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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망한 구원자 (64)화 (64/123)

64화

날씨도 화창하고 예식을 위해 꾸민 홀도 아주 아름다웠다. 결혼식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이었다. 단 하나, 키언과 샤로니아에게 축복을 빌어주고 있는 사람이 마구스라는 것만 빼면 말이다.

일반 귀족들은 사제를 청해서 결혼식을 올려도 되지만 황제의 결혼식이다 보니 축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대사제장이어야 했다.

그들의 관계를 모르는 귀족들은 샤로니아의 웨딩드레스가 예쁘다는 둥,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둥, 결혼식에서 나눌 법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반면 키언은 신성한 결혼식에 신성하지 않은 대사제장이 축언하는 것을 불붙은 눈으로 노려보는 중이었다. 아무런 내색 없이 이렇게 순순하게 축언을 읊고 있다는 것이 더 화를 부추겼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마구스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기만 했는데도 귓가에 욕설이 들리는 듯하다.

‘이 남자, 눈으로 욕하는 데 타고났어.’

샤로니아는 웃지 않으려 입술 안쪽을 지그시 깨물었다.

하지만 그런 시선을 받고도 마구스는 아주 평온한 얼굴로 보란 듯이 할 말을 다 했다.

“이제 서약을 하겠습니다. 제국 최고의 신 아즈다와 물의 여신 아나히나의 이름 앞에 두 사람은 남편과 아내의 본문을 다하기로 서약하겠습니까?”

아무리 마구스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결혼 서약엔 응해야 했다.

“서약합니다.”

“네, 서약합니다.”

샤로니아의 목소리를 들은 키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신부에게 키스하세요.”

이다음 순서가 이럴 것을 미리 알고 있었으니까.

키언이 샤로니아의 베일을 걷어 올렸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햇살보다 더 환하게 웃으며 키스했다. 그것을 본 하객들이 박수를 보냈다.

마구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쨌든 결혼식은 잘 마무리되었다. 그가 끝까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순순히 축복하는 모양새가 좀 찝찝하긴 했지만 말이다.

“먼저 인사를 하고 있을 테니 옷을 갈아입고 오세요.”

키언이 샤로니아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원래 결혼식이 끝나고 피로연이 시작되면 신부는 움직이기 힘든 웨딩드레스를 벗고 활동하기 편한 피로연 드레스로 갈아입게 되어 있었다.

“네, 그럼 다녀올게요.”

샤로니아가 엘런과 함께 홀을 벗어났다.

* * *

“왜 이렇게 조용하지?”

“조용하니 일하기 좋네요.”

이상하리만치 사람이 보이지 않는 신전 복도를 조심스럽게 걸으며 더랜과 레이턴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지도는 확실한 건가?”

더랜이 불안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고 레이턴에게 자꾸 질문을 던졌다.

“아휴, 일을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앙탈을 부리실까. 사람 열받게.”

레이턴이 슬쩍 성질을 드러내자 더랜도 더 말을 보탤 수 없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신전에는 유달리 비밀 통로가 많았다. 그것은 암암리에 퍼져 있는 사실이었는데, 그것을 증명하듯 지도까지 버젓이 존재했다.

그들은 지금 비밀 통로를 통해 샤로니아를 납치할 계획을 갖고 잠입한 상태였다. 가는 곳마다 사람을 마주치지 않은 것이 마구스가 내린 명령 탓이라는 걸 몰랐던 그들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움직이기 편하다며 콧노래를 불렀다.

“다른 용병들은?”

“이쯤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걱정 마세요.”

레이턴이 지도 속에 비밀 통로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씨익 웃었다.

“곧 성녀가 지나갈 시간이니까, 실수하면 안 돼.”

더랜은 레이턴에게 주의를 단단히 주고 비밀 통로 입구 쪽에 몸을 숨겼다.

조금 있으려니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가 들렸다.

“축하드려요, 오늘 정말 천사같이 예쁘세요.”

“엘런, 그러다가 인사만 백 번쯤 하겠어.”

곧이어 결혼식의 여운이 남아 살짝 상기된 목소리들이 웃으며 재잘대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 신녀님, 잠시만요.”

그때, 뒤쪽에서 신녀 한 명이 엘런을 불렀다.

샤로니아와 엘런은 갑자기 일어난 일에 당황해서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하지만 신녀가 다시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하자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아, 성녀님. 잠깐만요.”

