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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요망한 구원자 (56)화 (56/123)

56화

“참으로 아름다운 아침입니다.”

샤로니아는 매력적인 음색의 중저음을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잠결에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대는 자는 모습도 어쩜 이렇게 아름다운지 모르겠소.”

그녀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분명히 불같은 밤을 보낸 그 남자의 목소리가 틀림없는데 뭔가 이상하다. 내가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걸까. 아니, 이 남자에게 존댓말을 듣고 싶단 생각은 한 적이 없는데?

“폐하, 말투가 갑자기 왜…….”

샤로니아는 그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닐까 생각하며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침대 옆자리를 돌아보았더니 아침부터 반짝거리는 미모를 뽐내는 황제가 한 팔로 머리를 괸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 공식적인 발표가 있을 거요. 그대와 짐의 결혼에 대한.”

놀란 샤로니아가 입을 뻐금거리자 키언이 쿡, 낮은 웃음을 토해 냈다.

예쁘게 휘어지는 눈매와 햇빛을 받아 빛나는 은발이 눈부셨다. 하지만 반짝거리는 얼굴과는 정반대로 이불 위로 드러난 그의 몸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잘 짜인 근육들이 아침부터 존재감을 뽐내며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 래서 말투를 바꾸셨다고요?”

샤로니아가 제 눈앞에 나타난 남자의 가슴 근육에서 시선을 떼려고 노력하며 물었다.

“왜, 이상합니까?”

예, 아주 이상합니다. 샤로니아는 표정으로 그 말을 대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즉에 바꿨어야 할 말투였습니다.”

그가 사르르 녹을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뺨에 촉, 입을 맞췄다.

아침부터 심장에 무척 해로운 기운을 풀풀 풍기는 이 남자를 어쩌면 좋을까.

“그대를 부인으로 맞을 생각을 하니 너무 기뻐서 잠을 설쳤지 뭐요.”

키언은 초점이 흐려졌다 맑아지기를 반복하는 푸른 눈동자를 지켜보는 것이 진심으로 즐거웠다.

그녀는 당황하는 모습도 어쩌면 이렇게 예쁜 걸까.

그는 국혼을 치름과 동시에 그녀에게 황후라는 이름에 걸맞은 것들을 채워 주고 싶어 안달이 났다. 솔직히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들로 꽉꽉 채워 줘도 부족하고 또 부족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제 인생에 꿈결처럼 임한 선물…….

그녀의 맑디맑은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제 모든 더러운 감정과 죄악들이 다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던 감각만이 선명하던 전쟁터에서 질척거리며 저를 붙잡고 있던 저주받은 피가 씻기는 느낌이랄까.

그녀는 삶의 구원이자, 희망이었다.

두고 보기에도 아까울 정도로 심장에 새겨 버린 내 여인이자 내 사랑…….

이제 그 사랑의 결실을 맺을 날이 머지않았다.

“이렇게 좋은 날인데, 어째 짐만 좋아 보이는 것 같습니다.”

“하, 하, 하, 저도 좋아요.”

샤로니아가 입꼬리를 바들바들 떨며 억지로 웃었다. 어색하고 오글거린다고 대놓고 말하지 못하니 목에 뭐가 걸린 것처럼 불편하다.

뭐, 서서히 적응이…… 되겠지?

“이 결혼에 반대하거나 방해하는 자들은 차라리 지옥이 더 편하다고 여기게 될 겁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얼굴로 무시무시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황제를 보며 샤로니아가 또 어색하게 웃었다.

“네, 누군지는 몰라도 참, 불쌍하군요.”

오늘 아침에 귀가 간지러운 사람이 여럿이겠다. 이 결혼에 반대할 사람들이 꽤 많을 테니.

* * *

에일린 바르칼라, 헛된 욕망을 버리지 못해 아직도 안간힘을 쓰고 있던 그녀는 자신이 주최한 티 파티가 열리기 10분 전에 황제의 결혼 발표 소식을 들었다.

“네가 뭘 잘못 들었겠지. 정부나 후궁이면 모를까, 천한 출신의 성녀를 어, 어떻게 황후 자리에……!”

쨍그랑! 그녀의 손에서 미끄러진 찻잔이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나버렸다.

“헉, 괜찮으세요? 아가씨?”

하녀들이 서둘러 주변을 정리하고 바들바들 떠는 에일린을 의자에 앉혔다. 오늘 초대한 영애들의 기를 죽이겠다고 무리해서 사들인 고가의 찻잔이 깨져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걸 아까워할 겨를이 없었다.

