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요망한 구원자 (52)화 (52/123)

52화

저벅저벅, 황궁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루카스의 표정이 어두웠다.

‘뭘 같이 쓴다고?’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단어가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맴돌았다.

‘아닐 거야. 뭘 잘못 알았겠지. ‘침실’이라니! 말도 안 돼!’

너무 골똘히 생각에 빠져 걷고 있었기에 그는 제게서 차마 갈무리되지 못한 감정들이 마력으로 표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쿠르르릉! 하늘이 새카매지고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마치 폭풍이 몰아칠 것처럼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아름답던 황궁 정원의 나무들이 뿌리가 뽑힐 것처럼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으악!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신께서 노하셨나 봐!”

“조심해! 벤치가 날아오고 있어!”

시종들이 혼비백산하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모두가 날뛰는 상황에 루카스만이 태풍의 눈처럼 고요할 뿐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아닐 거야’를 중얼거리다가 황제의 집무실이 있는 본궁을 올려다보았다.

“내 동생에게 무슨 짓을 했다면…… 죽인다.”

루카스가 살벌하게 중얼거리며 이를 아드득 갈았다.

그가 눈짓을 하자 마치 누가 문을 열어 준 것처럼 본궁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그가 고압적인 발걸음을 내디뎌 안으로 들어서자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루카스가 내뿜는 기운이 너무도 흉흉했지만 그가 누구인지 아는 본궁의 기사들은 섣불리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기사들이 멍하게 있는 사이, 루카스는 벌써 황제의 집무실 앞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가 마력을 사용하자 벌컥, 키언의 집무실 문이 바람에 의해 열어젖혀졌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테오르가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이 소란 속에서도 키언은 아주 태연한 얼굴이었다. 마치 루카스가 자신을 찾아오리라고 예상한 것처럼 평온한 모습이었다.

“안 그래도 물어볼 말이 있었는데, 때마침 잘 왔네.”

키언이 자신을 보며 들어오라고 고갯짓을 까딱하자 루카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루카스의 표정이 어떻든 상관없이 키언은 여유롭게 테오르에게 지시를 내렸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나가 있도록 해.”

“하, 하지만 폐하…….”

테오르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루카스를 보며 염려 섞인 말을 중얼거렸다.

“괜찮으니, 나가 있어.”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던 테오르가 마지못해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올려다보기 목이 아픈데 좀 앉지 그래?”

소파에 느른하게 기댄 키언이 루카스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했다.

잡아먹을 듯이 매서운 눈길로 그 손가락을 째려보던 루카스가 천천히 키언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얼굴인데?”

여유로운 키언의 말과 태도에 루카스는 어쩐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생각 같아서는 황제의 멱살을 거머쥐고 제 동생과의 관계를 실토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는 왕세자, 몰락한 왕국일지언정 고귀한 왕족의 법도가 몸에 밴 자였다.

루카스는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키언의 얼굴을 살폈다.

그래,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얼굴임엔 틀림없다. 하지만 황제의 준수한 외모는 순진한 제 동생을 꿰어 낸 위험하고 쓸모없는 것일 뿐이다.

루카스가 비뚜름하게 고개를 꺾으며 다리를 꼬고 팔짱을 꼈다. 황제 앞에서 보여선 안 될 오만불손한 태도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키언도 딱히 뭐라 할 마음이 없는지 그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내 동생을 어쩔 생각입니까?”

루카스의 물음에 상황을 완전히 파악한 키언이 피식 웃었다.

“어쨌으면 좋겠는가?”

오히려 질문이 다시 돌아오자 울컥한 루카스가 키언을 노려보았다.

온갖 미사여구를 다 갖다 붙이며 샤로니아를 찬송하고 그녀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 줄 것이라 약속하고 또 약속해도 모자랄 판인데, 뭐? 어쨌으면 좋겠냐고?

“그걸 지금 왜 제게 묻는 겁니까?”

루카스가 몸을 곧추세우며 이를 꽉 깨물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온 살벌한 기운이 점점 응축되더니 돌풍이 되어 불어 닥치기 시작했다. 집무실 안의 물건들이 차츰 공중으로 떠올랐다.