“그래, 다녀와. 여기 있을게.”

“금방 올게요.”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던 엘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을 호출한 신녀에게로 향했다. 샤로니아는 석연치 않아 하는 엘런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고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빈틈을 노리던 더랜에게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혼자된 여자를 납치하는 건 아주 쉬웠으니까.

“읍!”

주변을 살핀 레이턴이 수면제를 묻힌 손수건으로 재빨리 샤로니아의 입을 막았다.

불시에 기습을 당한 샤로니아가 놀라 버둥거렸지만, 수면제가 온몸에 퍼지기 시작하자 맥없이 축 늘어지고 말았다.

“이거 너무 쉬운 거 아닙니까?”

쿡, 웃음을 내뱉은 레이턴이 샤로니아를 들쳐 업고 비밀 통로 안으로 사라졌다. 보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더랜도 급하게 그 뒤를 따랐다.

멀리서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클리오라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뒤틀렸다. 모든 것이 자신의 계획대로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신녀 하나를 시켜 엘런을 불러내도록 일을 꾸민 것은 다 그녀가 한 짓이었으니까.

마구스의 지시로 신전이 비워진 것 또한 일을 수월하게 만들었다. 아주 깔끔하게 성녀를 제 눈앞에서 치워 버렸으니 이제 어디 한 번 제대로 일을 벌여 볼까나.

클리오라는 마법으로 샤로니아의 모습을 한 채, 아주 도도하게 복도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런이 급하게 돌아왔다.

“성녀님, 오래 기다리셨죠. 별거 아닌 일이었……!”

“말 똑바로 못하겠니?”

급하게 다가와 있었던 일을 설명하던 엘런의 표정이 와락 굳었다. 잠깐 사이에 샤로니아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황한 엘런이 사색이 되어 더듬거렸다.

“네? 그, 그게 무슨…….”

“결혼식을 마쳤으니 나는 이제 엄연히 황후야. 성녀 나부랭이가 아니라 존귀한 황후라고.”

엘런이 멍하게 입을 벌리고 샤로니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항상 온화하고 따뜻하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냉정하고 오만한 눈빛을 한 샤로니아가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알아들었으면 앞으론 실수하지 말고 황후 폐하라고 깍듯이 존칭을 쓰도록 해.”

엘런은 자기 할 말만 표독스럽게 뱉은 뒤 몸을 돌려 꼿꼿하게 걸어가는 샤로니아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네, 화, 황후 폐하.”

샤로니아의 이상 행동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조심성 없이 내딛는 발걸음과 시종이 문을 열어주는 것도 기다리지 못해 먼저 벌컥 열어젖히는 모양새 하며, 마치 다른 사람처럼 달라진 모습에 헤르몬 궁 사람들은 서로 흔들리는 눈빛을 주고받았다.

“색깔이 좀 촌스럽지 않아?”

이멜다가 준비한 피로연 드레스를 입은 샤로니아가 거울에 제 모습을 이리저리 비쳐 보며 말했다.

“예? 성녀님께서 좋아하시던 색이잖아요.”

이멜다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대꾸했다. 샤로니아는 평상시 자신의 눈동자 색과 잘 어울린다고 하늘색을 좋아했다.

그래서 이멜다가 특별히 심혈을 기울여 하늘색 드레스를 만들었고 샤로니아도 예쁘다고 칭찬을 했었는데…….

“이제부터 바뀌었으니까 그렇게 알도록 해. 저기, 저기 걸린 붉은색 드레스를 가져와. 그리고 호칭부터 똑바로 하지 못하겠니?”

신경질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엘런과 이멜다는 서로 근심 어린 시선을 주고받았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다른 사람처럼 구는 샤로니아가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지만, 엘런과 이멜다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들 왜 이렇게 굼뜬지 모르겠네.”

제멋대로 드레스와 장신구를 고른 클리오라가 이번에는 준비가 느리다며 한바탕 난리를 부렸다.

“그건 당연히 성녀님, 아니 황후 폐하께서 준비해 놓은 드레스를 다른 걸로 바꾸셔서 그런 거잖아요.”

이멜다가 불퉁하게 대꾸하자, 클리오라가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서? 그게 내 탓이라는 거니?”

“에이, 좋은 날 왜, 왜 그러세요? 이만 가세요.”

엘런이 중간에 어색하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안 그러면 무슨 일이 생길 것처럼 기운이 흉흉했으니까.

