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키언이 본능적으로 샤로니아의 어깨를 잡아 옆으로 당겼다. 그와 동시에 화살 하나가 낡은 분수대에 퍽, 소리를 내며 박혔다.
헉, 도대체 이게 무슨……. 키언과 샤로니아가 상황을 판단하기도 전, 다시 화살이 날아들었다.
“제기랄!”
키언이 이를 아득 갈았다. 평상시에 검을 차고 다니지 않으니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말았다.
“폐하! 조심하십시오!”
그림자 기사단이 모습을 드러내며 날아드는 화살들을 검으로 쳐냈다.
곧 새카만 복장으로 정체를 가린 살수들이 검을 빼 들고 덤벼들었다.
채재쟁, 순식간에 전쟁터를 방불할 정도로 접전이 일어났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헤이든이 격전지를 뚫고 키언과 샤로니아를 향해 다가왔다. 그러다가 샤로니아의 등 뒤에서 접근하는 살수를 향해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그대로 던져 명중시켰다.
“단장님! 여기요!”
헤이든의 휘하에 있는 기사단원 하나가 그녀를 향해 장검을 던졌다.
“고마워!”
그와 동시에 키언을 호위하는 황실 기사단 측에서도 그를 향해 검을 던졌다.
“폐하, 받으십시오!”
검을 받아든 키언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감히, 겁도 없이 황제를 덮친 간 큰 놈들의 얼굴을 꼭 보고야 말 테다.
“아, 젠장!”
치맛자락이 다리에 감기자 헤이든이 거친 말을 내뱉으며 치맛단을 위로 부욱, 찢었다.
헉,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그녀를 뒤따라온 루카스가 그 장면을 보고 놀라 신음을 뱉어 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살수들을 물리치고 샤로니아를 지키기 위해 그의 손에서 마법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거센 바람이 살수들의 시야를 가렸다. 잘 훈련된 황실의 기사단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어떻게 보면 결과가 정해진 싸움이었다. 수적인 면에나 능력 면에서나 우월한 기사단이 살수들을 제압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니까.
“전부 죽이지 마라.”
키언이 살벌하게 말하는 것을 들은 기사단이 고개를 숙여 그의 명을 받았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쓰러진 살수들이 마치 바람에 날리는 모래처럼 스르륵, 흩날려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놀란 기사단이 우왕좌왕했다. 열 명 정도 되던 살수들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하자 모두 표정이 하얗게 질려갔다.
샤로니아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한 명이라도 사로잡아야 어떻게 된 것인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텐데.
그녀는 마법을 사용해 분수대 물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살수 하나를 물에 가두었다.
사라라락, 모든 살수가 풍화되어 날아갔지만, 그녀가 물에 가둔 살수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을 본 기사단원들이 안심하며 긴 한숨을 뽑아내었다.
헤이든 측 기사단원들도, 황실 측 기사단원들도 모두 같은 마음으로 ‘살았다’를 외쳤다. 만일 오늘 습격에 대한 모든 증거물이 사라진다면 혹독한 내일을 맞아야 했을 테니까.
“서둘러 상황을 정리하도록 해. 코넬르는 이자의 정체를 밝혀서 보고하고. 시간은 많이 줄 수 없으니 그리 알게.”
“존명. 폐하의 명을 받잡습니다.”
기사단장 코넬르가 기합이 단단히 들어간 모습으로 고개를 숙였다.
모두들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폐하, 다치신 거 아니에요?”
샤로니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자신이 다친 것도 몰랐는지 키언이 제 어깨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썼다.
아까 화살이 날아들 때 비껴 맞았는지 찢어진 옷 사이로 피가 배어 나와 있었다.
“이 정도 상처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가 갑자기 시선을 홱 돌려 헤이든을 바라보았다.
“백작, 뒷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일단 들어가지.”
헤이든이 다리 한쪽을 훤히 드러내놓고 다니는 것을 본 키언이 못 볼 꼴을 본 사람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흥, 제가 뭐 어때서 그러세요?”