‘말도 안 돼.’

에일린이 핏기 없는 얼굴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을 때, 티파티에 초대받은 영애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클리오라가 인사를 하면서 예리한 눈을 빛냈다. 그녀는 신전을 통해 발 빠르게 소식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에일린이 왜 저토록 창백한 안색을 하고 있는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대범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그것도 아닌가 보네.’

마치 황후라도 된 것처럼 모든 이들을 아래로 내려다보기에 무슨 묘수라도 갖고 있는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가 보다.

클리오라가 속으로 비웃는 줄도 모르고 에일린은 억지로 몸에 힘을 주고 입가에 미소를 꾸며낸 채 초대한 영애들을 맞았다.

“다들 어서 오세요. 이렇게 보게 되니 더 반갑군요.”

그녀는 주최자로서 책잡히지 않도록 일단은 최선을 다했다. 어쨌든 오늘 모임의 목적은 자신이 황후가 되는 데 걸림돌이 될 이들과 도움이 될 이들을 가려내는 것이었으니까.

“앉으세요. 모쪼록 준비한 차가 입에 맞으셨으면 좋겠네요.”

“어머, 이 찻잔은 그 귀한 드블랑 도자기가 아닌가요?”

“리모네 영애께서 안목이 있으시군요. 바로 알아보시는 걸 보니.”

에일린이 흡족하게 웃었다. 엄청난 가격을 자랑하는 찻잔을 보란 듯이 꺼내놓은 이유는 뻔했다. 주제 파악 좀 하고 알아서 찌그러져 있으라는 뜻이다.

다행히 그 뜻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참석한 영애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차를 홀짝였다. 그러다 어색한 분위기를 견디기 어려웠던지 실리아 백작 영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다들 소식은 들으셨어요? 황제 폐하께서 결혼하겠다고 발표한 상대가 성녀라던데……. 그게 정말 가능한가요?”

“불가능하죠. 공작 영애이신 에일린 영애가 계시는데.”

클리오라가 은근슬쩍 에일린을 추켜세우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에일린은 그녀의 말이 싫지 않았던지, 어서 더 해 보라는 표정으로 턱을 살짝 든 채 대화를 관망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제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바르칼라 공작 가문이신데 보잘것없는 성녀쯤 치워 버리는 거야 일도 아닐걸요.”

클리오라가 교묘하게 조장한 말을 들은 에일린은 생각했다. 그래, 제국 내에서 바르칼라가 하지 못할 일이란 없지, 라고.

“하긴, 우리 모두 에일린 영애께서 그 자리에 오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걸요.”

또 다른 영애가 거들고 나서자 에일린의 눈빛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에일린의 눈동자에 집착과 광기가 깃들기 시작한 것을 본 클리오라는 슬며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 나서서 성녀를 눈앞에서 치워 준다면 그것만큼 기꺼운 일도 없을 것이다. 아마 그걸 보고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라고 하는 것이겠지.

‘네가 수고 좀 해 줘.’

날 위해서.

클리오라의 미소가 위험한 빛을 띠며 짙어졌다.

* * *

그날 오후, 샤로니아는 하트론 궁의 자신의 침실 창 너머로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쿠르르릉.

하늘이 심상치 않은 소리를 내었다.

‘비가 오려나 본데.’

하필이면 결혼 발표를 한 날에 비 소식이 겹칠 줄이야. 이 비는 여러 사람에게 각기 다른 해석을 안겨 줄 것이다.

비를 귀하게 여기는 루하르 제국민들은 황제의 결혼 발표를 신의 은총이라며 기꺼워할 것이고, 이 결혼에 반대 의사를 표하는 이들은 성녀가 마녀라느니, 구름을 부린다느니 헛소문을 떠들어 대며 그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일 테니.

그런 건 다 상관없었다. 문제는 그녀 자신이 의문에 빠졌다는 것이었으니까.

‘정말 내가 물의 여신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물과 의사소통을 하고 물을 부릴 수 있는 능력……. 그건 정말 마즈다크인이기에 가능한 것일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들 때문에 그녀는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창밖을 응시하고 서 있었다.

곧 하늘에서 쏴아아아, 소리를 내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성녀님! 비가 와요!”

이멜다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다가왔다.

“응, 비가 오네.”

