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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망한 구원자 (59)화 (59/123)

59화

“하하하, 그대는 정말 황후의 자질을 타고난 것 같소.”

회의를 마치고 나온 뒤로 키언은 줄곧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아, 회의장에 있던 이들의 얼굴을 마법 영상으로 영구히 보존해 놨어야 하는데.”

그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샤로니아가 인사할 때 귀족들의 그 썩은 표정은 정말 혼자만 보기에 아까운 진풍경이었으니까.

만일 샤로니아가 자신의 신분이나 상황을 어쭙잖게 설명하려고 했다면 귀족들은 먹잇감을 앞에 둔 이리처럼 그녀를 물고 늘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을 납득시킬 생각도,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할 생각도 없었다. 그저 황후가 되어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통보’했을 뿐이었다.

그러니 그 늙은 여우들이 제대로 반박도 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다가 돌아간 것이다.

“십 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그만하세요, 폐하.”

도가 지나쳐서 이제는 팔불출로 보이는 키언을 향해 샤로니아가 조용히 속살거렸다.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시종들이 참지 못하고 입가를 씰룩였다. 황제의 팔불출 짓은 이제 익숙해져서 참을 수 있었으나, 샤로니아에게 그만하라고 책망당하는 황제의 모습은 퍽 통쾌해서 웃지 않고선 배길 수 없었다.

“크흠, 어쨌든 이제 결혼식만 신경 쓰면 되겠군요.”

키언이 표정을 고치며 진지하게 말했다.

“보름, 보름 안에 모든 준비를 마칠 겁니다.”

“보름요?”

“왜, 너무 늦습니까?”

늦다니? 생각보다 너무 빨라서 놀란 것인데. 다른 행사도 아니고 황제의 결혼식이었다. 행사 규모가 일반 귀족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보름은 너무 촉박한 시간이었다. 얼떨결에 샤로니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늦다니요.”

“그럼 됐습니다.”

키언이 눈매를 접어 싱긋 웃는 것을 보고 샤로니아도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 * *

헤이든은 이제 드레스가 꽤 몸에 익어 편해졌다. 원로들은 그것을 보고 아주 바람직한 일이라며 흐뭇해했지만, 기사단 안에서는 아직 적응하지 못한 자들이 태반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다리에 감기는 치마가 거추장스러워 훈련 때는 거의 바지를 입었는데, 루카스를 만나러 갈 때면 반드시 드레스를 챙겨 입곤 했다.

“단장님, 혹시…… 그 마법사님을 좋아하십니까?”

“시끄러, 이 자식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했던 기사 하나가 목숨의 위협을 받고 식겁해서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 그들은 샤로니아가 공식적으로 마즈다크 왕녀라는 신분을 밝힌 뒤, 호위를 보강하기 위해 황궁에 들어가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루카스를 만날 목적으로 드레스를 차려입은 헤이든을 보고 기사들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각자 위치는 잘 알겠지? 자기가 맡은 위치가 뚫리면 그 사람은 나한테 죽었다고 생각하면 돼.”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살벌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 헤이든이 어서 각자의 위치로 가라고 손짓했다.

“네, 단장님.”

잠시 얼굴을 찡그린 기사단원들이 곧 임무를 다하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헤이든은 그 후, 약속한 대로 루카스를 만나러 갔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시각이라 노란 불빛이 가득한 황궁 정원은 산책하기에 아주 운치 있었다.

“여기예요!”

헤이든이 우거진 수풀을 등지고 서서 다가오는 루카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런, 제가 숙녀분을 기다리게 했군요.”

루카스가 미안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빠르게 다가왔다.

“아니에요, 제가 일찍 나온걸요.”

헤이든은 괜히 손바닥이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검에 베였다가 상처가 아물면서 새살이 돋아나며 간지러운 것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겨울이 다가오는 것 같군요.”

초록색 이파리들이 점점 갈색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보며 루카스가 말했다.

루하르 제국엔 가을이랄 것이 없었다. 낙엽이 물드는가 싶으면 곧바로 찬 바람이 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울긋불긋 물드는 나뭇잎의 모습은 아주 찰나만 즐길 수 있는 아름다움이었다.

“정말 그러네요. 이런 걸 눈여겨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참 예뻐요.”

