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키언과 시선이 얽힌 샤로니아는 눈도 깜박할 수 없었다. 마치 그에게 온몸이 묶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복수를 위해서라면 불나방이 되는 것을 자처해서라도 기꺼이 불 속에 뛰어들 생각이었다는 것을.
마구스의 목숨을 끊어 놓을 수만 있다면 제 한 몸 희생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은 그만큼 약점이 생긴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약점 따윈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와의 관계가 ‘계약’으로만 끝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어쩌다 이렇게 큰 약점이 생겨 버린 걸까.
키언은 물기가 차오르기 시작한 푸른 눈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래서 더더욱 그녀를 놓아줄 수가 없었다. 잠깐이라도 그녀를 놓치면 아침 안개처럼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웠다.
“어서 대답해. 너도 그럴 거지?”
구차하게 구걸해서라도 약속을 받아낼 것이다. 질척거리는 방해물이 되어서라도 끝까지 그녀를 붙들고 말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몸담고 있던 무채색 세상을 눈부실 만큼 찬란한 색상으로 바꾸어 준 것이 그녀였으니까.
사막처럼 건조하고 삭막한 땅에 내린 단비처럼 온몸과 마음을 흠뻑 적시고 기어코 그 안에서 새 생명을 움트게 만들었으니 그녀는 책임을 져야 한다.
목숨보다 소중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아 버린 지금, 그는 세상에서 가장 구차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떤 순간에도 짐을 포기하지 마.”
키언이 괴로운 듯 미간을 일그러뜨린 채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뺨을 감싸 쥐었다.
그의 손길이 닿자 결국 샤로니아의 눈에서 눈물이 도르르 굴러떨어졌다.
복수는 왜 이다지도 힘든 걸까. 악인이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힘겨운 길을 가야 하는 걸까.
복잡한 물음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그의 손길이 상황과 맞지 않게 너무 다정해서 더 눈물이 났다.
‘당신을, 사랑해요.’
샤로니아는 거부하지 못할 결론에 맞닥뜨린 후에야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폐하를 포기하지 않아요. 어떤 순간에도.”
느릿하게 이어진 대답을 듣고 나서야 키언이 안심한 듯 짤막하게 숨을 내뱉었다.
“이제부터 뭐든 함께 하는 거야.”
그것이 일상이든, 복수든, 생명이든, 죽음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다른 길은 없다. 함께 가는 길만 존재할 뿐.
키언이 한 줌의 온기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절박하게 그녀를 안았다. 품 안에 안겨든 자그마한 여자가 이 세상보다 벅차게 느껴졌다. 풍랑이 이는 바다처럼 격동하던 마음이 그녀의 체온에 단박에 잔잔해졌다. 그것은 몇 번을 겪어도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마음이 안정되었던 탓일까. 이제야 웃음이 났다. 둘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미소 지었다.
“오늘, 너무 예뻐.”
키언이 무안한 얼굴로 말했다. 무도회에서 했어야 할 말을 지금에야 하고 있었으니까.
“내내 그 말을 해 주고 싶었어.”
그는 변명처럼 뒷말을 덧붙이다가 자조하며 쓰게 웃었다. 하지만 샤로니아는 그런 키언의 모습에 오히려 말간 웃음을 터트렸다.
“감사해요, 폐하도 멋있으세요.”
키언이 한 낯간지러운 인사를 그대로 돌려준 샤로니아가 별안간 발끝을 세워 그의 입술에 촉, 입을 맞췄다.
키언은 그녀의 짧은 입맞춤에 호흡을 다 빼앗긴 사람처럼 숨을 멈췄다. 그리고 물밀 듯 밀려온 아쉬움을 견디지 못하고 미간을 찡그렸다.
“너무하는군.”
뭐가 닿았다 떨어졌는지도 모르겠어. 그가 투정부리듯 하는 말에 샤로니아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눈매가 접히도록 환한 미소를 지으며 샤로니아가 키언에게 다가섰다.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할 정도로 간격을 좁힌 그녀가 낮게 속살거렸다.
“얼마나 오래 하면 만족하실까요?”
남자를 한순간에 홀릴 것처럼 요망한 눈웃음을 지으니 발밑이 푹 꺼지는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킨 키언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하게 받치며 말했다.
“가능한 한, 아주 오래.”
자신의 욕망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는 그를 보며 샤로니아가 쿡, 웃음을 터트렸다.
“해 보죠, 뭐. 가능한 한 아주 오래.”
그리고 샤로니아가 곧바로 그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키언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입맞춤을 음미했다. 단, 그녀가 곧바로 떨어지지 못하도록 허리를 감싸 안은 채 말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서늘한 밤바람이 그들을 흔들고 지나갔던 탓에 키언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샤로니아에게서 몸을 떨어트린 후, 급하게 재킷을 벗어 그녀의 몸을 감쌌다.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어깨가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추울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 괜찮은데……. 감사해요.”
샤로니아는 재킷으로 자신의 몸을 둘둘 마는 키언을 보고 웃지 않으려고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의 얼굴이 어쩌면 이렇게 세상 진지한지 웃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어떻게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샤로니아가 키언의 뺨을 쓰다듬으며 충동적으로 말했다.
“폐하를 사랑해요.”
아무런 전조 없이 툭 던져진 고백에 키언의 눈동자가 한차례 흔들렸다. 그는 제 뺨 위에 올려진 샤로니아의 손을 감싸 쥐고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이상하네. 오늘따라 너무 후한데.”
그의 말에 결국 웃음이 터진 샤로니아가 쿡쿡 웃으며 그와 이마를 맞댔다.
“저는 표현에 인색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니 앞으로 좀 더 후해져 볼게요.”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 서로를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했으니 못 할 일이 없었다.
