 업무에 집중하고 있는 키언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녀의 납치 사건 이후, 키언은 그녀가 혼자 있는 걸 불안해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 눈앞에 없는 걸 불안해하는 거였다.
그래서 샤로니아는 그가 국정을 보는 동안 그의 옆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원래도 거의 책을 읽으며 조용히 시간을 보내던 터라 불편한 점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책 내용보다 잘생긴 그의 외모가 제 시선을 더 많이 빼앗는다는 게 문제였다.
샤로니아는 햇살을 받아 빛나는 그의 머리칼과 은빛 속눈썹을 즐겁게 바라보았다.
‘어쩜 저렇게 잘생겼을까.’
공들여 만든 조각상처럼 오뚝한 콧날과 그린 듯한 턱 선이 보기 좋았다. 더군다나 업무에 집중하고 있는 남자는 평상시와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나저나 언제쯤 유리 화병 다루듯 하는 걸 멈추려나.’
키언은 요즘 그녀를 깨지기 쉬운 유리 화병처럼 대했다. 무엇을 하든 심각한 과보호가 뒤따랐다.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으면 이럴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기에 샤로니아는 대체로 그에게 맞춰 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과보호가 침대 위에서도 이어지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키언은 그녀가 충분히 회복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일주일째 그녀를 안고만 자고 있었다.
‘괜찮은데…….’
잠재되어 있던 능력이 각성했기 때문인지 이전보다 체력이 더 좋아진 느낌이었다.
저도 모르게 샤로니아의 입술이 비쭉 나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키언과 눈이 딱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