무심하게 답하는 샤로니아를 보고도 이멜다의 목소리 톤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그간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분수대의 물이 똑 떨어지기 직전이었는데, 그걸 어떻게 알고 때마침 비가 내리는지 정말 신기하지 않아요?”

난 네가 더 신기해. 그 자그마한 몸에 어떻게 매일 그런 기운이 넘쳐나는지. 샤로니아는 속마음을 숨긴 채 웃음으로 할 말을 대신했다.

“그게 아니라 오늘 황제 폐하께서 중대 발표를 한 기념으로 내리는 비가 아닐까요?”

엘런이 트레이를 끌고 오면서 말했다.

“아, 그런 건가?”

이멜다가 엘런이 트레이에서 옮기는 찻잔을 받아 들며 수긍했다.

탁자 위에 김이 오르는 홍차와 달콤한 애플파이가 놓였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일단은 이것부터 보시고 다른 걸 생각하시죠.”

이멜다가 흥분한 기색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하고 몸을 들썩였다.

오늘은 그간의 성수 판매 실적을 살펴보고 자축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날 황제 측에서 결혼 발표를 했고, 비까지 내리는 상황이었지만 말이다.

“성녀님! 이 아름다운 숫자를 한번 보세요!”

이멜다가 샤로니아 이름으로 예금된 잔액이 적힌 종이를 감격에 겨워 흔들어댔다.

“응? 이렇게 많이 모였다고?”

샤로니아가 깜짝 놀라서 다시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역시 귀족 나리들은 씀씀이가 다르다니까요.”

귀족 사회에서는 유행이 모든 것을 선도한다. 성수가 효험이 있기도 했지만,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유행에 뒤떨어지는 이로 여겨지는 분위기가 매출에 큰 영향을 주었다.

더군다나 재력을 과시하고 싶은 가문들은 아예 대놓고 대량 주문을 했다. 그러니 당연히 잔고가 쌓일 수밖에.

“다 너희가 애써 준 덕분이야. 그러니 약속한 대로 분배할게.”

“성녀님, 정말 3할씩 나누신다고요?”

“어떻게 똑같이 나눌 수가 있어요?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엘런과 이멜다가 동시에 목소리를 높였다. 이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 샤로니아가 수익을 3할씩 나누고 나머지 1할은 재료비와 기타 부대 비용으로 사용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게 진심일 줄은 몰랐는데.

샤로니아가 말한 수익 분배는 이제껏 누구도 취한 적 없던 계산 방식이었고, 신분과 지위가 명백히 구분되어 있는 귀족 사회와도 맞지 않는 계산 방식이었다.

“그래야 너희도 수고한 보람이 있을 것 아니야.”

샤로니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입매가 아주 단단하게 굳어 있는 걸 보니 다른 말은 아예 받아들일 생각이 없나 보다.

“하지만 성녀님…….”

엘런이 부담스러운 마음을 떨치지 못하고 손끝을 꼬물거리자 샤로니아가 웃으며 그녀를 소파에 눌러 앉혔다.

“자, 일단 차가 식기 전에 어서 마시도록 해.”

그녀들은 향긋한 홍차와 아주 잘 어울리는 달콤한 애플파이를 한 입씩 베어 물고 행복에 겨운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비 오는 날에 딱 어울리는 아주 훌륭한 조합이에요.”

이멜다가 과장된 표정으로 맛을 평하던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벌컥 문이 열리고 후드를 깊게 눌러쓴 남자가 들어왔다.

“서, 성녀님, 화, 황제 폐하께서…….”

허겁지겁 그 뒤를 따라온 시종이 앞서 들어온 키언보다 한발 늦게 그의 방문을 알려왔다.

“폐하, 아직 정무를 마치지 않은 시간인데 어떻게……?”

샤로니아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고, 함께 차를 마시던 이멜다와 엘런도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했다.

“비가 오기에 그대가 너무 보고 싶어서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키언이 후드를 뒤로 젖히자 비에 젖은 앞머리에서 물방울 하나가 똑 떨어졌다.

그가 구불구불해진 은발을 무심하게 쓸어 넘기며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의 미간에 하나씩 골이 파였다.

“나도 차 한 잔 주시겠소? 

아까부터 생각한 거지만…… 폐하, 말투가 왜 그러세요?

엘런은 애플파이를 뱉어야 할지 삼켜야 할지 몰라 가슴을 두드렸고, 이멜다는 입에 홍자가 든 줄도 모르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가 내용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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