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폐하, 상처가 낫지 않으셨군요.”
어깨에 붕대를 친친 감고 나타난 키언을 보고 테오르가 꽤 복잡해 보이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 이거?”
키언이 픽 웃었다. 그 웃음을 이해하지 못한 테오르의 표정이 더욱 이상하게 구겨졌지만 키언의 웃음은 그칠 줄 몰랐다.
열락의 시간을 보낸 후 정신을 차리자마자 샤로니아가 곧바로 한 행동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의 애정이 듬뿍 들어간 탓에 지나치게 붕대가 두껍게 감겨 남들이 봤을 땐 마치 중상자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그녀가 제게 보내는 걱정과 관심은 언제나 기꺼웠으니까.
“폐하의 안위를 놓고 황궁 안에 괴이한 소문이 돌 것 같습니다만.”
웬만한 상처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키언이 자잘한 상처를 이토록 과하게 싸매고 나타난 것은 충직한 보좌관에게도 꽤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뭐, 마음대로 떠들라지.”
싱글싱글 웃는 키언을 보고 테오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까칠하고 매사에 날이 서 있던 황제는 도대체 어디로 가 버린 걸까.
즉위했을 당시만 해도 황궁 내에 거미줄처럼 사람을 배치해 놓고 소문을 단속하고 사람을 걸러내던 모습과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이었다.
‘그만큼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니까, 오히려 잘 된 건가?’
테오르가 애써 좋은 쪽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였다. 어느덧 황제의 표정으로 돌아온 키언이 불쑥 물었다.
“사로잡은 살수의 정체는 밝혔나?”
“그것이…… 아직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 쯧, 짧게 혀를 찬 키언이 금세 서늘해진 눈빛으로 명했다.
“아마 밝힐 수 없을 거야. 시간 낭비 하지 말고 코넬르에게 내게 들르라고 해. 다른 할 일이 있으니까.”
“예, 폐하 알겠습니다.”
테오르는 얌전히 대답했다. 왠지 기사단장 코넬르의 앞날이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설마, 제국 끝으로 보내시는 건 아니겠지?’
키언이 ‘할 일’이라고 지칭하는 일이란 일반 상식을 넘어서는 아주 고되고 험한 일을 뜻했다. 저렇게 일부러 집무실까지 찾아오게 하는 걸 보면 빤했다. 모두가 기함할 만한 아주 힘든 일을 시키시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키언이 잊고 있었던 뭔가가 떠오른 사람처럼 탄식을 내뱉으며 테오르를 바라보았다.
“아, 자네도 할 일이 있어.”
“예? 저, 저도요? 그…… 할 일이 뭐, 뭘까요?”
테오르는 그가 시킬 일이 제발 평범한 일이길 간절히 바랐다. 제 촉이 불길한 경고등을 계속 깜박이고 있었지만 말이다.
“흑마법에 대해서 좀 알아봐.”
“흑마법요?”
“흑마법과 신전이 연관 있는지도.”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연관이 있다면 신전에 타격을 줄 만한 증거 자료도 알아보도록 해.”
“…….”
“빼도 박도 못할 결정적인 증거가 있으면 좋을 텐데.”
테오르의 입이 멍하게 벌어졌다. 어쩌면 제국 끝으로 가는 게 나을지도.
일거리를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던져 주시는 법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울컥했지만 차마 그렇게 대꾸하진 못했다.
비록 황제가 지금은 어깨에 붕대를 친친 감고 있어서 약해 보이는 것 같지만, 그래봤자 발톱을 숨기고 있는 맹수라는 것을 잘 알았으니까.
* * *
“마즈다크 왕녀였다니…….”
아까부터 이런 말을 중얼거리는 더랜의 눈동자가 반들반들 빛났다.
“공자님은 가끔 저보다 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제국 최고의 용병단 ‘라지카’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살수인 레이턴이 검을 손보다가 불쑥 말했다.
더랜이 서늘하게 노려보자 레이턴은 항복의 표시로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쿡, 웃었다.