흥, 들으란 듯이 콧방귀를 뀐 클리오라가 몸을 휙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본 이멜다가 땅이 꺼져라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첫날밤을 치르면 주변 것들 교육부터 단단히 시켜야겠어.’

그렇게 다짐한 클리오라가 피로연장에 들어서기 전, 한 번 더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이제 안에 들어서면 모두를 속이는 연기자가 되어야 했기에 마음을 가다듬는 의미에서 더욱 옷차림에 신경을 쏟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누가 봐도 샤로니아와 외모가 똑같은데 어떻게 의심을 할 수 있겠는가. 훗,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매단 클리오라가 피로연장으로 들어섰다.

 그녀가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루카스가 다가왔다.

“샤론, 오늘 긴장해서 아침도 제대로 못 먹었지? 자, 이것 좀 먹어 봐.”

샤로니아의 모습을 한 클리오라가 루카스가 내민 접시를 바라보았다. 갖가지 빵과 과일들을 가득 담은 접시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썹이 한차례 꿈틀거렸다.

“왜? 먹을 기운도 없는 거야? 그럼 내가 먹여 줄게, 아, 해.”

루카스가 동생을 아낀다는 것은 마즈다크 왕국 내에서도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라서 클리오라도 익히 알고 있었다.

‘옘병…….’

그런데 이 정도로 시스터 콤플렉스인 줄은 몰랐다.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는 듯이 과장된 루카스의 행동에 클리오라는 소름이 끼쳤지만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고맙지만 내가 먹을게.”

클리오라는 루카스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상기했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루카스는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다. 샤로니아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마법에 관한 지식이 뛰어난 자이니 결코 우습게 봐서는 안 된다.

“샤론, 갑자기 왜 이렇게 유순해졌어? 결혼하고 나더니 역시 오빠의 필요성을 절실히…….”

루카스가 그 뒤로도 열심히 뭐라고 떠들어 댔지만, 클리오라는 그의 목소리를 자체 음소거 시킨 뒤 주위를 훑었다.

왠지 평상시와는 다른 샤로니아의 모습에 루카스의 눈에 의뭉의 빛이 서렸지만, 클리오라는 알지 못했다.

‘황제가 어디에 있지?’

지금 그녀의 관심사는 온통 키언에게 쏠려 있었으니까.

광활한 영토를 가진 제국의 황제이자 만인의 우상, 내로라하는 귀족 영애들이 결혼하고 싶어 하는 남자 1순위인 그가 제 남자가 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서 확인하고 싶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카바드 백작과 대화를 나누던 키언이 시선이 마주치자 싱긋 웃었다.

클리오라는 그린 듯한 미소를 꾸며내며 그를 향해 살짝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황제가 제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당신한테 붉은색이 잘 어울린다는 말을 짐이 했던가?”

키언이 클리오라의 허리에 자연스럽게 팔을 두르며 말했다. 평상시에는 입지 않던 강렬한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걸 보니 마치 자신을 유혹하는 것 같아서 지나칠 수가 없었다.

“칭찬으로 들을게요.”

클리오라는 자신의 허리를 감은 그의 강한 팔을 느끼며 해사하게 웃었다. 저 널찍한 품에 안길 생각만으로도 온몸에 짜릿한 감각이 몰려들었다. 어서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침실로 향했으면.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황제의 얼굴에도 조급함이 살짝 드러났다.

“안타깝게도 아직 인사를 다 마치지 못했소.”

“그것참 안타까운 소식이네요. 하지만 오늘은 다들 이해해 줄 거예요.”

클리오라가 유혹하듯 키언의 귓가에 속삭이자 그의 눈동자가 잠시 커졌다.

“뭐, 당신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군.”

“그렇죠? 그럼, 이따 봬요.”

클리오라는 키언에게 의미심장한 눈웃음을 쳐 준 뒤 사람들과 적당히 인사를 나누었다. 이렇게 해 두었으니 신방에 드는 시각이 늦춰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클리오라는 들뜬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조금 이르게 피로연장을 빠져나왔다.

“더 육감적인 옷 없니? 몸매가 좀 더 잘 드러나는 옷 말이야.”

클리오라가 첫날밤에 입을 옷이 마땅치 않다며 구시렁거렸다.

계속해서 원래의 취향을 뒤엎는 행동을 일삼으며 까다롭게 구는 샤로니아를 이멜다는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심플한 디자인을 좋아하셨…….”

