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요망한 구원자 (63)화 (63/123)

63화

“폐하?”

엘런은 어디 가고 폐하께서 여기에……. 샤로니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런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빙긋 웃는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을 확인한 샤로니아가 황급히 수건으로 몸을 가렸다. 오일 마사지를 위해 옷을 다 벗어두었다는 것을 깜박했다.

“기별도 없이 이러시는 법이 어디 있어요?”

샤로니아가 눈에 힘을 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돌아갈까요?”

키언이 정중한 말투로 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을 살피는 눈빛은 절대 돌려보낼 리가 없다는 확신에 찬 눈빛이다.

“제가 하게 해 주세요. 제가 하고 싶습니다.”

샤로니아가 움켜잡고 있던 수건을 그가 다정하게 여며 주며 말했다.

그의 손이 피부에 살짝 스쳤을 뿐인데 아찔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더군다나 주어가 생략된 말은 다른 의미로 ‘하고 싶다’는 말로 들린다.

‘미쳤어. 음란 마귀가 씌었나 봐.’

샤로니아가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키언이 그녀의 잔머리를 귀 뒤로 친절하게 넘겨 주며 귓가에 속삭였다.

“설마, 마사지 말고 다른 걸 하고 싶은 겁니까?”

“아니요, 그럴 리가……!”

“그럼 계속하면 되겠군요.”

키언이 자연스럽게 그녀를 다시 침상 위에 엎드리게 했다.

샤로니아는 얼떨결에 다시 눕게 되었지만 뛰는 가슴은 전혀 진정되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이 남자는 황제가 안 되었다면 분명 사기꾼이 되었을 거야. 어쩌면 말을 이렇게 청산유수로 술술 뽑아내는지 일순 반박할 말을 잊어버렸다.

게다가 눈빛은 어떻고. 그의 시선이 닿는 자리마다 불에 덴 것처럼 홧홧해진다.

“황제 폐하께 마사지를 다 받고, 제가 호사를 누리네요.”

샤로니아가 모든 것을 단념한 채 그의 손에 몸을 맡기며 말했다.

“그 반대인 것 같은데. 짐이 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만.”

자꾸 주어 생략할래요? 샤로니아가 움찔하며 고개를 들자 쿡,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그의 입술이 뒷목덜미에 닿았다.

“자꾸 움직이면 손이 아니라 다른 걸로 마사지할 겁니다.”

헉, 샤로니아가 몸을 굳혔다. 뜨겁고 말캉한 입술이 닿은 자리로부터 짜릿한 감각이 온몸으로 퍼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뭐,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 나 뭐래니. 마음의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 나가지 않도록 샤로니아가 표정을 다잡았다.

“얌전히 있을게요.”

그녀가 자세를 바르게 하자 키언의 입매가 둥근 호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결혼식 준비를 하느라 그녀가 지치진 않았을까 살피러 온 것이었는데 욕실에서 마사지 중이라는 시종의 말을 듣는 순간, 불순한 사심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마치 포식자의 손에 먹이를 맡긴 것처럼 불안에 떨며 욕실을 나서는 엘런을 보면서도 양심의 가책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남편으로서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음이 기꺼웠다.

“최선을 다해 만족시켜드리죠.”

또다시 주어를 생략한 그가 싱긋 웃었다.

투명하리만치 매끄러운 피부를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아랫배에 뭉근한 기운이 차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마사지에 집중할 거다. 지금은, 말이다.

오일을 제 손바닥에 덜어낸 키언이 그녀의 등과 어깨를 천천히 문질렀다.

매끄러운 피부가 선사하는 부드러움은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묘한 기분을 선사했다.

이렇게 자그맣고 연약한 몸을 가진 여자가 어째서 제게 제국보다 더 큰 존재가 되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그것을 설명할 만한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불편한 곳이 있으면 말하세요.”

키언이 아주 친절한 말투로 말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정말 마사지사라도 된 줄 아나 봐. 샤로니아가 눈을 도르르 굴렸다.

그가 해 주는 마사지는 불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편하지도 않았다. 엘런이 해 줄 때는 눈을 감고 편안히 쉴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굳은살이 박인 손이 제 몸을 어루만지는데 살짝 거친 느낌이 온몸의 세포를 다 깨우는 것 같다. 작은 움직임에도 몸이 예민한 반응을 나타내는데 어떻게 편안히 쉴 수 있을까.

“괜찮아요.”

샤로니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괜찮다고 답하지 않으면 뭐라고 한단 말인가. 대꾸할 별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으니 그냥 괜찮다고 할 수밖에.

“다행이네요. 그럼 다른 곳도 마사지하겠습니다.”