알록달록한 이파리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함께 산책하는 사람 때문에 풍경이 더 인상 깊게 보이는지도 몰랐지만 말이다.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저하라고 부르면 될까요?”

마즈다크 왕국의 왕세자이니 당연히 저하라고 부르는 것이 맞았다. 비록 멸망한 나라였지만 마즈다크 왕국의 왕족인 데다, 마법을 다룰 수 있는 몇 안 되는 귀한 사람이니 꼭 존칭을 쓰고 싶었다.

“그냥, 루카스라고 부르세요.”

하지만 그는 끝끝내 소탈하게 말하며 웃었다. 이름을 허락한다는 것은 내가 특별하다는 뜻일까? 헤이든의 눈동자가 한차례 흔들렸다.

어둠을 잔뜩 머금은 흑발 사이로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가 무척 매력적이었다.

“저도, 헤이든이라고 불러 주세요.”

둘은 눈이 마주치자 서로 쿡, 웃었다.

루카스는 여느 영애들과 달리 가식이 전혀 없는 헤이든이 편했다. 그녀의 붉은색 머리카락은 열정적인 그녀의 성격과 아주 잘 어울려서 항상 에너지가 넘치는 느낌을 주곤 했다.

잠시 말없이 걷는 길, 자박자박 걸음을 내딛는 소리만 귓가를 크게 울렸지만, 신기하게도 마음 한편은 풍요로웠다.

그것은 날카롭게 벼린 칼날 위에 선 것처럼 신경을 곤두세우고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고단하게 반복하던 일상에서 잠시나마 해방된 것 같은 아주 특별한 기분이었다.

“여기 잠시 앉을까요?”

루카스가 벤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좋아요.”

헤이든이 자리에 앉으려던 때, 루카스가 그녀의 팔을 탁, 붙잡았다.

본능적으로 몸이 반응해서 하마터면 그를 엎어치기 할 뻔한 위기를 간신히 모면한 헤이든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대체 왜……?

“잠깐만요.”

루카스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벤치 위에 펼쳐놓았다.

“이제 됐습니다. 앉으세요.”

어머, 어머, 어머, 이 남자 좀 봐! 

그녀의 인생에서 이런 대접을 해 준 이는 그가 처음이자 유일했다. 그러니 이런 비명이 저절로 흘러나올 수밖에.

“아, 감사해요.”

헤이든은 저절로 다소곳해지는 자신의 자세를 보며 실소했다. 그녀가 속물이라고 제일 혐오하며 손가락질하던 귀족 영애들의 모습을 자신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밤 산책이 주는 특별한 여운에 취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런 게 데이트인가?’

그런 생각이 들자 헤이든의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혹시 추우십니까?”

자신의 표정을 기민하게 살피며 묻는 루카스를 헤이든은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왜 이렇게 멋있는 건가. 이 남자는 도대체 왜 이토록 완벽한 건가. 마치 그 답을 찾고 싶은 사람처럼.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아뇨, 멋있으셔서요.”

헤이든이 단도직입적으로 건넨 말에 이번엔 루카스의 귀 끝이 발갛게 물들었다. 이렇게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놓고 멋있다고 말하는 여자는 그녀가 처음이다.

미묘한 분위기가 무르익던 그때, 갑자기 헤이든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동남쪽 방향에 2명, 서북쪽 방향에 3명……! 그녀는 침입자의 기운을 느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분명히 살수의 기운이다. 그것도 잘 훈련받은 이들의.

‘누굴 노리는 거지? 황제 폐하? 아니면 성녀님?’

아직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침입자의 기운이 본궁 쪽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턱, 헤이든이 앉았던 벤치 위에 한쪽 다리를 세우며 주위를 살폈다.

“무, 무슨 일입니까?”

헤이든만큼 기척을 읽는 능력이 없었던 루카스가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놀라서 물었다.

하지만 온 촉각을 다 곤두세운 그녀는 그의 말에 설명하는 대신 치마를 서서히 걷어 올렸다.

“여, 여기서 이러시면……!”

루카스가 기함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자신을 보고 멋있다고 말하던 그녀가 갑자기 치마를 걷어 올리는데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뜻을 담은 루카스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온통 흔들렸다.

“쉿! 조용히 하세요.”

루카스를 숨도 쉬지 못하게 만든 헤이든이 허벅지에 고정되어 있던 단검을 뽑아 들었다.

