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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망한 구원자 (67)화 (67/123)

67화

머릿속이 쿵쿵 울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루카스는 마즈다크 왕국이 멸망하던 날처럼 하늘이 핏빛으로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10년 만에 간신히 찾은 동생을 또 잃어버리다니. 이 갈가리 찢기는 마음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다 내 탓이야. 오빠가 미안.’

그는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져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꾹 눌렀다.

“오, 맙소사! 저하, 지금 우세요?”

헤이든이 깜짝 놀라며 루카스의 얼굴을 살폈다.

“그럴 리가요. 지금은 울 시간도 아까운걸요.”

루카스가 고개를 가로젓자 한시름 놓은 듯 헤이든의 어깨가 아래로 내려갔다. 자신의 마음도 이렇게 타들어 가는데 그는 오죽할까.

헤이든이 표정을 가다듬고 자신의 기사단을 닦달했다.

“제대로 찾고 있는 거야? 왜 아직 소식이 없어? 발에 불난 것처럼 뛰란 말이야. 진짜로 발에 불붙이기 전에!”

루카스는 샤로니아를 잃은 충격이 너무도 심해서 헤이든의 본모습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저 애써 주는 그녀가 고마울 뿐이었다.

“벤자크, 아직도 신호가 오지 않았나?”

루카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심복을 향해 물었다. 지금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마력을 쏟아부어 광범위한 추적 마법을 펼치느라 온 기력을 다 소진한 상태였다.

“아직 신호가 없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누군가 인위적으로 황후 폐하의 마력을 제어한 것 같습니다.”

“제기랄!”

최악의 상황이다. 황실 기사단과 헤이든의 기사단, 그리고 루카스의 수하들이 수도를 이 잡듯 뒤지고 있는데도 이렇게 소식이 없다니.

‘설마, 수도를 벗어난 건가?’

절망적인 상황을 떠올린 루카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을 때였다.

“저하! 저것 좀 보십시오!”

벤자크가 가리키는 손끝에 거대한 물기둥이 보였다.

“저기다!”

저기에 분명 샤로니아가 있을 것이다. 루카스의 눈동자에 희망의 빛이 스며들었다.

“자, 다들 주목! 모두 저 물기둥을 향해 이동한다!”

헤이든의 명령에 기사단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도 전역에 퍼져 있던 기사단 전체가 거대한 물기둥을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 * *

용병단을 처리한 샤로니아가 건물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가 있던 건물은 이미 지하에서부터 솟구친 물기둥으로 인해 지붕이 다 망가진 상태였기 때문에 언제 붕괴할지 몰라 위험했다.

“우와…….”

샤로니아가 고개를 젖혀 하늘과 맞닿은 거대한 용오름을 올려다보았다. 건물 안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스파크를 일으키는 물기둥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장관이었다.

그녀가 홀린 듯이 물기둥에 시선이 빼앗겨 있는데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용오름이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인지 파악하기 위해 사람들이 전부 집에서 나와 그곳에 몰려 있었던 것이다.

빽빽한 인파로 인해 샤로니아는 더 이상 걸음을 내디딜 수 없었다.

‘어서 황궁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자꾸만 키언의 얼굴이 떠올라 샤로니아의 마음이 바빠졌다. 그녀가 난처한 얼굴로 서 있자니 엄마를 따라 물기둥을 구경 나온 어린아이 하나가 외쳤다.

“여신님! 여신님이다!”

사람들의 눈동자가 샤로니아를 향했다. 그녀에게서 알 수 없는 신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왠지 모르게 거대한 용오름도 그녀의 손짓 하나면 사라질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그녀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대단했다.

가녀린 몸에 담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광대한 힘은 그녀의 몸을 뒤덮고 아지랑이처럼 너울치고 있었다.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도, 눈을 마주칠 수도 없는 거룩하고 고귀하며 순수한 힘.

누군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여신님…….”

그 옆의 누군가도 급하게 모자를 벗은 뒤 예를 갖추며 뒤로 물러섰다.

“여신님을 뵙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이 점점 퍼지더니 결국 그 자리에 모인 이들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우리를 위해 여신님이 오셨어.”

“성녀님이 여신님이셨어!”

“이제는 황후 폐하가 되셨잖아.”

“우리를 위해서 오셨던 거야.”

살짝 흥분이 깃든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키언은 무슨 정신으로 황궁을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오로지 그녀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녀가 무사한 것을 제 두 눈으로 확인하고, 그녀의 체온을 제 손으로 확인해야만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정 구슬이 가리키는 곳은 수도의 외곽지였다. 황궁에서도 거대한 용오름이 똑똑히 보였던 탓에 그녀가 있는 곳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엄청난 인파였다. 근처에 사는 모든 사람이 한자리에 모인 것처럼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장면에 키언은 멍하게 입을 벌렸다.

사람들에게 막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백마가 투레질을 하며 한자리를 맴돌았다.

키언은 정말 전속력을 다해 달린 충직한 백마의 갈기를 한차례 쓰다듬어준 뒤 말에서 훌쩍 내렸다.

그를 쫓아온 기사단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인지 굳은 얼굴로 말에서 내렸다.

‘이 일을 어떡한다…….’

한시가 급한데 이렇게 수많은 사람에게 가로막히니 가슴이 답답했다. 이들을 빨리 흩어 놓으려면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겠지만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키언이 막막한 얼굴로 메마른 얼굴을 쓸어 올리는데 희한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썰물이 갈라지듯 인파가 둘로 나눠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끝에 샤로니아가 나타났다.

그녀를 본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무사했구나. 다친 곳은 없는 건가? 이따위 무능력한 남자와 결혼했으니 질려 버렸겠지? 그럴 만도 해.

안도감이 몰려오는 한편, 심한 자책으로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샤론…….”

