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며칠 후, 키언은 루카스와 샤로니아를 본궁 응접실로 불러 중요한 일을 상의하고자 했다. 키언의 입장에서는 상의였지만, 루카스의 입장에서는 강제적인 협조였기에 분위기가 퍽 미묘했다.
“자, 일전에 못 끝낸 이야기를 마저 매듭짓도록 하지.”
키언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건네는 말에 루카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샤로니아가 왕녀라는 것을 증명해 줄 물건은 얼마든지 있었다. 왕실의 인장이며, 초상화며, 그녀가 왕궁 무도회에 공식적으로 선보일 때 쓴 티아라까지 모든 것이 다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문제는 그걸 내주기 싫다는 거다.
“정말 내 신분을 증명할 물건이 있는 거야?”
샤로니아의 질문에 루카스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래, 있어.”
황제가 질문했다면 대답하지 않았을 테지만, 샤로니아가 질문했기에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카스는 참담한 심정으로 침울하게 ‘있다’는 말만 했다.
“나는 왜 그 사실을 몰랐지?”
“넌 너무 어렸으니까.”
어린 그녀가 도망쳐서 살아남은 것만 해도 장했다. 만일 그녀가 홀로 살아남아 마즈다크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루카스는 소름이 돋아났다.
“그래서, 그게 어디에 있는데?”
드디어, 맞닥뜨린 질문에 루카스의 어깨가 움찔했다. 차를 들이켜며 여유롭게 남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키언의 눈빛에 반짝 빛이 들어왔다.
말해 주기 싫어. 황제 놈 표정을 보니 더더욱 말해 주기 싫어. 루카스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샤로니아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움찔거렸다.
그는 직감했다. 자신은 절대로 그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그녀의 눈빛 하나에 마음이 사르르 녹는데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
긴 한숨을 뽑아낸 루카스가 결국 장소를 실토했다.
“마즈다크 왕국.”
“뭐?”
“거긴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걸로 알고 있는데.”
하지만 누구에게도 수긍하는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알다시피 마즈다크 왕국엔 특별한 힘이 전해 내려오기로 유명하지. 샤론, 넌 어려서 잘 몰랐겠지만, 왕궁에는 마법으로 이루어진 아공간이 많이 있었어. 다행히 왕궁 건물이 남아 있어서 나는 중요한 물건을 거의 그곳에 보관했고.”
“거기까지 갈 수 있는 방법은 있나? 아, 이동 마법으로 가면 되겠군.”
키언이 단박에 결론을 내고 씨익 웃었다.
아흐, 저 얄미운 황제 같으니라고. 루카스가 불을 뿜어 낼 것 같은 눈으로 키언을 노려보았다.
“난 한 번도 그곳에 뭔가가 남겨져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샤로니아가 짙어진 시선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기억 속에 마즈다크 왕국은 회생 불가능한 죽음의 땅일 뿐이었으니까.
부모님과의 추억이 깃든 곳은 폐허가 되었다. 마즈다크 왕국은 내분으로 인해 무너졌고 참혹한 결말을 맞았다.
왕국의 주인이 사라지자 열강들은 마즈다크인들이 가진 마력을 탐내며 앞다투어 쳐들어왔다. 그것을 갖기 위한 전쟁과 살육은 결국, 마즈다크인들이 이 땅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찬란한 마법 문화를 꽃피웠지만, 그로 인해 멸망당한 비운의 왕국, 사람들은 마즈다크 왕국을 그렇게 불렀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황폐한 땅, 그곳에 들어간 자는 누구든 저주를 받는다는 소문에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는 버려진 왕궁에 그녀의 신분을 증명할 물건들이 있단다.
“지금 당장 갔다 오지.”
필요한 물건의 위치가 정확하다면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키언이 샤로니아의 신분 증명에 대해 얼마나 신경을 쏟고 있는지 알았더라면 그의 즉각적인 행동을 백번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루카스는 그걸 알고 싶지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뭐라고? 이런 미친 황제가! 루카스는 키언의 기함할 만한 추진력에 발끈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대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설 줄은 몰랐는데.”
키언이 웃으면서 하는 말에 루카스는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고!
하지만 샤로니아 앞에서 차마 아니라고 소리칠 순 없으니 부글부글 끓는 속을 삭일 뿐이다.