응? ‘다른 곳도’라니요? 샤로니아가 반응하는 속도보다 키언의 움직임이 빨랐다. 그가 샤로니아의 허벅지를 지그시 눌렀다.

온몸을 관통하는 듯한 쾌감에 샤로니아가 움찔, 크게 몸을 떨었다.

“이제 그만하셔도…….”

더운 숨과 함께 저도 모르게 튀어 나간 목소리가 습기가 가득한 욕실 안을 울리며 야릇하게 고막에 달라붙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얼마 되지 않았다고요? 엄청나게 긴 시간이 소요된 것처럼 느껴졌던 탓에 샤로니아의 미간에 골이 생겼다. 잔뜩 긴장한 몸은 지금 이 순간에도 힘들다고 아우성을 치는 중이었으니까.

“힘드실 거 같아서요.”

샤로니아가 꽤 절박한 표정으로 그를 만류했다. 그것을 본 키언의 입가에 막을 수 없이 미소가 떠올랐다.

“그대의 피로도 풀어 줄 수 있고, 피부도 매끄럽게 만들어줄 수 있는 데다, 작은 점의 위치까지 알 수 있는 기회인데 힘들 리가요.”

그가 손가락으로 샤로니아의 왼쪽 견갑골 위를 콕 찍었다.

“흣!”

긴장감을 견디지 못하고 신음이 잇새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여기, 여기도…….”

그가 허리와 종아리 위쪽에 차례로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견갑골 위쪽은 꽤 눈에 띄는 크기의 점이 있어서 익히 알고 있었지만 다른 곳은 아니었다.

“그런 곳에 점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찾아보면 아마 다른 곳에도 더 있을 겁니다.”

타는 듯한 시선이 자신의 몸을 훑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몸을 가린 얇은 수건 한 장은 그의 시선 앞에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졌으니까.

“그걸 찾아서 뭐 하시게요?”

몽롱하게 풀어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샤로니아가 물었다.

“당신을 샅샅이 알고 싶어서요.”

샤로니아의 얼굴 위에 불이 뚝뚝 떨어지는 눈길을 고정한 키언이 그녀가 몸에 두른 수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가슴골 위에 느슨하게 묶인 수건 매듭을 향해서 말이다.

아주 살짝만 건드려도 풀어지고 말 위태로운 매듭을 향해 손을 뻗은 남자가 거부할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속살거렸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말로는 정중하게 허락을 구하고 있었지만, 못된 손은 이미 행동을 시작한 뒤였다.

“제 허락이 필요하세요?”

샤로니아가 조금 불퉁하게 대꾸하자 키언이 쿡, 낮은 웃음을 토해 냈다.

“그럼요, 당연히 필요하지요.”

매끄러운 살결을 살살 어루만지는 손길이 애간장을 태운다.

나쁜 남자 같으니라고. 감질나는 접촉에 미간을 살짝 찌푸린 샤로니아가 본능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허락하겠어요.”

그녀가 살짝 눈을 내리깔고 도도하게 턱을 들어 올린 채 말하는 것을 본 키언은 웃지 않으려고 입술 안쪽을 꾹 깨물었다.

나신으로 그렇게 말해 봤자 무섭기는커녕 몸에 자극만 더 줄 뿐인데. 키언은 그런 속마음은 숨긴 채 매끄럽게 웃으며 답했다.

“허락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그런 뒤 곧바로 입술이 겹쳐졌다.

* * *

“그걸 또 읽고 계시네요.”

엘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하며 샤로니아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결혼식을 앞둔 그녀가 돌아가신 모친의 일기장을 자꾸 꺼내어 읽는 것이 어쩐지 마음 쓰였다.

“나 괜찮아. 그런 표정 하지 마.”

샤로니아가 무심하게 답하며 향기로운 홍차 향을 흠뻑 들이마셨다.

“티가 많이 났어요?”

“어, 엄청나게.”

샤로니아의 말에 엘런이 멋쩍게 이마를 긁적였다.

“그냥, 돌아가신 부모님이 보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설핏 웃는 그녀의 미소가 오늘따라 애처로웠다. 엘런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손끝을 꼬물거리며 말했다.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지실 것처럼 슬픈 표정으로 일기장을 읽으시기에. 제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봐요.”

“내일이 결혼식인데 어떻게 마음이 편할 수 있겠어.”

“혹시…… 마음이 바뀌신 건 아니죠?”

조심스럽게 묻는 엘런을 보고 샤로니아가 쿡,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의 속마음을 이토록 내밀하게 살펴 주는 이는 아마 메르헨을 제외하면 엘런밖에 없을 것이다. 메르헨이 자신을 떠나면서 엘런을 보내준 게 아닐까. 샤로니아는 오늘따라 그런 생각을 막을 길이 없어서 일부러 더 쾌활하게 말했다.