“그것 참 반가운 소리군.”
서로를 향해 미소 짓는 이들 위로 은은한 달빛이 앞길을 축복하는 것처럼 고요하게 그들을 비추었다.
* * *
“샤론! 응? 어딜 갔지?”
루카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샤로니아를 찾았다. 조금 전까지 분명히 근처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희한하게도 사라졌다.
어디로 간 걸까? 그는 샤로니아의 흔적을 찾기 위해 연회장 이쪽저쪽을 돌아다녔다.
“어? 안녕하세요.”
그러다가 헤이든과 딱 마주친 루카스가 반갑게 인사했다.
드레스 차림이 창피해서 구석에 콕 박혀 술을 마시던 헤이든이 놀라서 컥, 사레가 걸렸다.
“이런, 괜찮아요?”
심하게 콜록거리는 헤이든을 루카스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아, 고마워요.”
기침 때문에 눈가가 촉촉하게 젖은 헤이든이 고개를 들었다. 여자의 눈물에 매우 약한 루카스는 꽤 당황해서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죠?”
루카스의 시선 끝에 그녀가 마시던 술잔이 있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지 않고서야 가녀린 여자 혼자 독한 술을 마시고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매혹적인 붉은 머리칼에 진주 핀을 꽂아 포인트를 준 헤이든은 아름다웠다. 이멜다가 손봐 준 드레스는 굉장히 고풍스러운 디자인이어서 헤이든의 분위기를 한층 더 매혹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살짝 취기가 돌아 풀어진 그녀의 옅은 갈색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카스의 본능이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위험 신호를 보내왔다.
“무슨 일은요. 아무 일도 없…….”
헤이든이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델라크 가문의 원로들이 추가로 덧붙인 조건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파트너와 한 곡 이상 춤을 출 것.’
상대는 반드시 남자여야 한다는 이상한 항목까지 붙은 조건이었다.
루카스를 바라본 헤이든은 생각했다.
‘적임자야!’
그라면 선입견 없이 자신과 춤을 춰 줄 것이다. 헤이든은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거절당하면…… 뭐, 그건 그때 생각해야지.
“나랑 춤출래요?”
헤이든은 행여 그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옷자락을 꼭 부여잡고 물었다.
“춤…… 이요?”
루카스는 뭔가 굉장한 말이 나올 것 같아서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맥이 탁 풀렸다.
“하하, 춤은 얼마든지 출 수 있죠.”
그가 웃음을 터트리자 보랏빛 눈동자가 예쁘게 휘어졌다. 웃을 때 그의 얼굴은 남자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예뻤다. 만일 눈동자색이 샤로니아와 같았다면 그녀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두근두근, 그녀의 심장이 고동쳤다. 예쁜 것에 약한 헤이든에게 그의 미소는 치명적이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연거푸 들이마신 술 때문에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뛰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제 뺨을 때려서라도 정신을 차리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마워요.”
귀 끝이 조금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를 보고 루카스가 피식, 웃었다.
‘귀엽네.’
자기가 먼저 춤 신청한 것이 꽤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제국 내에서 그녀를 보고 귀엽다고 생각한 사람은 루카스가 유일할 테지만 그는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자, 그럼 가실까요?”
루카스는 숙녀가 이렇게 부끄러워하면서 춤을 신청하는데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단 한 곡 추고 나서 샤론을 찾으러 가도 늦지 않을 거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헤이든에게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은 평민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귀족적이고 기품이 있었지만, 춤 출 생각에 잔뜩 긴장한 헤이든은 깊은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헤이든이 살포시 손을 겹쳤다. 홀 중앙으로 나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뭐 아무렴 어때. 헤이든은 눈앞의 잘생긴 사내가 화려한 샹들리에 불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바라보며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어대건 말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눈매가 접히도록 자주 웃어서 몰랐는데 무표정할 때 그의 눈매는 꽤 날카로웠다. 예리한 눈매를 살짝 덮는 흑발과 잘 차려입은 정복이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춤을 추기 전, 예를 갖춰 인사한 그들은 손과 손을 마주 잡고, 허리와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응? 몸이 꽤 좋잖아?’
헤이든은 하마터면 그의 가슴팍을 더듬을 뻔했다. 그녀는 제 손에 닿는 근육의 감각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 정도 근육량이면 매일 단련을 한다는 것인데…….’
만일 그가 자기 수하였다면 가슴팍을 더듬어서라도 정확한 몸 상태를 체크했을 것이다. 그래야 적절한 훈련 방법이나 검술 지도를 할 수 있으니까.
물론 그에 따른 부작용은 꽤 심한 편이었지만 헤이든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누구도 그녀를 여자로 보지 않는 분위기는 어쩌면 스스로가 만든 것인지도 몰랐다.
“춤을 잘 추시네요.”
자신을 매끄럽게 리드하는 루카스를 보며 헤이든이 눈을 크게 떴다.
“다 반복 학습 덕분이지요.”
왕국을 이어받을 왕세자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익혀야 했다. 이제는 멸망한 나라여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 가슴 아팠지만 말이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헤이든도 어릴 때 춤을 배운 이후로 처음 추는 것이었지만 워낙 몸을 쓰는 감각이 뛰어났던 터라 몸이 동작들을 다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을 골탕 먹이려는 속셈이 분명하다며 가문의 원로들을 향해 ‘망할 영감탱이들’을 중얼거리던 것이 헤이든의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졌다.
“재밌네요. 우린 뭔가 이야기가 잘 통하는 것 같아요.”
“그러네요.”
둘은 마주 보고 쿡, 웃음을 터트렸다. 상대방이 누구인지에 따라 무도회가 즐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은 날이었다.