“아, 나쁜 쪽이 아니라 좋은 쪽으로 말입니다.”
레이턴, 그는 돈만 주면 도덕, 이성, 상식을 뛰어넘는 어떤 일이든지 한다고 알려진 악당이었다.
그가 누군가 앞에서 예의를 차리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딱 한 가지, 돈을 주는 귀족 나리에게만큼은 예외였다. 그러니 표면적으로나마 더랜에게 숙이고 들어가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다.
“시답잖은 소리 하지 말고, 준비는 다 됐나?”
“그럼요, 저 레이턴을 뭐로 보시고.”
“황실에 반기를 드는 일이야. 잘못되면 끝장인 걸 알고 있겠지?”
더랜은 당당한 레이턴의 말이 못마땅해서 자꾸 염려 섞인 말을 늘어놓았다.
“그래서 더 짜릿한 거 아니겠습니까?”
히죽 웃는 레이턴을 보고 더랜이 ‘미친놈’ 하고 중얼거렸다.
“성녀만 잘 빼돌리면 돼. 황실 기사단이랑 맞붙을 필요가 전혀 없다고.”
“네, 네. 어째 점점 잔소리만 느시는 것 같습니다.”
더랜은 레이턴의 말려 올라간 입매를 바라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레이턴의 말이 백번 옳은 것 같아서.
샤로니아가 마즈다크 왕녀라는 말을 들은 순간, 더랜은 눈이 뒤집혔다.
‘반드시 내가 갖고 말 거야.’
무슨 수를 써서든 갖고 싶었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것이 미친 짓인 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걱정 말고 분부만 하십시오. 언제 시행하면 되겠습니까?”
“결혼식 당일. 아무래도 등잔 밑이 가장 어둡겠지.”
“하하,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즐겁게 웃는 레이턴을 향해 더랜이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성녀가 마법을 쓴다니 마력 제어 팔찌를 구해 놓도록 해.”
“마력 제어 팔찌뿐이겠습니까?”
더한 것들도 많이 준비해 놓았는걸요. 레이턴과 눈이 마주친 더랜이 씨익 웃었다.
그의 눈빛은 악당이자 살수인 레이턴과 다를 것이 없었다.
* * *
“우와, 여기가 그 유명한 황후궁이란 말이죠?”
“내가 여길 다 와 보다니.”
엘런과 이멜다가 목소리를 돋우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헤르몬 궁은 역대 황후들이 머물렀던 궁으로 화려할 뿐만 아니라 실용성까지 갖추고 있는 곳이었다.
성녀가 머무는 하트론 궁과는 크기부터가 엄청난 차이가 났기 때문에 엘런과 이멜다는 목이 뒤로 꺾일 정도로 고개를 젖혀 천장을 바라보았다.
고풍스러운 문양과 장인이 만든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크흠, 그러다 넘어지겠네요.”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엘런과 이멜다가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중년 여인이 서 있었다.
“누구, 십니까?”
엘런이 경계심을 발동하고 묻는데 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황제궁의 시녀장이로군.”
언제 와 있었는지 샤로니아가 2층 계단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성녀님? 언제부터 와 계셨어요?”
엘런과 이멜다가 놀라며 묻는데도 중년 여인의 표정엔 변화가 전혀 없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마샤 케스러라고 합니다.”
오히려 그녀는 꼬장꼬장해 보이는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샤로니아에게 깍듯이 인사를 올렸다.
“안 그래도 폐하께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따라 주어서 고마워요.”
“말씀 낮추십시오.”
그녀는 황제궁의 시녀장이었지만, 키언의 요청으로 황후궁으로 옮겨오게 된 인물이었다. 무뚝뚝해 보이고 다소 무서워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황궁의 큰살림을 도맡아 할 만큼 유능한 인재였다.
황후로서 감당해야 할 일들이 갑자기 늘어날 것이었기 때문에 샤로니아의 안위를 염려한 키언이 마샤를 황후궁으로 보낸 것이었다. 샤로니아 입장에서도 든든한 조력자가 생긴 셈이니 크게 안심이 되는 일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한차례 인사가 오간 후 샤로니아가 마음에 걸렸던 것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간 황제 폐하를 모시며 정이 들었을 텐데, 옮겨오려니 아쉽진 않던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마샤가 픽, 웃었다.