나의 샤론. 나의 사랑.

키언이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폐하…….”

샤로니아 역시 키언을 발견하고 낮게 중얼거렸다.

급격하게 수척해진 그의 얼굴을 보니 그간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남자는 자기 자신을 얼마나 못살게 군걸까.

거칠해진 뺨에 손을 얹고 말해 주고 싶었다. 괜찮다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그런데 마음과는 달리 눈물이 차올라 앞이 뿌옇게 변했다.

그의 곁에 가야겠다는 마음밖에 없었는데. 황궁까지 뛰어서라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었는데 이상하게도 발걸음은 한없이 느리기만 했다.

심장이라도 파내어 내놓을 것처럼 애끓는 마음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서로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딛는 그들을 보면서 제국민들은 숨을 죽였다.

살면서 이토록 아름다운 장면은 처음이었다.

‘서로 사랑하고 있구나.’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귀족들이 자신의 이득에 따라 정략혼을 한다는 걸 평민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혼인한 뒤 애인을 따로 두기도 했다.

정부를 통해 자녀를 낳은 귀족들도 많았다. 하지만 자신의 피가 섞였어도 사생아는 사생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차별과 불행이 당연한 세상에서 황제와 황후가 서로 이토록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제국민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샤로니아에게 가까이 다가선 키언은 목이 막힌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샤론…….”

그저 갈라진 목소리를 쥐어 짜내 그녀의 이름만 다시 불렀을 뿐이었다.

제 손이 닿으면 부서져 버릴 것 같아서 그녀의 뺨을 향해 올린 손을 차마 대지도 못했다.

샤로니아가 바들바들 떨리는 키언의 손을 붙잡아 끌어당겨 그의 손바닥 위에 얼굴을 기댔다.

“그러실 것 없어요. 보다시피 저는 아주 멀쩡하니까요.”

그녀가 설핏 웃는 것을 본 키언은 울지 않으려고 잇새를 꽉 사리물었다.

그렇게 찬란하고 눈부시던 웨딩드레스가 새카맣게 때가 타고 여기저기 찢어져 있는데 멀쩡할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험악한 상황을 빠져나온 것이다.

내가 구해줬어야 하는데. 아니, 애당초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어야 하는데.

키언이 자조하며 쓰게 웃자 그의 생각을 눈치챈 샤로니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다 지난 일이에요.”

이제 용병단의 잔당들을 찾아내 배후를 밝히고 그들을 응징하는 일이 남았을 뿐이다.

키언과 샤로니아가 애틋한 모습으로 서로 속삭이는 모습을 본 사람들 중 누군가가 머뭇거리다 툭 인사말을 뱉어 냈다.

“결혼 축하드려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이 너도나도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그 축하 소리가 마치 환호처럼 메아리쳤다.

“결혼 축하드립니다.”

“정말 잘 어울리세요.”

그러고는 집에서 가져온 꽃과 장식들을 키언과 샤로니아의 발치에 던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인파가 많이 몰렸던 만큼 그들이 던진 꽃은 금방 수북하게 쌓였다. 사람들이 양쪽으로 나뉘어 선 채로 꽃을 던졌기 때문에 아주 먼 곳까지 꽃길이 생겼다.

“어머…… 예뻐라.”

샤로니아가 생긋 웃었다. 그러자 키언도 겨우 미소 비스름한 것을 입가에 떠올릴 수 있었다.

“마치 버진 로드 같네요.”

사람들이 깔아 준 꽃길을 바라보는 샤로니아의 시선이 짙어졌다. 그녀가 키언의 팔에 제 손을 끼워 넣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이렇게 된 김에 꽃으로 된 버진 로드를 다시 걸어 볼까요?”

“그대는 정말…….”

할 말을 고르던 키언이 짧게 숨을 내쉬며 뒷말을 덧붙였다.

“……요망해.”

“그걸 이제 아셨어요?”

샤로니아의 말에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쿡, 웃음을 내뱉었다.

거대한 용오름도 이제 서서히 사라지고 하늘의 먹구름만 더욱 짙어졌다.

쿠르르릉, 천둥과 번개가 번쩍이기 시작한 하늘에서 어느덧 투둑투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다! 비가 내린다!”

사람들은 모두 기쁜 얼굴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올려다보거나 손바닥에 빗물을 모으며 즐거워했다.

척박했던 루하르 제국은 근래에 자주 내린 비로 인해 더 이상 척박한 땅이 아니게 되었다.

드문드문 볼 수 있었던 녹지대는 이제 제국 곳곳으로 퍼져 나가 푸르른 생명력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었다. 제국민 모두가 그것이 성녀의 은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20년 만에 성녀를 택한 여신이 자신들에게 내려준 축복이라는 것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꽃길을 걷는 키언과 샤로니아는 제국민들의 감사 인사를 수도 없이 들었다.

상황이 왜 이렇게 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키언은 그들에게 이 말만큼은 해 주고 싶었다.

“내가 더 고맙다네.”

그 시각, 키언보다 한발 늦게 도착한 루카스는 차마 이 경이로운 광경에 끼어들지 못한 채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샤론…….”

무사했구나. 행복해 보이는구나. 그리고 사랑받고 있구나……. 그럼 되었다. 이 오빠는 그거면 되었다.

마구 고개를 주억거리는 루카스를 보고 헤이든이 물었다.

“저하, 우세요?”

마즈다크 왕국이 멸망했어도 꿋꿋하게 버티며 흩어진 수하들을 모으고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자신을 단련해 왔던 루카스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다른 이도 아닌 호감 가는 여자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울기는요. 이건 눈에서 비가 내리게 하는 마법입니다.”

뭐, 때마침 빗방울도 더 거세졌으니 이보다 좋은 핑곗거리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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