헤이든이 지팡이처럼 검을 의지한 채 일부러 각선미를 뽐내자 그녀 휘하의 기사단원들이 창피해하며 시선을 피했다.
“폐하의 말씀대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루카스가 만류하고 나서자 놀랍게도 헤이든이 곧바로 수긍했다.
“네, 뭐, 그러죠.”
그녀가 고분고분 말을 듣는 것을 본 사람들은 기함하며 입을 쩍 벌렸다. 저 악명 높은 델라크 백작을 길들인 사내가 나타나다니!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던 살수의 습격은 그렇게 일단락 지어졌다.
* * *
그 시각, 신전 깊숙한 방에 마련된 주술진에서 눈을 감고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클리오라가 눈을 번쩍 떴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한껏 예민해진 표정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빌어먹을…….”
저도 모르게 욕설이 잇새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지?”
옆에서 한가롭게 경전을 읽던 마구스가 알은척하자, 클리오라가 원망이 가득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그러게, 무리수라고 했잖아요. 한 놈이 사로잡혔어요. 실패했다고요!”
하지만 마구스의 느긋한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어차피 전력을 파악하기 위한 도구였어. 안 그래?”
제기랄, 자기 힘은 하나도 안 들어가니 그렇게 여유롭게 대꾸할 수 있겠지. 클리오라가 못마땅한 얼굴로 구시렁거렸다.
그녀의 낙인을 드러낸 이후, 마구스는 마치 클리오라의 힘을 다 빼먹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그녀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번 일만 해도 그랬다. 황제와 성녀를 습격했을 때 성공률이 어느 정도일지 테스트하자고?
그게 왜 필요하지? 내가 황후의 자리에 앉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건데. 클리오라는 납득할 수 없다는 듯이 씩씩거렸다.
“그런데 어떻게 사로잡힐 수가 있지? 실체가 없는 인형에 불과하다고 하지 않았나?”
마구스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클리오라는 낮은 한숨을 내쉰 뒤,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도도하게 걸어와 그가 읽던 경전 몇 장을 쭉 찢었다.
신에 대한 경외심 따위는 애당초 없었던 마구스는 제재도 하지 않고 아무 말 없이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흑마법을 사용하면 실체가 없는 인형들은 무(無)로 되돌릴 수 있죠.”
그녀의 손에서 불길이 치솟자 찢어 낸 경전이 타들어 갔다. 재가 된 종이를 클리오라가 입김으로 훅 불자 그녀의 손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사로잡힌 인형은 이렇게 된 거예요.”
클리오라가 마구스가 마시던 차를 아까 찢어낸 경전에 부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불을 붙였지만 젖은 종이는 타지 않고 그대로 그녀의 손에 남았다.
“마법인가?”
마구스가 꽤 흉흉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다 알아? 클리오라는 짜증이 솟구쳤지만 별 내색 없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마즈다크 왕녀인데 당연하지 않겠어요?”
“번거롭게 됐군.”
마구스가 짙어진 시선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오늘의 습격은 황제와 성녀의 전력을 파악해서 약점을 노리기 위한 모의실험과도 같았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체계가 잘 잡혀 있었다. 더군다나 성녀가 마법을 쓸 줄 안다니.
“성녀를 치워 버려야 네 변신 마법이 제대로 먹힐 텐데, 쉽진 않겠어.”
마구스가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클리오라가 픽, 웃었다.
“그건 걱정 마세요. 궂은일을 나서서 해 줄 멍청이를 섭외해 놨으니.”
그녀의 눈동자가 위험한 빛을 발하며 반짝거렸다.
* * *
“여기 앉으세요.”
샤로니아가 소파를 가리키자 키언의 입매가 넓은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그녀에게 환자 취급을 받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을 줄이야. 그녀의 관심이 오롯이 제게 향해 있는 것이 좋았다.
“별거 아닌 상첩니다.”