달빛을 받아 더욱 매끄러운 각선미를 뽐내는 그녀의 허벅지에서 어울리지 않는 무시무시한 흉기가 나타나자 루카스의 입이 쩍 벌어졌다.

* * *

그 시각, 샤로니아는 홀로 분수대에 앉아 있었다. 결혼을 앞둔 신부는 마음이 싱숭생숭하다더니 정말 그런 걸까.

‘메르헨…….’

그녀는 오늘따라 너무도 그리운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아무도 오지 않는 낡은 분수대 안에 손을 담갔다.

‘네가 결혼하는 날엔 내가 노래를 불러 줄게.’

‘결혼식을 망칠 작정은 아니지?’

‘마, 망치다니! 리비어 신녀장님도 나한테 볼 건 목소리밖에 없다고 인정해 주셨는데.’

‘목소리밖에 없다니?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 너를. 이리 와, 내가 뽀뽀해 줄게.’

‘꺅! 샤론, 징그러워!’

똑, 분수대 안으로 눈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메르헨, 네 노래가 듣고 싶어.’

추하고 더러운 신전에 어울리지 않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목소리로 노래하던 친구. 그녀의 맑은 음성이 오늘따라 사무치게 그립다.

‘결혼 소식을 들었다면 나보다 네가 더 기뻐했을 텐데.’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턱 밑에 맺혔다. 하지만 아까처럼 분수대 안으로 눈물이 떨어지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의 뺨에서 흘러내린 눈물방울은 마치 그녀의 슬픔을 대신 시위라도 하듯 공중에 떠올라 반짝거렸다.

공중에 알알이 박힌 눈물이 마치 보석을 흩뿌려놓은 것처럼 사방에서 빛났다.

소리 내어 울 수도 없었다. 저 혼자만 행복을 누리려니 미안해서. 너무 미안해서…….

“내 이럴 줄 알았지.”

어디선가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샤로니아는 황급히 흐르는 눈물을 손끝으로 훔쳐냈다.

“그대가 혼자 나갔다고 하기에.”

키언이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은 채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줘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했는데, 그녀의 눈물을 보는 순간 가슴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그녀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폐하…….”

“짐에게 왜 울었는지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키언이 눈물 때문에 차가워진 그녀의 뺨을 한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박제된 것처럼 늘어서 있는 눈물방울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많이도 우셨군.”

발뺌할 수 없는 증거물에 샤로니아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짐이 더 잘하겠소. 그대 눈에서 눈물 나는 일이 없도록.”

“폐하 때문이 아닙니다.”

샤로니아가 성급하게 답변하는 것을 본 키언이 피식 웃으며 눈물방울 하나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누구 때문이든. 그대가 울면…… 마음이 아프니까.”

그러곤 마치 그녀가 평생 눈물 흘리는 일이 없게 만들겠다는 듯이 눈물방울 몇 개를 손가락으로 톡톡, 터트렸다.

그러자 그의 손길이 닿은 눈물방울들이 공중에서 반짝거리며 부서져 내렸다.

“그대를 사랑해……. 아주 깊이, 사랑하고 있소.”

키언이 짙어진 시선으로 눈을 마주치며 고백했다.

“폐하…….”

샤로니아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심장이 고동쳐서 호흡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

“저도요. 저도 폐하를, 사랑해요.”

한번 터진 눈물은 너무도 쉽게 다시 흘러나왔다.

‘메르헨, 미안. 네 몫까지 행복하게 살게.’

불나방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온몸을 내던지던 여자는 사랑하는 이를 얻고서야 비로소 죽음이 두려워졌다.

자신을 희생해서 모든 것을 바로 잡으려던 생각도 바뀌었다. 자폭하는 심정으로 신전을 껴안고 단죄하려던 마음도 버렸다.

대신 소중한 것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을 키우고 싶었다. 불의에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 강력한 능력을 갖고 싶었다.

나의 사람을 지킬 수 있는 힘, 약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힘, 모두의 미래를 보존할 수 있는 힘……. 그 힘을 갈망했다.

그래서 사랑에 힘입어 이제 한발을 더 내디디려 한다.

“폐하를 사랑해요.”

아무 거리낌 없이 웃을 수 있는 내일을 향해.

“조심해요!”

그때, 새된 비명과 함께 화살이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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