평생 웃는 일 따윈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웃는 걸 보고 엘런과 이멜다가 흐익, 숨을 들이마셨다.
“제 짧은 소견으로 짐작하건대, 황제 폐하를 모시는 일은 아마 계속해야 할 겁니다.”
“응? 그게 무슨 말인가?”
샤로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제궁에서 황후궁으로 옮겨왔는데 어째서 계속 그를 모셔야 한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은 엘런과 이멜다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께서 앞으로 헤르몬 궁에 머무시는 일이 잦아질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럴 리……!”
“다들 여기에 모여 있었군.”
샤로니아는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타난 키언을 보고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저는 이미 두 분을 모시는 걸로 생각하고 있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마샤가 특유의 무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은데 다가오는 키언의 얼굴을 보니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짐이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벌써 인사를 끝냈군요.”
샤로니아와 마샤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 모르는 키언이 웃으며 말했다.
“안으로 드시죠. 차를 올리겠습니다.”
마샤가 능숙하게 대처하는 것을 보고 엘런과 이멜다가 존경심 어린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와, 완전 자연스러워! 엄청 유능해 보여!
“응접실에 먼저 가 계시면 차와 디저트를……!”
“응접실 말고 침실로 가져다주게.”
예상치 못한 키언의 발언에 노련한 시녀장의 표정에 금이 갔다.
“크흠, 네, 침실 말씀이시군요.”
아직 해가 중천이지만, 침실로요. 그녀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엘런과 이멜다의 얼굴이 웃음을 참느라 점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 * *
“폐하, 짓궂으십니다.”
침실로 들어오자 샤로니아가 조용히 키언을 탓했다.
“다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키언이 어깨를 으쓱하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대가 가장 오래 머물 공간이니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것을 바꿔야 하는지 침실부터 살피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가만히 생각을 거듭하던 키언이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샤로니아를 응시했다.
“흐음, 그대도 이상한 생각을 했군.”
“이, 이상한 생각이라니요?”
샤로니아의 어깨가 움찔하는 것을 바라본 키언의 입매가 단박에 느른해졌다.
“가령, 예를 들자면, 그대가 좋아하고 탐구하고 싶어 하는…….”
키언이 끊어 말할 때마다 한 걸음씩 샤로니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남녀의 합에 대해 책을 보고 탐구하던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었는지 이제는 안다. 아무리 글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라도 살과 살이 맞닿는 감각을 글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도.
그것은 뜨거운 밤을 보낼수록 명확해져서 예전에 책을 통해 남녀 관계를 익히려던 기억은 그녀에게 흑역사로 남아 있었다.
키언에게 쫓기듯 뒤로 걸음을 물리던 샤로니아의 다리가 침대 모서리에 닿았다. 숨결이 맞닿을 때까지 다가온 키언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아주 매혹적으로 웃었다.
“단둘이 침실에 있겠다는데 그럼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샤로니아가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했다.
쿡, 키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짐은 그대가 좋아하고 탐구하고 싶어 하는, 이불과 커튼 디자인에 대해서 말한 건데.”
네? 뭐라고요? 샤로니아의 입이 멍하게 벌어진 것을 본 키언이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끼며 그녀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대의 생각을 현실로 만들면 되겠습니까?”
아주 정중한 말투로 묻고 난 키언이 전혀 정중하지 않은 눈빛으로 그녀의 입술을 내려다보았다.
“제 생각이 어때……!”
거짓말에는 도무지 재주가 없는 그녀가 머릿속을 가득 메운 불순한 상상 때문에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화르르 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던 키언의 이성이 뚝 끊어졌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내 머릿속이 이상한 상상으로 가득 찼으니까.”
그가 급하게 샤로니아의 입술을 베어 물자 그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샤로니아가 뒤로 넘어가며 푹신한 침대가 그들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