만일 그가 샤로니아를 잠깐의 유흥으로 생각했든지, 아니면 정부쯤으로 취급했다면…….

‘죽인다! 반드시 죽일 거야!’

루카스의 흉흉한 기운이 그대로 반영된 바람은 집기들을 공중에 날리고도 모자라 이제 가구들까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난리 통의 한가운데 앉아 있으면서도 키언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담담했다.

“그냥,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른 관계를 생각할 수도 있으니 물어봤네.”

“황제께서 원하는 관계는 뭔데요?”

“황후.”

루카스가 놀라자 바람이 뚝 멈췄다. 공중에 떠올랐던 집기들이 시끄럽게 후두둑 떨어져 내리며 주변이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지금, 정식 부인으로 우리 샤론을 맞겠다고 말한 게 맞습니까?”

“내 부인은 그녀 하나밖엔 없을 거거든.”

‘정식’이라는 말 자체를 운운하는 게 퍽 우습다는 듯이 키언이 말을 덧붙이며 실소를 내뱉었다.

루카스의 눈이 도르르 굴러갔다. 샤로니아 정도라면 제국 최고의 황후 정도는 되어야 말이 되지.

그런 의미에서 생각이 제대로 박혀 있는 황제라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오늘 제 손에 목숨이 끊어졌을 테니까.

그는 그런 말들을 중얼거리며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보았다.

‘그래도 결혼이라니!’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단 말이다.

이리저리 널뛰는 루카스의 심경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것을 지켜보던 키언이 불쑥 말했다.

“설마, 혼인은 불가하다느니, 샤론을 보낼 수 없다느니, 그런 진부한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정곡을 찔린 루카스가 움찔하며 키언을 노려보았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어!

“제가 이 결혼에 무조건 찬성해야 할 이유가 있는 건 아닐 텐데요.”

잔뜩 꼬여 삐딱하게 건넨 말에 키언이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글쎄, 이유를 꼭 알려 줘야 하나? 때론 모르는 게 약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러니까 모르는 게 왜 약이 되는 건데! 미소 짓는 황제가 얄미웠던 루카스가 콧김을 흥흥 뿜어 냈다.

‘아무래도 죽이는 게 낫겠어!’

루카스가 생각을 고쳐먹는 사이, 키언이 말했다.

“날 죽이면 아마 샤론이 평생 그대 얼굴을 보지 않을걸?”

“큿!”

뭐, 뭐야 독심술이라도 배운 거야? 죽이려던 걸 어떻게 알았지? 루카스가 놀라서 흠칫, 어깨를 떨었다.

키언은 전장에서 구르고 구른 만큼 살기를 읽는 데 귀신같은 능력이 있었다. 뭐, 그런 능력이 아니더라도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낸 루카스의 시선을 보면 누구나 짐작할 만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니 헛된 희망 사항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쳇, 마음에 안 드는 황제 같으니라고. 정곡을 찔린 루카스가 속으로 툴툴거렸다.

키언은 루카스의 약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헤어졌다가 겨우 만난 동생에게 버림받는다는 건 세상이 무너지는 일일 것이다. 그건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었다.

“샤론이 왕녀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나?”

키언이 비로소 본론을 꺼냈다. 루카스의 대답 여부에 따라 앞으로 어떻게 할지 그의 행로가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그런데 이런 중차대한 질문에 루카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금세 복잡한 표정으로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니 증명할 방법이 있는 게 틀림없다. 표정이 너무 잘 읽히는 게 탈이라니까.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보군.”

확신에 찬 키언의 말에 또다시 루카스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샤로니아가 왕녀라는 사실을 증명할 방법은 찾으려고만 한다면 여러 가지가 있었다.

방법이 있지만 가르쳐 주기 싫은 거다, 이 황제 놈아!

다시 살기가 가득해진 루카스의 보랏빛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키언이 픽, 웃었다.

“다행이군. 샤론이 고생하지 않아도 되어서.”

거기에다 왜 또 우리 샤론을 갖다 붙이는 건데!