“눈에 띄지 않게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아. 기사단 내에서 믿을 만한 자로 한 사람만…….”
키언이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폐하, 사실은 아까부터 델라크 경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테오르가 전하는 소식에 키언이 느리게 턱을 쓰다듬었다. 헤이든 정도면 믿을 만하고, 검술 실력도 출중하니 동행하기에 적임자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함께 다녀오면 되겠군. 들어오라고 해.”
키언의 허락이 떨어지고 잠시 후, 헤이든이 응접실로 걸어 들어왔다.
여유롭게 차를 마시던 키언이 컥, 사레가 걸려 콜록거렸다. 그는 지금 걸어 들어오는 이가 헤이든 델라크가 맞는지 눈을 끔벅이며 다시 확인했다.
“백작! 오늘 아침에 뭘 잘못 먹은 건가?”
간신히 기침이 멎은 키언이 심각한 말투로 물었다. 왜냐하면 헤이든이 생전에 본 적 없던 드레스 차림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뭘 잘못 먹었다니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폐하.”
인사를 하다 말고 헤이든이 눈을 흘겼다. 드레스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전해지는 날 선 기운에 키언은 허탈하게 숨을 내뱉었다.
도대체 그간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람이 이렇게 달라진 거야? 키언은 구겨져서 펴지지 않는 눈썹에 억지로 힘을 주고 상황을 설명했다.
“지금 우리는 이동 마법을 통해 마즈다크 왕국에 가려고 해.”
이동 마법? 마즈다크 왕국? 남들은 무서워서 벌벌 떨 단어를 들은 헤이든의 눈빛이 오히려 반짝반짝 빛났다.
“저도 동행하는 건가요?”
만일 다른 말을 했다간 검을 빼 들고 결투를 신청할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가 물었다.
“뭐, 일단은, 그러려고 해.”
키언이 헤이든의 드레스에 시선을 고정한 채 더듬더듬 끊어서 말했다. 저 상태로 검을 휘두를 수 있긴 한 걸까.
그가 자신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건 말건 헤이든은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신이 났다. 예전에 호라산에서 뱀 마물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따라갈 것을 얼마나 후회를 했던지.
‘역시, 당신을 만나러 오길 잘했어.’
헤이든이 루카스를 향해 담뿍 미소 지었다. 그를 만나러 황궁에 온 길이었는데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모험을 하게 되다니. 그녀는 행운의 여신이라도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부담스러운 헤이든의 미소를 본 루카스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아무리 이동 마법으로 편하게 왔다 갔다 할 수 있더라도 전력에 도움이 안 되는 연약한 여자를 일행으로 삼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아무튼 황제의 결정은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아무래도 기사단의 책임을 맡고 있는 그녀의 작위와 신분 때문에 동행시키려는 것 같은데, 그 책임감이 그가 보기엔 한없이 막중해 보여 그녀가 측은할 정도였다.
“뭐 하고 있는 건가? 어서 이동 마법진을 그리지 않고.”
키언이 손짓하자 루카스는 모든 것을 초월한 심정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다 샤론을 위해서야.’
루카스가 마음을 다잡고 주문을 외우자 커다란 금빛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폐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테오르가 막 떠나려는 키언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금방 다녀올 것이니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황궁이나 잘 지키고 있어.”
키언이 무심하게 손을 흔든 뒤 마법진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원래부터 한번 마음먹은 것은 절대로 번복하지 않는 성격이었기에 테오르는 다른 말을 덧붙이는 대신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다녀올게요.”
샤로니아까지 테오르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그는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뭐지? 이건 마치 재밌게 잘 놀다 오라고 나들이 가는 일행을 배웅하는 것 같은 기분인데…….
그러는 사이, 빛에 휩싸인 네 사람이 마법진과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 * *
루카스가 발동시킨 마법진은 샤로니아가 책을 보고 실험적으로 발동시킨 것과는 달리 굉장히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네 사람 모두 멀쩡히 두 발로 선 채 마즈다크 왕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가 마즈다크 왕국이로군.”
키언이 짙어진 시선으로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과거에 번영했던 도시는 황폐해지고 왕성엔 불탄 흔적이 가득했다. 새카맣게 그을린 왕궁을 올려다보는 샤로니아의 표정이 꽤 복잡해 보였다.