딱 보기에도 치료할 마음이 없는 키언을 보고 샤로니아의 눈꼬리가 뾰족해졌다.
“그냥 훈련하다가 다친 것도 아니고 살수가 쏜 화살에 맞으셨어요. 독이라도 묻어 있으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독이 있었다면 벌써 정신을 잃었겠지요.”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하는 걸 보니 독이 없는 것 같긴 한데……. 그가 자기 몸을 너무 소홀히 여기는 것 같아서 샤로니아는 괜히 속이 끓었다.
“그래도 안 돼요. 치료를 받으셔야 해요.”
자신의 지청구를 들은 키언이 오히려 싱글싱글 웃자 샤로니아의 한쪽 눈썹이 느리게 위로 올라갔다.
“치료를 안 받겠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보란 듯이 상의 단추를 툭툭 풀었다.
“벗을까요?”
그의 눈이 짓궂게 휘어져 있었다.
“이미 벗고 계시잖아요.”
샤로니아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이 그가 상의를 벗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보고 있으니까, 좀 흥분되는데.”
뭐라고요? 샤로니아가 어깨를 파드득 떨자 키언이 쿡쿡 낮은 웃음을 토해냈다.
“폐하, 잊지 마세요. 폐하께서는 지금 환자거든요.”
샤로니아는 곱게 눈을 흘기며 그의 처지를 일깨워 주었다. 안 그러면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 것 같았으니까.
그녀의 시선이 단단하게 솟아오른 사내의 흉근과 왕(王)자 모양으로 존재감을 뽐내는 복근으로 향했다. 조각처럼 빚어진 몸매는 언제 봐도 놀라울 따름이다.
“보지만 말고 만져도 됩니다.”
키언이 씨익 웃으며 하는 말에 샤로니아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렇게 말 안 해도 만질 거예요.”
상처 부위를요. 샤로니아가 자칫 불순해 보이기 쉬운 제 말에 설명을 덧붙이며 크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키언이 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홀린 듯이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이만한 상처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상처를 치료하는 대신 다른 걸 하고 싶어서 몸이 들썩이지만 참아야겠지.
그런 시선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뚫어져라 바라보니 상처를 살피는 샤로니아의 얼굴은 갈수록 뜨거워졌다.
“조금만 참으세요.”
그녀가 한 말이 상처를 치료할 때의 아픔을 참으라는 것인지, 아니면 불순한 욕망을 참으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뭐, 둘 다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키언이 픽, 웃으며 그녀의 손에 제 어깨를 맡겼다.
우웅, 그녀의 손에서 치유력이 뿜어져 나왔다.
“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치료가 안 돼요.”
샤로니아가 심각한 얼굴로 그의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치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어쩐지 불길했다.
“치유력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까?”
그의 질문에 샤로니아는 근래에 읽었던 마법 서적들의 내용을 되짚어 보았다.
“있어요. 흑마법으로 생긴 상처에는 치유력이 통하지 않는데요.”
“흠, 그러면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자연적으로 치유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그럼 뭐가 문제가 되지? 키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생 치유가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흐르면 나을 상처인데.
그리고 이 정도의 상처는 솔직히 상처 축에 들지도 않았다. 검에 찔려 살점이 떨어져 나가거나, 몸이 관통되거나, 뼈가 부러진 것도 아니니까.
키언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그대가 할 일은 끝났군.”
“네?”
샤로니아가 그의 말을 파악하려는 듯이 눈을 깜박였다.
“이제는 짐이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그의 금빛 눈동자가 매혹적으로 휘어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본 순간, 서로의 위치가 휙 바뀌었다.
“폐하, 아직 상처가……!”
소파에 거의 누운 자세가 된 샤로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항변했다.
“그건 나중에 신경 쓰도록 해요.”
그녀의 붉어진 뺨을 한차례 쓰다듬으며 매끄럽게 웃고 난 키언이 부드럽게 입술을 겹쳐왔다.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있을까?”
그의 손이 야릇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샤로니아는 정말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