싫어, 안 가르쳐 줘! 못 가르쳐 줘! 결국은 꾹꾹 눌러 참던 루카스가 폭발했다.

아까 돌풍에 휩싸여 아무렇게나 처박혀 나뒹굴고 있던 집기류가 다시 공중에 떠올랐다.

“으아,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보다 못한 그림자 기사단 몇 명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를 말렸다.

“이거 놔! 오늘 내 손으로 죽이고 말 거야!”

그 아수라장 가운데서 키언만이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흡족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 * *

“카티르, 쥐새끼를 찾았습니다.”

사제 하나가 나지막하게 건네는 말에 마구스의 입매가 조소를 머금고 비틀렸다.

“그래? 때마침 잘 되었구나.”

쥐새끼를 찾았으니 어떻게 요리를 할까나. 마구스가 음침한 눈동자를 굴리며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쥐새끼는 구석으로 몰아야 제맛이지.”

쿡, 참지 못하고 웃음을 토해 낸 그가 사제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지시했다.

“알겠습니다, 카티르.”

사제가 예를 갖춘 뒤 물러가는 것을 보며 마구스가 중얼거렸다.

“본보기가 중요한 거야. 황제의 개가 되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줘야지. 그렇지 않으냐, 하데스?”

그가 마물 하데스에게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시 후, 사제 데니얼은 마구스의 부름을 받고 대사제장의 승인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신전의 가장 안쪽 성전에 도착했다.

‘무슨 일일까?’

데니얼은 불안감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하지만 자신과 함께 온 다른 사제를 보며 겨우 마음을 다잡는 중이었다.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났다면 굳이 다른 사제까지 끼워서 대동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는 가서 해야 할 업무가 있다는 말을 믿으려 애를 쓰며 성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은 내부를 아늑하고 다채롭게 했다.

데니얼은 사제 하나와 함께 마구스가 기도하고 있는 강단까지 갔다.

“차, 찾으셨습니까? 카티르.”

어쩐지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지게 흘러나왔다. 이래선 안 된다. 데니얼은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다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래, 왔구나.”

마구스가 기도를 중단하고 데니얼을 돌아보았다.

그 눈을 바라본 데니얼의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마구스의 새카만 눈은 신께 기도를 올리던 대사제장의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혼탁하고 께름칙했으니까.

“시키실 일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데니얼은 최대한 마구스의 성미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공손하게 말했다.

“아아, 그랬지.”

마구스가 잠시 잊었던 것이 생각난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 디모넌이 도와줄 테니까,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야.”

마구스가 빙긋 웃는 것을 본 데니얼이 안심하며 물었다.

“제가 할 일이 뭡니까?”

“아, 그거? 그건……, 신의 품에 안기는 일이지.”

마구스의 말이 끝맺기도 전, 함께 온 사제가 단검을 꺼내 데니얼의 목을 그었다.

“커헉!”

날랜 동작을 피할 수 없었던 데니얼이 한 손으로 목을 눌러 지혈하며 거친 신음을 토해내었다.

“왜? 이 사실도 황제에게 고해바치고 싶은가?”

이죽거리는 마구스의 얼굴을 보며 데니얼은 모든 사실이 들통났음을 깨달았다.

털썩, 저절로 무릎이 꺾였다. 갑자기 쏟아진 피가 쇼크를 몰고 왔던 탓에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목숨을 구걸하지 않기 위해 이를 꽉 깨물었다. 죽더라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추하게 매달리고 싶지 않았다.

꺽꺽거리며 숨이 넘어가는 데니얼을 보며 마구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너무 싱거운데?”

궁지에 몰린 쥐새끼가 발악하는 것을 구경하려고 했는데 재미없게 그냥 끝나 버렸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다른 구경거리를 즐길 수밖에.

“자, 하데스. 이제 네 차례란다.”

피 냄새를 맡고 그르렁거리던 마물을 놓아주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사체를 먹어 치운다.

“네가 있으니 뒤처리할 필요가 없어 좋구나.”

흐뭇한 미소를 짓는 마구스의 시선 끝에는 이전과 다르게 끔찍한 괴물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한 마물 하데스가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