극적으로 왕국을 탈출하던 날 보았던 불타는 도시의 잔상이 뼈대만 남은 앙상한 왕궁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샤론…….”
“힘들면 말해.”
키언과 루카스가 동시에 말하며 샤로니아의 양쪽 어깨에 하나씩 손을 올려놓았다.
그것이 우습기도 하고 마음 한편이 묵직하기도 해서 샤로니아는 괜찮다고 웃어 보였다.
황폐한 왕궁의 모습은 예전의 좋지 못한 기억들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되는 것이 있다면, 잿더미가 된 그 땅에도 초록 빛깔의 새 생명이 움트고 있다는 것이었다.
새카맣게 그을린 성벽에는 강인한 생명을 가진 덩굴들이 피워낸 꽃이 하늘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희망적인 미래를 노래하는 것 같았다. 과거의 찬란했던 문화와 번영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우와, 믿어지지 않아요. 내가 지금 마즈다크 왕국에 와 있다니! 입구는 이쪽인가요?”
헤이든이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자 루카스가 놀라서 뛰어갔다.
“조심해요! 그러다가 다친다고요!”
그 모습을 바라보던 키언과 샤로니아가 눈을 마주치고는 쿡,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루카스가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지켜보는 재미가 있으니 나중에 알려 줘야겠다.
“여기가 입구예요. 바닥이 울퉁불퉁하니 넘어지지 않게 다들 조심하시고요. 저쪽 계단으로 올라갈게요.”
루카스의 안내에 따라 그들은 예전에 마법을 통해 태양처럼 빛나던 샹들리에가 있던 넓은 홀을 지나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
차가운 돌바닥을 내딛는 발 소리가 황량한 실내에 크게 울려 퍼졌다. 검게 그을린 외부의 모습과는 달리 내부는 크게 훼손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생각보다는 멀쩡하군.”
키언이 중얼거리는 말에 루카스가 답했다.
“다행히 국왕께서 쓰시던 집무실엔 불길이 닿지 않았죠.”
루카스가 어느 방문 앞에서 문고리를 향해 손을 내밀자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저절로 열렸다. 특정한 사람에게만 열리도록 되어 있는, 마즈다크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마법의 일종이었다.
끼이이익,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끼게 만드는 낡은 문소리를 들으며 그들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루카스가 손짓을 하자 낡은 램프에 불이 붙었다. 깜깜했던 실내가 밝아지자 방 안의 풍경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굉장한 미인이셨군.”
키언이 벽에 걸린 초상화를 보며 감탄했다.
마즈다크 왕국의 국왕이었던 헨리 폰 마즈다크 5세와 왕비였던 레이지나 반데르크의 초상화가 벽면 한쪽에 걸려 있었다.
샤로니아의 외모와 거의 흡사한 레이지나 왕비는 흑발에 푸른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초상화 속의 눈빛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한 느낌이었다.
“왕족이었어요? 그것도 마즈다크 왕국의?”
초상화를 유심히 살피던 헤이든이 목소리를 높였다. 초상화 속의 국왕과 왕비의 모습이 남매와 너무 닮아서 모르려야 모를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헤이든의 목소리를 들은 샤로니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정이 있어서 밝힐 수 없었어요. 이해해 주세요.”
“이해하고 말고 할 게 있나요? 그런데 정말 놀랍군요.”
헤이든이 마즈다크 국왕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입을 크게 벌렸다. 초상화 속 국왕의 모습이 루카스와 거의 똑같았던 까닭이었다.
흑발이 내력인 마즈다크인들이었지만 눈동자 색만큼은 집안마다 다 달랐는데 루카스와 샤로니아는 부모로부터 각각 다른 눈동자 색을 물려받았다.
기분 탓인가? 마즈다크 왕국에 도착했을 때보다 그녀의 눈빛이 더 반짝거리는 것 같은데? 루카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곧 상념을 지웠다. 봉인된 것이나 다름없는 아공간을 열려면 많은 에너지가 소모될 것이었으니까.
“모두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나요. 다칠 수도 있으니까.”
루카스가 특히 가장 다치기 쉽고, 연약한 헤이든을 챙기며 말했다.
“감사해요.”
그의 호의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생긋 웃는 헤이든의 모습을 본 키언이 느리게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그냥 이쯤에서 사실을 말해 주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