“지금 황제 폐하가 싫어진 거냐고 묻는 거야?”

“아, 아니요. 그, 그런 뜻이 아니고요.”

당황한 엘런이 두 손을 마구 휘저었다. 그 모습이 마치 고양이가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느껴져서 샤로니아는 쿡쿡, 더 큰소리로 웃었다.

엘런은 놀리는 보람을 느끼게 해서 탈이야. 멈출 수가 없거든. 억지로 웃음을 멈춘 샤로니아가 온화한 표정으로 엘런의 손을 잡았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어? 저도요! 저도 손잡아 주세요!”

샤로니아의 얼굴도 볼 겸, 결혼 예복도 살필 겸 찾아온 이멜다가 오른손을 번쩍 들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래, 이멜다도. 다들 항상 고마워.”

“에이, 뭘요.”

“꺅! 성녀님! 아니, 이제 황후 폐하!”

엘런과 이멜다의 손을 맞잡은 샤로니아는 어쩐지 콧날이 시큰해졌다.

결혼을 기뻐해 줄 부모님은 이제 곁에 계시지 않았지만, 그래도 제 결혼을 진심으로 기뻐해 주고 걱정해 주는 이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결혼 전날 밤, 어쩐지 복잡해지는 마음이 이들로 인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정말 고마워.”

샤로니아가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말했다.

* * *

다음 날은 평상시보다 이른 시간부터 하루가 시작되었다. 이멜다는 평상시보다 몇 배나 강한 기운을 풍기면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예복에 흠이라도 생길까 봐 그녀가 어찌나 까랑까랑하게 목소리를 높이는지 다들 잔뜩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베일은 조심해서 옮겨야 해요.”

“네, 알겠습니다.”

시종들까지 결혼식 준비로 정신이 없었기에 헤르몬 궁은 꽤 분주했다. 샤로니아도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이른 아침부터 정신없이 끌려다니다가 겨우 화장대 앞에 앉았다.

“입술 색이 너무 진한 걸까요?”

엘런이 샤로니아의 화장을 고치며 중얼거렸다. 옆에서 샤로니아의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샤가 불쑥 말했다.

“만일 신부의 입술 색깔을 입에 담는 불순 종자들이 있다면 오늘이 이승의 마지막 날이 될걸.”

흐익, 엘런이 어깨를 움츠렸다. 입술 색깔 하나에 목숨이 좌지우지된다니 저절로 손끝이 떨렸다.

우여곡절 끝에 샤로니아의 단장이 끝났다. 밖에서 기다리던 루카스가 그녀의 에스코트를 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왔다.

루카스도 결혼식을 위해 미리 준비한 예복으로 한껏 차려입은 상태였다. 최고급 실크 원단에 소매와 옷깃에 보라색 자수와 장식이 달린 예복은 이멜다가 특별히 루카스를 위해서 제작한 옷인 만큼 그와 아주 잘 어울렸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이 자수정 같은 그의 보랏빛 눈동자를 잘 보여 주었다. 하지만 평상시보다 몇 배나 멋지게 단장을 하고 왔으면서도 그는 샤로니아의 외모만 보이는 것처럼 행동했다.

“샤론, 왜 이렇게 예쁜 거야…….”

울먹이는 루카스의 모습에 샤로니아는 픽 웃었다. 예뻐도 탈이란다. 동생밖에 모르는 오빠의 눈에 자신이 항상 예뻐 보이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예쁘다는 말이 듣기 싫진 않았다.

“안 예쁜 신부가 이상한 거 아닌가?”

“아냐, 넌 신부라서가 아니라 그냥도 예뻤다고.”

루카스의 눈에 비친 샤로니아는 앞으로도 언제나 예쁠 예정이어서 그 당사자인 샤로니아는 반박하는 대신 고개만 흔들고 말았다.

다른 날은 모르겠지만 오늘만큼은 루카스의 말이 빈말이 아닐 것이란 확신이 있었다.

이멜다가 솜씨를 부려 만든 웨딩드레스를 보면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풍성하게 펼쳐진 치맛자락 위로 별빛을 흩뿌린 것처럼 반짝거리는 보석들이 움직임에 따라 각기 다른 빛을 내뿜었다.

또 레이스와 시스루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상반신은 웨딩드레스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해 주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베일이었다. 일반적인 짜임이 아닌 한 올, 한 올 자수가 들어간 순백의 베일은 여신이 이 땅에 강림했다 해도 믿을 정도로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제 가자.”

결혼식장으로.

샤로니아가 한 손으로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린 채, 다른 한 손을 루카스에게 내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