“난 이제 취향도 성격도 황후에 걸맞게 완전히 바꿀 거니까 예전 기억은 지금 이 순간부터 잊도록 해. 그리고 육감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니?”

클리오라가 짜증스럽게 되받아치는 말에 이멜다는 별다른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별수 없지. 이렇게라도 하는 수밖에.”

그녀가 오프 숄더처럼 잠옷을 어깨 아래로 내렸다.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보던 클리오라가 픽 웃었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이멜다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둡게 침잠되었다.

드디어 침실에 입성한 클리오라는 흥분을 누르느라 여러 차례 숨을 반복해서 들이쉬고 내쉬었다.

항상 정복을 입은 황제만 보다가 편한 차림을 한 황제를 보니 그것조차도 가슴이 뛰었다.

“폐하…….”

남들이 보면 수줍어한다고 오해하기 딱 좋은 모양새로 웃으며 클리오라가 천천히 키언에게 다가갔다.

“부인……. 드디어 부인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군요.”

키언이 그녀를 다정하게 안으며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가 웃으며 건네는 말에 클리오라가 억지로 미소 지었다.

“저를 그런 호칭으로 부르고 싶으셨군요.”

높임말을 쓰기에 깍듯이 황후라고 칭해 줄 줄 알았건만. 클리오라가 농담처럼 진담을 포장해서 말했다. 하지만 뭐, 그것도 썩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오늘 하루, 많이 힘들진 않았습니까?”

키언은 그런 사실은 전혀 모른 채 샤로니아의 안위만 걱정했다.

“괜찮습니다.”

클리오라는 일단 싱긋 웃었다. 황제가 생각보다 말이 많네.

그녀는 황제가 짐승처럼 달려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어서 속으로 꽤 당황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첫날밤인데, 한잔하겠소?”

키언이 잔에 레드 와인을 따르며 말했다. 그는 하루 종일 긴장 상태로 지냈을 샤로니아를 생각해서 한 행동이었지만, 슬슬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 클리오라는 그의 배려가 짜증스러울 뿐이었다.

‘갈수록 가관이네.’

속으로 비릿하게 웃은 클리오라는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고 고분고분 그의 말에 응했다.

“네, 그러죠.”

이제는 하도 억지로 웃어서 얼굴 근육이 당겼다.

제기랄, 불 끄고 누우면 될 일을.

클리오라의 눈빛에 아주 잠깐 사나운 기색이 서렸다가 사라졌다. 일단 가장 큰 일을 치러야 들키지 않고 고비를 넘길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티를 내지 않고 클리오라가 잔을 내밀었다.

“오늘을 기념하는 의미로, 짠, 해요.”

그녀의 말에 키언이 피식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챙, 맑은소리가 울리고 그들은 오랫동안 숙성되어 풍미가 넘치는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야릇하게 흘러갔다. 키언이 한 걸음 다가서자 클리오라가 슬쩍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키언은 키스를 하려 했다. 그런데 자꾸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것이 이상한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꽤 기분 나쁜 위화감이 휘몰아쳐 그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항상 그녀만 보면 주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미쳐 날뛰던 욕망이 오늘따라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퍽 기묘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는 애써 그런 생각을 누르며 그녀의 허리를 감아 당겼다. 그러자 그녀가 유혹이 짙은 손길로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그 순간 그의 시선이 훤히 드러난 그녀의 견갑골 위를 향했다. 그는 마사지를 해 주며 일일이 살폈던 점의 위치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점이 사라졌어?’

키언의 표정이 단박에 굳었다.

그가 자신의 가슴팍에 올려진 그녀의 손을 황급히 거머쥐었다. 그리고 샤로니아가 항상 끼고 다녔던 블루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살폈다.

‘흠집이 없어!’

실수투성이였던 프러포즈로 인해 흠집이 난 반지를 그녀는 추억이 깃들었다며 소중히 여겼었다. 그런데 지나치게 멀쩡하고 반짝이는 반지가 그녀의 손에 떡하니 끼워져 있었다.

“저기, 아파요, 폐하.”

클리오라는 거의 제 손목을 비틀 듯이 거머쥔 황제를 보고 당황했다.

그러자 이번엔 그가 다른 한 손으로 클리오라의 목을 움켜쥐며 살벌하게 물었다.

“너,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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